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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49화 (49/115)

49.

그가 젖은 옷가지를 짜증스럽게 벗어 던져 철퍼덕 소리가 나거나 혀를 찰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흠칫 튀어 올랐다. 그녀는 에드윈이 화를 내는 이유는 그가 조심하라고 말했는데도 조심성 없게 행동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디아는 저를 위한 방패라도 된다는 양 에드윈의 서코트를 꼭 쥔 채 꼼지락거렸다. 맨몸에 닿는 두꺼운 천의 감촉은 생각보다 거칠거칠했다. 햇빛 냄새와 쇠 냄새 그리고 희미한 땀 냄새와 종종 에드윈에게서 나곤 하던 향기가 스며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드윈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서서 신경질을 쏟아 내는데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꽤 묘한 감각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묘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녀들이 공손한 태도로 목욕물이 준비되었다고 말해 왔다.

“목욕 시중은 됐어.”

주인의 안 좋은 기분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하녀들이 책잡힐세라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에드윈은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디아는 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에드윈이 그녀에게 미처 다 쏟아 내지 못한 화를 퍼부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서코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나디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는 당황해 허우적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걸을 수 있는데….”

“가만히 있기나 해.”

나디아는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듣자 생각하며 얌전하게 안긴 채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욕실은 멀지 않아서 고작 몇 걸음 만에 도착했다. 에드윈은 나디아를 욕조 턱에 걸터앉게 내려 준 뒤에 김이 폴폴 올라오는 욕조 안에 손을 담그고 온도를 쟀다.

이내 그의 젖은 손이 다가와 나디아를 감싼 천을 붙잡았다. 그녀는 멈칫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제 손으로 여며 주었던 천을 다시 풀어헤쳤다.

그동안 그녀는 무력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남색 서코트가 욕실 바닥에 남아 있던 물기에 젖어 들며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다.

몸을 감싸던 두꺼운 천이 떨어져 나가자 다시 추워졌다. 나디아는 양팔로 몸을 끌어안으며 은근슬쩍 드러난 젖가슴을 가렸다.

차게 식은 피부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에드윈의 맨가슴팍이 시야를 가리자 흠칫 놀랐다.

뜨끈한 체온을 품고 있는 에드윈의 손이 나디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몸이 훌쩍 들려 올라갔고 정수리가 그의 턱 아래에 닿았다.

그녀는 에드윈의 쇄골께에 긴장된 숨을 뱉어 내며 쑥스러움을 견뎠다. 물에 빠진 것은 똑같은데 왜 그의 피부는 그녀의 것처럼 차게 식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나디아는 몸을 한껏 움츠리면서도 이번만큼은 내려 달라거나 제 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웅얼거리지 않았다. 한 번 말하면 좀 들으라고 윽박지르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왕왕 울려 댔기 때문이다.

에드윈은 그녀를 안아든 채 욕조로 들어갔다. 욕조 가장자리까지 찰랑찰랑 차올라 있던 온수가 울컥 넘쳐흘렀다.

이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자 온몸에 온기가 스며들며 뼈마디까지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디아의 입술을 타고 만족스러운 한숨 소리가 새어 나갔다.

에드윈이 몇 번인가 따뜻한 물을 그녀의 어깨 위로 끼얹었다. 차갑게 식어 있던 살갗이 금세 따끈따끈해지며 혈색이 돌아왔다. 물의 온도가 스며든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남자의 손이 나디아의 뺨을 감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기울여 손바닥에 뺨을 문질렀다.

“하….”

욕조에 몸을 기대고 늘어져 있던 에드윈이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나디아가 화들짝 놀라며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커다란 손이 허리를 꽉 움켜쥐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에드윈의 찌를 듯한 시선이 닿았다. 본능적으로 그가 잔소리를 시작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디아는 어떻게든 그 시선과 잔소리를 피해 보려 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에드윈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어떻게 된 게, 잠시만 시선을 떼면 무슨 일이 벌어지지? 그래, 호수 물은 시원하던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고개를 숙인 그녀의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나디아는 벙어리 마냥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일이 터진 원인에 그녀의 의지가 개입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근래 일어난, 적어도 나디아가 알고 있는 이렇다 할 사건들 중에 그녀가 엮이지 않은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드윈은 딱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던 건 아닌 모양인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을 나디아를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는 들으라는 듯이 다시 한번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누를 집어 들었다. 종착지는 나디아의 젖은 머리카락 위였다. 능숙하지 못한 손길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 사이를 문질렀다.

