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이튿날 나디아는 드물게도 늦잠을 잤다. 그녀가 치장을 모두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때에는 하녀가 에드윈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하러 온 후로 30분은 족히 지난 시간이었다. 그녀는 다른 것보다도 그가 어떤 말로 신랄하게 타박할지를 걱정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요즘 바쁜 것 뻔히 알면서 지각하다니 자기가 우습냐는 등의 잔소리를 퍼부을 줄 알았던 에드윈은 예상 외로 그리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디아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나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안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는 이런 건수를 놓칠 만한 사내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에드윈은 타인의 잘못을 부풀려 면박을 주는 것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고약한 성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침묵이 의아하기만 했다.
커다란 흑마에 올라탄 에드윈은 느릿하게 말을 몰았다. 나디아는 뒤늦게 그 뒤를 따라 성 뒷문으로 나가면서도 마음을 온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바로 탓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하녀들이 주위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평소 그녀의 체면 같은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괴롭혀 대기 일쑤였지만 그것 외의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에드윈은 그녀를 배려해 주는 것처럼 느리게 말을 몰았다. 덕분에 나디아의 어설픈 승마 실력으로도 그와 나란히 말을 몰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이 무럭무럭 싹트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일까? 그의 다정함이나 배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이미 너무 많이 데인 후였다.
“약은?”
“네? 아, 먹었어요.”
약은 최근에 바뀌었다. 색은 똑같이 투명했지만, 이제 그걸 마셔도 잠이 쏟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타샤가 이제 수면 성분은 배제했다고 귀띔해 준 적이 있었다.
나디아는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판판한 돌이 깔려 있던 길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 탓이었다. 그녀의 걱정과 달리 희미하게 사람이 다닌 자국이 난 길은 키가 작은 잡초로 뒤덮여 있긴 했지만 평탄했다.
에드윈은 틈틈이 나디아가 뒤처지지는 않는지,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는지를 살피며 이끌어 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언제나처럼 한 박자 늦은 의문이었다. 에드윈이 뒤를 흘깃 바라보더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수.”
그러고 보니 성 뒤편 숲 속에 호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로 단순히 나들이를 갈 셈이었던 모양이다. 나디아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의 얌전한 걸음걸이를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풀 냄새가 짙어졌다. 날은 맑았고 상쾌한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부딪치며 사락거리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디아는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군데군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보였다. 계절이 변해 가는 시기인 것이 와닿았다.
매끈한 자작나무가 줄지어 자란 길을 지나치자 시야가 트이며 신선한 물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커다란 호수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물이 가득한 것은 바다나 강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와는 다른 운치가 있었다. 몸체가 하얗고 꽁지깃이 긴 새 몇 마리가 풀밭 위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다 말을 보고 놀라며 날아가 버렸다.
에드윈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고삐를 한쪽에 자리한 굵은 나무 기둥에 매어 놓고는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땅에 내려 주었다. 나디아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드윈이 욜의 고삐를 받아 가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나디아는 그새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호수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조심해. 보기보다 깊으니까.”
그가 말의 등에서 안장을 내리며 말했다. 나디아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호수 주변을 걸었다. 아직 파릇파릇한 짧은 풀과 자그마한 들꽃이 호숫가를 빙 둘러 자라 있었다. 그녀는 걸음걸음마다 발아래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폭신한 땅의 감촉을 즐기며 느릿하게 걸었다.
호수의 물은 새파랗고 맑아서 바닥까지 들여다보였다. 에드윈이 깊으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육안으로는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았다. 뭐, 애당초 물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나디아는 호수 근처에 쭈그려 앉은 채로 손끝을 물속에 살짝 담가 휘저었다. 물은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무더운 여름이었다면 기꺼웠을 온도였겠지만 그리 덥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몸이 약해진 탓인지 뼈가 시렸다. 나디아는 손을 빼내며 물기를 털었다.
에드윈이 말에 실었던 자그마한 바구니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하녀들이 간식거리를 담아 줬던 것을 떠올리자 잊고 있었던 허기가 찾아왔다. 일어나서 먹은 것이라고는 포도 몇 알에 약 한 잔이 전부였으니 그럴 만했다.
나디아는 자그맣게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그녀가 딛고 있던 부드럽기 짝이 없는 호숫가의 흙이 무너졌다. 나디아가 중심을 잃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목 안으로 먹히는 듯한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는 차디찬 호수에 처박혔다. 커다랗게 물보라가 일었다.
에드윈의 말대로 호수는 똑바로 선다 해도 발이 닿지 않을 만큼 깊었고 그녀는 수영을 못 했다. 퀘른에서 나고 자란 귀족 여성 중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랬다. 물에 빠질 일이 없으니 수영을 배울 일도 없었다.
