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50화 (50/115)

50.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살벌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찌나 달콤하게 웃는지. 불안이나 걱정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웃는 얼굴을 보자 놀랐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두렵지 않은 걸까?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을 앞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디랑 싸워야 하는데요? …많이 위험한가요?”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졌다. 냉정한 얼굴로 돌아온 에드윈이 나디아의 말을 단호하게 쳐 냈다. 한결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둘 사이에 거대한 벽이 갑작스럽게 밀려와 선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의 말에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더 따지고 들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오늘은 왠지 모를 용기가 솟았다. 나디아는 한걸음 물러서는 대신 대담하게 굴기로 했다. 그가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양 뺨을 붙잡고 눈을 맞췄다.

“알려 줘요.”

에드윈이 제 뺨을 붙잡은 자그마한 손을 흘끔 보더니 어쩔까 고민하는 낯을 했다. 나디아는 그 표정이 꾸며 낸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그의 의도대로 안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녀가 매달리는 게 보고 싶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의 고약한 성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서서히 에드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디아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몸을 뒤로 뺐지만 커다란 손이 덜미를 감싸 쥐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외쳤다.

“궁금하면 뭐든 물어보라고 했잖아요!”

말을 할 때마다 코앞까지 다가온 입술이 자꾸만 스쳤다.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얇은 피부가 스치는 감각은 간지럽기 그지없었다. 절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모두 대답해 주겠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대답이었다. 분명 그렇긴 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제일 분했다.

에드윈은 항상 관대한 사람인 척하면서 빠져나갈 구석이 있도록 교묘하게 말하는 취미가 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경험 한 적 있으면서도 매번 그를 믿게 되는 스스로의 바보 같음에 한탄했다.

그녀가 분한 듯 노려보자 원하던 반응이었는지 에드윈이 얄밉게 낄낄거렸다. 그는 즐겁게 웃으며 나디아를 제 품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미끄러워진 물 탓에 버티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으로 엎어진 그녀는 애써 숨을 골랐다.

그가 말해 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혼자만 아무것도 모른 채 있어야 한다는 게 싫었다. 하나뿐인 남편은 그녀를 놀리거나 깎아내리는 게 아니면 관심도 없었으니 그녀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가만히 있다가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력감이 두둥실 떠올랐다. 매번 똑같이 겪으면서도 바보같이 다시 일말의 기대를 안게 되는 자신이 진저리가 났다.

그는 그녀를 멍청하다고 하진 않았지만 나디아는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말대로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로 조금 전에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던 남자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그녀가 점점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침잠하는 사이 에드윈이 손끝으로 나디아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맞았다.

“화가 났나?”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웃음을 흘리자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나디아는 그의 손끝을 피해 고개를 그의 목덜미에 묻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젖은 피부가 뺨에 닿았다.

“내가 아내를 데리고 사는 건지 애를 데리고 사는 건지 모르겠군.”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뒤늦게 달래듯 말을 이었다.

“들으면 더 불안해지기만 할지도 몰라. 간신히 되찾은 안정이지 않나?”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에 나디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피하려 했던 시선이 맞부딪쳤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뜻이지? 아니, 별 뜻 아닐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놀란 티를 내는 것이 더욱 수상하게 보일 텐데. 뒤늦게 든 생각에 정신을 차린 나디아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부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물이 다 식겠군.”

먼저 일어난 에드윈은 가운을 챙겨 입은 다음, 어린애를 다루듯이 나디아를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몸에 커다란 타월을 둘둘 감았다. 그녀는 군말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에드윈이 무언가 또 의뭉스러운 말을 꺼낼까 겁이 나기도 했다. 그가 뭘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그녀만의 착각인지.

제 발로 걷게 할 생각이 없기라도 한 건지 당연한 수순처럼 그녀를 안아 드는 에드윈의 품에 안긴 채 고민을 이어가느라 욕실을 나온 것도 깨닫지 못했다.

목욕 덕인지 뼛속까지 파고들던 냉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옷도 입지 못한 채 에드윈의 품에 안겨서 하녀들이 내온 뜨끈한 스튜를 한 그릇 비운 다음에야 홀로 설 수 있었다.

나디아는 태연한 척하려 노력했지만 하녀들이 에드윈의 품에 계속해서 안겨 있는 그녀를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그네들은 에드윈의 행동에 놀란 기색이었다. 한 번 큰일이 있었던 탓인지 에드윈도 답지 않게 유난이었다.

