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45화 (45/115)

45.

나디아의 불안한 심리는 며칠 내내 이어졌다. 하녀들 앞에서 괜찮은 척을 할 여유조차 없었던 탓에 멀쩡히 앉아 있나 싶으면 이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무지 평소처럼 행동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엉엉 울 때마다 무섭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그네들은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라 여기는 듯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제는 배가 무거워 똑바로 누워 있는 것도 어려웠고, 무언가를 먹으면 열에 여덟은 체했다. 다리가 붓고 수시로 허리가 아파 오래 서 있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평범하게 몸의 변화를 겪기만 해도 충분히 두려웠을 텐데 거기에 외부의 불안 요소가 더해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손을 놓은 채 가만히 있다간 결국 사생아를 낳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나디아는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도 않은 얼굴로 발코니를 서성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무서워, 무서워…. 간신히 진정했지만 감히 뛰어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바꿔 복도로 나갔다. 하지만 양탄자가 깔려 있다고는 하지만 길게 이어진 계단도 아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윽고 아이를 없애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에 이른 자신에 대한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 생각을 떨쳐 내듯 몸을 떤 그녀는 훌쩍이며 복도를 걸었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마침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누군가 마주쳤다면 눈물로 엉망이 되었을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으니까.

극단적인 생각들을 어떻게든 잠재우고자 정처 없이 넓은 성안을 걷던 나디아는 여럿이 몰려 떠드는 소리를 희미하게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물기로 흐릿해진 시야로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서너 명의 기사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시넝쿨이 얽힌 무늬가 선명한 붉은 서코트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머리가 그녀의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때 거짓말처럼 아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그저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뿐이라는 듯, 시선이 나디아를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놀란 듯 커지며 되돌아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른 기사들에게 무언가 말하는 듯싶더니 홀로 빠져나왔다.

아실이 제게 다가오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서둘러 뒤돌아섰다.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함께 있던 것을 에드윈에게 들켰던 날이 떠올랐다.

꽉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뺨을 대충 문질러 닦은 나디아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지만 가뜩이나 무거워진 몸으로 기사를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날듯이 가벼운 발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왜 쫓아오는 거야. 서두르던 발걸음이 꼬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휘청거리는 그녀의 몸을 부축하듯 붙잡은 팔에 반쯤 안기듯 멈춰 선 나디아는 넘어질까 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가 몸을 균형을 잡자 빠르게 몸을 떼어 낸 기사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벌어지자 조금이나마 초조함이 가셨다.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성안이라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얼굴이 왜….”

퉁퉁 부은 눈두덩을 발견했는지 아실이 놀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당황한 그의 얼굴을 보자 그동안 간신히 쌓아 왔던 평정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녀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아실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조금의 타격도 없을 그것은 얌전히 그의 발치로 떨어졌다.

“…다 너 때문이잖아.”

“네?”

어깨가 마구 들썩였다. 그녀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던 기사가 그녀를 이끌어 근처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속에서 맴돌기만 하던 원망을 쏟아부을 대상이 나타나자 나디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꽉 쥔 주먹을 휘둘렀다.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아프지 않을 것이 분명한 주먹질에도 아실은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눈물로 엉망이 되었던 나디아의 얼굴 위로 새로운 물길이 생겼다.

“무서워 죽겠단 말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두서없는 말들이 흘러나오자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을 남자가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려 들었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안착한 손이 천천히 나디아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혹시, 혹시 각하께서.”

“…당신 아이야.”

“뭐?”

나디아는 아실이 긴장하며 꺼낸 말을 딱 자르며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품 안에 담아 놓았던 말을 뱉었다. 입에 담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것을 토해 내듯 힘겨운 말이었다.

아실의 얼굴이 충격으로 얼어붙는 것을 보자 잠시 잠잠해지는 것 같았던 원망이 다시 샘솟았다. 그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던 나디아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면서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함부로 휘두른 손이 특별한 종착지 없이 남자의 가슴과 어깨를 마구 후려치고 턱 아래를 스쳐 지나며 붉은 손톱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이 나쁜 자식!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이제 큰일 났어. 다 너 때문이야….”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디아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토해 냈기 때문이다.