나디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이런 움직임은 귀부인답지 않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차가운 물에 숨이 찼다. 숨을 쉬려 벌린 입과 코로 물이 들이쳤다. 머리가 띵하고 코가 매웠지만 의지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물을 먹은 두꺼운 드레스가 그녀의 몸을 물속으로 끌어 내리는 듯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물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숨은 턱턱 막혔다.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물보라가 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로 에드윈이 달려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몸부림치는 그녀의 허리를 억세게 감아 당기는 팔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몸이 너른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끌어안기며 단단한 가슴팍에 뺨이 부딪혔다.
그제야 벌린 입 안으로 물 대신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자 에드윈이 몇 번이고 ‘가만히 있어, 가만히.’ 하고 속삭였다. 몸이 물살을 가르며 질질 끌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뭍으로 올라온 나디아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쉴 새 없이 기침과 구역질을 쏟아 냈다. 가득 들이마셨던 물을 토해 내고 목이 아플 만큼 기침을 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물이 들어간 코가 쎄하게 아프고 귀가 멍멍했으며 머리가 아팠다. 이윽고 온몸이 덜덜 떨릴 만한 추위가 밀려왔다.
에드윈이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더니 왈칵 성을 냈다.
“정신 나갔어? 내 말이 우스워? 왜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를 못하지? 학습 능력이 없나? 내가 물이 깊으니 조심하라고 했지? 언제쯤이 되어야 내 말을 명심할 생각이야?”
나디아는 대답도 못 한 채 추위에 덜덜 떨었다. 흠뻑 젖은 옷은 그녀의 체온을 앗아가기만 했다. 에드윈은 입술이며 손끝이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질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의 손이 목 뒤로 넘어가는가 싶더니 거침없이 드레스의 끈을 풀어냈다. 푹 젖은 천이 머금은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리자 새하얀 맨몸이 드러났다. 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밖이었다. 나디아는 떨면서도 소스라치게 놀라 드러난 가슴을 끌어안았다.
“무, 무슨….”
“이렇게 젖은 옷을 입고 있어 봤자 체온만 빼앗길 뿐이야. 손 치워. 아무도 없으니까.”
덜덜 떨며 몸을 가리는 손 따위는 조금의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거침없는 에드윈의 손이 그녀의 옷을 모조리 벗겨 냈다. 나디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무시한 에드윈은 급하게 벗어 던졌는지 풀밭에 내팽개쳐져 있던 짙은 남색 서코트를 가져왔다.
그녀의 머리 위로 햇볕 냄새와 그의 체취가 스며든 두툼한 천이 내려앉았다. 몸이 차게 식어 있어서인지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드윈은 서코트로 나디아의 몸을 눈만 남기고 터럭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둘둘 감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 바짝 마른 천을 몸에 감자 그제야 아주 천천히 떨림이 잦아들었다.
뒤늦게 에드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그의 찡그러진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짜증과 염려가 새어 나왔다.
에드윈은 커다란 흑마 위에 급하게 다시 안장을 얹고는 나디아를 그 위에 앉히고 뒤이어 올라탔다. 뒤쪽으로 한가롭게 풀을 뜯던 욜이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으나 이내 에드윈이 그녀의 몸을 품 안에 바짝 끌어당기는 바람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거야. 완전히 시간 낭비였군.”
“도, 도… 돌아가나요?”
한기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말을 하는 나디아의 이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에드윈이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이 꼴을 해서 풀밭에 앉아 다과회라도 즐기고 싶나? 네 입술이 새파래.”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린 그가 조금 거칠다 싶은 손길로 나디아의 뒤통수를 붙잡아 제 목덜미로 끌어당겼다. 젖어 있는 것은 그도 똑같았는데 이마에 닿는 피부는 뜨끈뜨끈했다. 그가 굳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절로 달라붙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온기였다.
그의 품에 고개를 박은 채 나디아는 투덜거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래도 저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기까지 한 사람이니 감사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디아는 속으로 조금만 더 그의 흉을 본 다음에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에드윈은 훌륭한 기수였다. 나디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안은 채 한 손으로 말을 모는 것에 조금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성안에 남아 있던 이들은 나들이라며 나갔던 후작 부부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해하다 이내 흠뻑 젖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에고치 같은 꼴을 하고 영주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자 나디아는 어찌나 민망한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에드윈은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맡긴 후 지나가던 기사에게 호숫가에 매인 말을 데려오라 명령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하녀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쳐나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놔.”
에드윈의 말에 하녀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에드윈의 방이었다. 나디아는 서코트가 흘러내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에드윈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얌전히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품 안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에드윈은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었다.
반들반들한 바닥으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척척하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며 혀를 차던 그는 이내 성질을 못 이기고 힘으로 잡아 뜯어 버렸다. 튕겨 나간 단추들이 바닥을 구르고 젖은 옷이 철퍼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나디아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