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47화 (47/115)

47.

“뭐가?”

“왜 모르는 척해요? 내가 뭘 묻는지 알잖아요.”

의뭉스럽게 구는 그의 행동에 답답해진 나디아가 소매를 흔들었다. 에드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쓰러졌었어. 아이는 유산됐고 당신 몸도 엉망이 됐지만, 일단은 살아 있군. 당신 목숨을 붙여 놓으려 마법사 다섯 명이 달라붙어서 사흘 밤을 새웠지.”

그가 여봐란듯이 양팔을 벌렸다.

“보름이 지났어. 이제 궁금증은 다 풀렸나?”

나디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름이나 지났다니. 마법사의 얼굴에 얼룩덜룩하게 새겨져 있던 멍이 희미해진 것도, 하녀들의 얼굴이 수척해진 것도 그리고 온몸이 기름칠을 하지 않은 갑옷처럼 삐걱거리는 이유도 그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뒤이어 인식한 유산이라는 말에 상실감이나 충격 따위보다 해방감에 가까운 안도가 먼저 찾아왔다. 그리고 뱃가죽 너머로 전해지던 들릴 듯 말 듯하던 작은 고동을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죄책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나디아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에드윈이 혀를 찼다.

“신경 쓸 거 없어.”

에드윈은 조금도 슬프거나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라고 알고 있을 텐데. 아이 하나쯤 잃어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서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디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느릿하게 일어섰다. 떠나려는가 싶어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작은 잔에 타샤가 끓이던 투명한 약을 담아 왔다. 에드윈이 다시 침대 맡에 앉았다.

“마시고 다시 자도록 해. 자는 것도 질리겠지만, 회복에 그만한 게 없지.”

그의 단단한 팔이 목뒤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안아 살짝 일으켰다. 입가에 차갑고 매끄러운 잔이 닿아 왔다. 나디아는 그가 조심스럽게 기울여 주는 대로 약을 받아 마셨다.

그날 정오 무렵, 잠에서 깬 나디아가 식사로 묽은 수프를 한 그릇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샤가 들어왔다.

그녀의 몸 상태에 관한 질문을 퍼붓던 타샤가 또 투명한 약을 건넸다. 나디아는 그것을 마시기 전에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탓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마시기만 하면 잠이 몰려오니 용건은 약을 마시기 전에 해결해야 했다.

그녀가 손을 내젓자 밀라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디아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타샤를 붙잡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약을… 먹지 않았는데, 왜….”

내내 궁금해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제가 그 약을 홀랑 마셔 버렸던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기억을 되돌려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었다. 마법사가 한참이나 그녀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쓰러지셨을 때, 제가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었지요.”

나디아는 희미하게 기억에 남은 타샤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말만으로도 대충 감이 왔다. 쓰러지기 전 며칠 동안 내내 나디아의 마음속은 폭풍을 맞이한 것처럼 몰아쳤다, 저리 몰아치기 일쑤라 안정과는 거리가 먼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까. 마법사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건, 그 약을 먹은 것보다는 나은 결과입니다.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적어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건 아니니까요.”

마법사는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지친 듯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약은 하녀에게 줄 테니 꼬박꼬박 드시고 푹 쉬도록 하세요.”

나디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귓가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이내 방 안은 조용해졌다.

나디아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퍼진 후 숨 막힐 만큼 답답했던 분위기는 환기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던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하인들의 염려 섞인 시선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나디아의 마음만 불편해졌다.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이 안도였다는 사실이,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찔러 댔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잘된 일이었다. 다른 사내의 아이가 태어나 엘란츠 성을 달게 되는 것도, 사생아인 것을 들킨 아이가 자라면서 받게 될 차가운 시선도, 모든 게 비극이 아닐 수 없을 테니까.

태어난 아이를 안고서 느낄 불안을 생각하면 지금이 훨씬 낫다.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큰 짐을 덜어 낸 듯 제법 홀가분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해방감과 달리, 성안의 모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이를 잃었을 어린 부인의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것처럼.

나디아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껄끄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안에 틀어박혀 슬픔에 잠긴 체했다.