그녀도 어차피 이렇게 그를 원망해 봤자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탓하기를 멈추지 못했던 것은 그저 마음껏 탓하고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나타났다는 비겁한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제 어깨 위에서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는 그의 손을 내치고 방을 빠져나갔다. 창백하게 질린 기사의 얼굴에는 눈길 한 번 두지 않았다.

“잠깐, 잠…!”

말 한마디 못한 채 굳어 있던 남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복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용건이 있으면 빨리 끝내라는 기색을 온몸으로 내비치며 나디아는 입을 꾹 다물고 섰다.

마른침을 삼키는 듯 몇 번이고 흔들리며 오르내리던 그의 목울대가 간신히 멈추었을 때에야 힘겹게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낳을 겁니까?”

“내가 미쳤니?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내려앉았다. 나디아는 잡힌 팔목을 놓아 달라는 뜻으로 팔을 흔들었지만 아실은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붙잡았다. 식은땀이 나는지 잡힌 부위가 습해졌다. 나디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우리가 함께 떠나는 건.”

나디아는 몸서리를 치며 잡혀 있던 손을 털어 냈다. 그런 상상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이미 수도 없이 해 봤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아서 무심코 떠올랐던 상상을 이어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비극적 결말만이 머릿속을 줄지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얻지 못할 것에 대한 미련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불려 가는 배 속의 존재를 없애기만 한다면 편해질 것 같았다.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었지, 참.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왜 이렇게 한계에 몰리기까지 떠올리지 못했을까? 실컷 울고 나니 이제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디아는 복잡한 얼굴을 한 기사를 내버려 둔 채 걸음을 돌려 북쪽 별관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마법사가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었지만 한계에 몰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하게 나무 문을 두드리고는 답도 듣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다행히 마법사는 안에 있었다. 놀란 얼굴을 한 타샤를 보며 나디아는 문을 꽉 닫아걸고 등을 기댔다. 잠시 멈춰서 숨을 가다듬자 자리에서 일어난 마법사가 불쾌한 낯을 했다.

“아무리 귀부인이라고 하셔도 이렇게 함부로 찾아오시면….”

“건방지게 굴지 말아요! …얼굴은 왜 그래요?”

마법사가 급하게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나디아는 이미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난 이후였다.

양 뺨에 새겨진 시퍼런 멍 자국과 엉망으로 터진 입술, 가늘게 긁힌 자국에 이제 겨우 딱지가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꼭 누군가에게 실컷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은….

“귀부인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마법사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끌어내려 얼굴을 가리며 말을 돌렸다. 나디아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마법사를 찾아온 이유가 다시 떠오르자 목이 바짝 조여들었다.

나디아는 입술을 씹고 손끝을 쥐어뜯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대답이 늦어지자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용건이 없으신 거면 이만….”

“저,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을 꺼내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그 말을 결국 제 입으로 뱉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하자 마법사가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대뜸 대답부터 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알 만합니다. 감당 못 할 짓은 하지 마셨어야죠.”

마법사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그녀의 냉랭한 태도로 보아 나디아를 상간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하기 힘들 만큼 우왕좌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결혼식 날 이후에 있었던 일만큼은 그녀의 자의가 눈곱만큼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라고 원해서 이렇게 된 줄 알아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려 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넘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턱 끝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미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따끔거렸다.

“그 사람이 억지로, 나는, 난 싫다고 했는데….”

나디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참아 보려던 노력도 무색하게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벽을 붙잡고 구역질을 했다.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나오는 것도 없었다.

놀라서 다가온 마법사가 등을 두드려 주며 물을 건넸다. 나디아는 입을 헹구고 느릿하게 돌아섰다. 어지럼증이 일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됐어요.”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두통마저 일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든가, 아니면 발코니와 계단 중 어느 쪽이 더 나을지 생각하려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만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마법사의 앙상한 손가락이 나디아의 팔뚝에 휘감겼다. 그 손이 선뜩하게 차가워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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