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마법사는 한쪽 벽의 찬장을 한참이나 뒤지더니 먼지가 수북이 앉은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약병을 꺼냈다.
제 로브 자락에 먼지를 쓱쓱 닦아 낸 그녀가 그것을 내밀었다.
“…잘 생각하세요. 지금 시기면 늦은 편이라, 몸이 크게 상할 수 있습니다.”
“고… 마워요.”
나디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받아 들었다. 손이 지나치게 떨려 병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서둘러 약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대로 방을 떠나려는 나디아를 마법사가 한 번 더 붙잡았다.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타샤는 몇 번이고, 제가 건네주었던 약병을 다시 빼앗고 싶다는 듯이 시선을 주었다가 어렵게 손을 떼어 냈다. 그녀의 동정 어린 시선이 머무는 것을 느끼며 나디아는 병을 꽉 움켜쥐었다.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며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꼭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와 병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 같은 초조함을 느꼈다.
무엇이 마법사의 마음을 바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약은 만들지 않는다더니, 왜 그녀의 서랍 깊숙한 곳에 아이를 지우는 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나디아는 바로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액체가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몇 시간 전의 간절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망설임이 비집고 올라왔다. 이 약을 먹고 아이를 없애는 과정도 아픈 것은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든가 몸이 크게 상할 수도 있다던 마법사의 경고까지 떠오르자 덜컥 겁이 났다.
타샤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볼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내려가면 약을 빼앗기지 않을까? 그녀가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망설임이 깃들어 있던 타샤의 눈이 떠올랐다.
그녀는 들어 올린 병을 바라보기만 하며 한참이나 망설였다. 단순히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아이가 사라지고 난 후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탓인지 손이 잘게 떨리고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다른 선택지가 떠올랐다. 조금 전 아실이 말했던, 함께 가자던.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앞에 있는 것이 절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이 멍청아. 뭘 망설여?’
마침내 나디아가 결심을 굳히고 병 주둥이를 입술에 댄 순간이었다. 가슴이 둥, 하고 울렸다. 아니, 다른 곳인 것 같았다. 나디아는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멈칫했다.
그녀가 습관처럼 배 위로 손을 얹은 순간, 조금 더 선명한 진동이 손바닥을 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디아의 손에서 떨어진 병이 바닥을 구르다 문 앞에 멈췄다.
여태껏 몸이 불편해졌다는 생각만 하느라 이 안쪽 어딘가에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격렬하게 싸웠다.
아이는 잘못이 없잖아. 그러면 나는? 나는 무슨 잘못인데?
나디아의 눈이 떨어트렸던 병을 찾아 헤맸다. 순간의 감정 때문에 앞으로 파국일 것이 분명한 길을 알면서도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가 병을 붙잡았다. 다행히 입구가 좁은 형태의 병이라 내용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나디아가 병에 든 약을 마시려 했을 때, 뜨끔하는 통증이 일더니 다리 사이가 축축해졌다. 그녀는 현기증이 도는 머리를 짚으며 병의 뚜껑을 닫았다. 손이 마구 떨렸다. 괜히 또 병을 떨어트려 내용물을 쏟는 것보다는 조금 진정한 후에 마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디아는 몽롱해지는 머리를 흔들며 병을 한쪽 구석에 둔 채 느릿하게 일어섰다.
오늘따라 몸이 참 이상했다. 달거리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 임신을 했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치마를 걷었다.
무엇인지 모를 액체로 흠뻑 젖은 다리 사이가 눈에 들어왔다. 선 채로 실례라도 한 것은 아닌지 의아해하던 중에 한 번 더 쏟아지듯이 뜨끈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격통이 일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한 통증이었다. 순식간에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나디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벽을 짚었다. 거칠어진 숨을 토해 내듯이 뱉기 시작한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인지 밀라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물기가 흥건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고인 바닥 위로 핏방울이 섞여 들었다.
“아, 아파, 아파….”
나디아는 배를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밀라가 다른 하녀들에게 무어라 소리치는가 싶더니 빠르게 달려와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그 잠깐 사이에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나디아는 쉼 없이 아프다고 중얼거렸다. 아프고 또 무서웠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지만 어떤 말도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내내 배가 쥐어짜듯이, 혹은 뜨겁게 달군 부지깽이로 들쑤시는 듯이 아팠다. 온몸에 열이 절절 끓었다가 순식간에 차게 식은 듯이 오한이 들었다.
때때로 누군가 그녀의 정수리에 대고 정을 쪼는 것처럼 두통이 일었고 갑작스럽게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찔거리면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쉬이 가시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짙은 어둠 속으로 정신이 잠겨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혼돈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품 같기도 한 새카만 어둠 속에서 자아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부유하던 나디아의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오듯 슬며시 주위의 소리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눈꺼풀에 풀칠을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나디아는 억지로 눈을 뜨지 않고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온몸이 진흙 속에 잠겨 드는 것처럼 늘어졌다.
미동도 하지 못했던 탓에 누구도 그녀가 잠시나마 깨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이대로 누워 있다 보면 다시 잠들 수 있을 것처럼 나른했다. 그녀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디아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바짝 마른 입 안으로 미지근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혀를 적시는 물이 어찌나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그녀는 기갈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컵을 기울여 물을 먹여 주는 이의 손목을 붙잡고 급하게 매달렸다. 누군가 가슴 위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타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여럿인 걸 보니 곁에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 위로 미지근한 물수건이 닿아 왔다.
나디아의 얼굴을 닦아 주는 손은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수건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물수건을 든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작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온몸이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고 아래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나디아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밀라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눌렀다.
“일어나지 마셔요.”
나디아는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는 듯한 미약한 힘에도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대로 누운 채 멍한 기억을 되짚어 보던 그녀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는 희게 질렸다.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배로 향했다. 언제 무언가 품고 있었냐는 듯, 이불 아래에서 납작해진 배가 보였다.
“무슨, 어, 어떻게…?”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지만 쇳소리가 심하게 섞여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 안의 이들은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무슨 말이냐며 되묻지 않았다.
옆에서 베개의 높이를 맞춰 주던 밀라가 침통한 표정으로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 대신 타샤가 광대 근처에 희미한 멍 자국이 남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주 위험했습니다. 아이는 물론이고 귀부인의 목숨도요.”
마법사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투박한 냄비에서 투명한 액체를 퍼 올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 아이는…?”
“일단 드세요.”
밀라와 수잔이 나디아의 몸을 아주 약간 일으키고 등 뒤로 베개를 겹쳐 두었다. 나디아는 마법사가 입가에 대어 주는 그릇 안의 내용물을 군소리 없이 마셨다.
분명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났는데 약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매끄럽게 목 뒤로 넘어가는 약을 모두 마시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이 잠이 쏟아졌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그것들을 입에 올릴 시간도 없이, 나디아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난 것은 어슴푸레하게 빛이 밝아 오는 새벽이었다. 램프의 불은 꺼져 있었고 소파에 앉은 채 지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수잔과… 침대 맡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에드윈이 있었다.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기분이 어때?”
“잘… 모르겠어요.”
한숨처럼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볼품없이 쉬어 있었고 몸은 여전히 흠씬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서늘한 손끝이 부드럽게 뺨을 쓸다가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래, 아직 시간이 일러. 더 자는 게 좋을 거야.”
나디아는 일어서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었지만 홀로 짐작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