제법 괜찮은 시간들이었다. 조용했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에드윈도 못된 말로 그녀의 마음을 할퀴지 않았다. 신경을 써 주고 있다기보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뿐인 듯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우기에 찾아왔던 귀족들이나 그들의 수족으로 보이는 기사들이 전갈을 들고 번갈아 가며 다시 방문했다. 에드윈의 집무실을 드나드는 전서구의 수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회의실의 불이 꺼지지 않았고 가끔은 격앙된 고함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으며 성안을 거닐다 에드윈과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디아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 것인지, 자신이 알아도 소용없는 일들일 것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넌지시 무슨 일이 있느냐며 타샤를 떠봤지만 마법사는 냉랭한 얼굴로 모른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안정을 위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짐짓, 안주인의 권위를 내세워 그녀를 닥달했다.

“나는 이 성의 안주인이고, 이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느 때처럼 진료를 보고 돌아가려는 마법사의 앞을 가로막은 나디아가 비켜 주지 않자 그녀가 다시 한번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정말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각하께서는 제게 어떤 정보도 일체….”

“그날? 언제를 말하는 거죠?”

나디아의 질문에 마법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거기서 더 하얗게 질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타샤는 뻣뻣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나디아는 그녀를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마법사의 얼굴이 지나치게 곤란해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나저나 ‘그날’이라니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걸까? 누가 보아도 실수로 뱉은 말임이 분명한 그 반응 때문에 더욱 궁금증이 잦아들지를 않았다.

늦은 오후, 온실의 카우치에 길게 누운 채, 혼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수 없는 의문을 파헤치던 나디아의 곁에 밀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마님.”

“…뭔가요?”

나디아는 반쯤 잠에 잠긴 채로 대답했다. 몸이 약해졌다는 말이 사실인지 무얼 하든 쉽게 지쳤고 쉽게 피곤해졌다.

“랑카드로 내려가시는 건 어떠셔요?”

“랑카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랑카드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밀라가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았다. 주름진 얼굴 위엔 먹구름처럼 어두침침한 걱정이 한가득했다.

“성이 소란스럽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낯선 자들이 드나들고요. 랑카드 별장을 마음에 들어 하셨지 않습니까. 조용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서 요양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혹하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랑카드 별장 앞에 펼쳐지던 백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나디아의 표정이 갑작스레 어두워지자 밀라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표정을 감추려 팔 안쪽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에드윈이 바쁜 것 같아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여쭤는 볼까요?”

나디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혼자 있으면 불안한 생각이 줄줄이 떠올라 어떻게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것도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는 조용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기꺼웠다.

랑카드로 가게 되면 분명 조용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드나드는 귀족들과 전서구들, 그리고 굳은 표정을 한 채 지나다니는 기사들을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도 없이, 느릿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자고 한동안 등한시 했던 취미를 느긋하게 즐길 수도 있겠지.

긍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던 상상이 단번에 깨어진 건 바로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안 돼.”

에드윈이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 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밀라가 요양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허락해 줄 것이라고 여겼던 나디아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은 매끈한 이마 위로 주름이 졌다.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 피로에 절은 그의 얼굴 위로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밀라도 에드윈이 단번에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낯으로 에드윈과 나디아를 번갈아 보다가 별수 없다는 듯 조용히 물러났다.

식사를 이어가는 나디아를 바라보던 에드윈이 손을 뻗었다. 그가 흘러내린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을 걷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살갗이 스치자 찌릿하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이 일었다.

“답답한가?”

“뭐가요?”

“성안에서만 지내는 것이.”

말문이 막혔다. 한 번도 그런 식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에 그럭저럭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서 기껏해야 방과 정원을 오가는 도돌이표 같은 하루하루에 지루함은커녕 안도를 느낄 지경이었다. 그에게서 질문을 듣자 그제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감상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나디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어야 할지 끄덕여야 할지 짧은 고민을 하다가 이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잠깐 시간을 내지. 멀리 가는 건 안 되지만, 근처로 나들이 정도는 괜찮으니까.”

그가 다정한 체하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놀라울 만큼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예전처럼 평소와 다른 일정이 생긴다고 하면 기뻐서 들뜨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하였다. 기대가 되지도 않았고,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마치 한걸음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어째서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마법사들이 죽은 태아를 긁어내며 그녀의 감정까지도 긁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끔찍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에드윈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그는 그녀에게 내일 몇 시까지 준비하라는 말을 남긴 채 여느 때처럼 서둘러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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