이래서 늘 헷갈렸다. 입으로는 송곳 같은 말을 내뱉기 일쑤면서 행동은 남부럽지 않게 자상한 남편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까. 어느 쪽이 그의 본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나디아를 대하는 행동이 훨씬 더 부드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 필요하다고 부탁하기 전에 챙겨 주는 세심한 면도 있었고, 오늘처럼 툴툴거릴지언정 품에 싸고돌면서 수발을 드는 일도 아주 간혹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았다.

이런 행동을 접하다 보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싹트곤 했다.

거센 비 한 번이면 쓸려 내려갈 감정의 작은 싹은 에드윈이 입을 열 때마다 가차 없이 쓸려 내려갔다.

그의 잔인한 말에 덴 가슴에는 옅은 흉터가 가득했다. 그것들을 다시 매만져 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그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는 게 우습고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그가 손을 내밀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품에 꼭 안아 주면 느껴지는 그 온기만큼은 너무도 따뜻해서, 매달리고 싶어졌다. 내쳐질 것을 알기에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사실 누구든 괜찮았던 게 아닐까 싶어졌다. 아실이 아니었어도, 그냥 누구든 안아 주기만 하면 됐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디아는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고 많이 두껍지 않은 망토를 걸쳤다. 그녀는 나들이 계획을 완전히 접은 에드윈이 일하러 돌아가야겠다며 일어설 쯤이 되어서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정말로 말 안 해 줄 거예요?”

“다녀와서 말해 줄 테니… 자지 말고 기다려.”

그의 손끝이 귓불을 매만지다 나디아가 몸을 움츠리자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에드윈의 방에서 멀뚱히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한번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지만 하녀들이 만류했다. 영주님께서 자지 말고 기다리라 하셨지 않느냐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멋대로 에드윈의 침대에 누웠다.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고, 에드윈은 자지 말고 기다리라 했으니 밤늦게 돌아올 것이 뻔했다. 산책을 나설 기운은 없었고 그녀가 평소 시간을 보내려 하던 취미들은 왜인지 딱히 흥미가 돌지 않으니 택한 것은 결국 낮잠이었다.

낯선 침대였지만 머리를 대자 잠이 솔솔 몰려 왔다.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가물거리는 눈을 저항 없이 감았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몇 분 정도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으나 창밖은 어느샌가 어두워져 있었고 방 안은 불을 밝힌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에드윈이 우두커니 선 채 창밖을 내다보며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희뿌연 연기가 한 뼘만큼 열린 창밖으로 흘러 나갔다.

나디아가 잠에서 깨어나며 움직이는 작은 소리를 들었는지 돌아보던 그와 얇은 휘장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에드윈이 마지막으로 연기를 뱉어 내며 시가를 재떨이에 문질러 불씨를 껐다. 그녀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몇 시예요?”

“9시. 식사는?”

“생각 없어요.”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은 휘장을 걷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먹어.”

에드윈이 손짓하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하녀들이 트레이를 끌며 들어왔다. 그들은 램프를 더 켜고 테이블 위로 옮겨 온 은촛대 위에도 불을 붙였다. 테이블 위로 음식 접시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나디아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멋대로 할 거면서 묻기는 왜 묻는지.

그녀는 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에드윈의 옆자리에 앉았다. 낮잠을 오래 잔 탓인지 머리가 멍하고 입도 텁텁했지만 탄산수로 입을 축이고 수프를 한술 뜨자 약간이나마 입맛이 돌았다.

나디아는 조금 멍하게 음식을 씹어 삼켰다. 화이트와인에 졸인 생선찜, 조개가 듬뿍 들어간 토마토스튜와 레몬즙을 뿌린 석화, 버터와 다진 마늘을 발라 구운 새우, 절인 올리브와 치즈를 얹은 크래커 따위를 조금씩 맛본 그녀는 한동안 먹을 수 없었던 사과주를 홀짝이며 식사를 끝마쳤다.

에드윈 역시 가볍게 식사를 하고는 접시를 물렸다. 침묵 속에서 식사가 끝나자 때가 왔다. 참으로 어렵게도 얻은 기회였다. 음흉하게 구는 그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 내기란 언제나 진이 쏙 빠지는 일이었다.

그가 대답해 주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꼭 지킨다든가 하는 식의 기사다운 신의를 보이는 일이 없었던 남자였기에 그마저도 확신 할 수는 없었다. 늘 농락당하면서도 믿어 보는 것 말고는 별수가 없었다.

“질문이 뭐였지?”

말문이 막히게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나디아는 입을 벌렸다가 그게 품위 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에 그에게 말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을 차분히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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