이번에는 그녀도 가만히 있기만 할 수 없었다. 피부 위로 깃털을 살랑이는 듯한 간지러운 감각이 발끝을 물들이더니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건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당신에게 맡겼다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겁나는군.”

신랄한 말을 듣자 입이 쑥 들어갔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손길이 두피를 문지르며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자니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나디아는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손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당황하다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계속되자 결심을 굳혔다.

“저기.”

“눈 감아, 거품 들어가.”

그녀는 냉큼 눈을 감았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것은 하녀를 시키면 될 일인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직접 하는지. 그와 그녀의 관계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면 로맨틱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나디아는 그의 무릎 위가 가시방석 같았다.

이런 간질간질한 행동 말고, 차라리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거친 성교를 시도했더라면 오히려 안심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디아는 어색하게 손끝만 매만졌다. 한참이나 지나서 그가 머리 위로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며 거품을 씻어 내고 눈을 떠도 좋다고 할 때가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저기, 요즘 왜 그렇게 바쁜 거예요?”

그동안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치밀곤 했던 궁금증을 끄집어내 입에 올릴 좋은 기회라 여겼다. 하인들에게는 성안의 중요한 일을 모른다는 것을 티내고 싶지 않아 물을 수 없었고,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마법사는 모른다고 잡아떼기만 했으니 이 모든 일의 꼭대기에 있을 이에게 묻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있겠지.

“음?”

에드윈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 얼굴이 마치, 네가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느냐고 되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무시한다 여기자 외려 발끈한 나디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따지고 들었다.

“나는 이 성의 안주인인데,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불공평하잖아요!”

한참을 기죽어 있더니 발그레 달아오른 뺨을 하고는 갑작스럽게 당돌하게 구는 그녀의 재롱을 지켜보는 것처럼 바라보던 에드윈이 픽 웃었다.

“젖비린내도 다 안 가신 주제에….”

그가 손끝으로 나디아의 코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어떻게 보아도 어린애 취급 하는 말이었지만 그리 말하는 에드윈의 얼굴은 제법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여서, 화를 내자니 어딘가 머쓱해졌다.

에드윈과의 나이 차이는 열두 살이나 났고 그가 그리 느끼는 것도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젖비린내 난다는 꼬맹이와 침대에서 이런 짓 저런 짓을 다 해 댄 것은 새카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오르자 긴장이 풀린 나디아가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그는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길게 내쉬더니 젖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등을 뒤로 기댔다. 그 모습이 제법 나른하고 편해 보였던 나디아는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는 붙잡히지 않았다.

나디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아 뿌연 물속에서 흐늘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동안 에드윈은 제 몸을 씻었다. 그에게 물어보기까지도 제법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데 허사였다고 생각하니 조금 허탈했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미끈한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는 거품에 시선을 주다가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그녀에게 에드윈이 위로 같은 대답을 던졌다.

“그래서 뭐가 알고 싶은데?”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드윈이 네가 들은 게 맞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는 고이 접어 한구석에 밀어 두었던 말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가 당장이라도 했던 말을 물릴까 봐 초조해졌다. 단순한 변덕이거나 그녀가 전전긍긍하는 꼴이 재미있다며 그리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나디아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쟁이 일어나나요?”

그녀는 에드윈의 얼굴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나, 저를 안심시키겠다는 이유 따위로 거짓말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표정을 감추는 게 능숙한 남자라서 나디아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알키드와는 평화 협정을 맺었다더니 용병을 고용하고, 귀족들이나 그들의 전령이 쉴 새 없이 성문을 두드렸고, 전서구가 창문틀이 닳도록 그의 집무실을 드나들었다. 최근 나디아는 에드윈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고된 훈련을 하는 기사들과 그들 사이에 묘하게 감도는 긴장감을 느끼면 누구라도 전쟁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굴리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한 것처럼 웃었다.

“제법 머리 굴렸나 본데.”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요.”

“멍청하다고 하지는 않았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줄 알았지.”

그가 느긋한 손길로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알몸으로 물속에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거품이 녹아든 물이 뿌옇게 변해 있었기에 맨몸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쑥스러워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에드윈이 말 돌리기의 귀재라 해도 이번만큼은 그의 말솜씨에 휘말려서는 안 됐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줘요.”

“비슷해.”

나디아는 숨을 들이켰다. 막연하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입을 통해 확인되었다는 것과 또 그가 제법 순순하게 대답해 주었다는 것 모두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을 지켜본 에드윈이 눈을 접어 웃었다.

“겁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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