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팔을 잡아 주지도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자니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그의 등만 바라보면서 걷는 내내 나디아의 상상은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소박을 맞더라도 공작가로 돌아갈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추문을 안고 이혼당한 딸을 다시 받아 줄 만한 집안이 아니다. 결혼을 하고 엘하임으로 내려온 이후 편지 한 장 주고받지 않은 것만 봐도 알 만한 일이었다.
설마 이대로 성 밖으로 쫓아내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지하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성 내에 있다고는 했으니까.
설마, 하고 의심하면서도 에드윈은 항상 예상이 가능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주 가끔 보여 주었던 다정한 행동들은 그저 변덕일 뿐이었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그녀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면 거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혀가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지만 나디아는 필사적으로 말을 끄집어냈다.
“에, 에드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녀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간신히 뱉어 낸 말은 그의 귓가에 닿지도 않은 것처럼 가볍게 묵살되었다. 에드윈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만일 정말 둘 중에 하나라면 차라리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아실이 그녀를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의 부하와 붙어먹은 귀부인, 따위의 추잡한 소리를 들어도 거리를 전전하다 사창가로 팔려 가거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것보다는 낫다.
그녀의 생각이 끝 간 데를 모르고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고 있을 때쯤이 되어서야 에드윈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등에 부딪힐 뻔한 나디아는 그제야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에드윈이 도착한 곳은 성 밖도, 지하 감옥도 아닌, 마법사들이 머무는 북쪽 별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디아의 눈에도 익숙한 나무 문 앞에서 문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벌컥 열어젖혔다.
방 안에는 그가 방문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담담한 낯을 한 타샤가 그들을 맞이했다.
“준비되었습니다, 각하.”
“잘됐군.”
에드윈이 나디아의 등을 밀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당장 그녀를 내쫓거나 가두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뒤이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나디아를 앞에 세워 둔 채 타샤는 그녀의 손끝을 찔러 피를 두 방울쯤 짜 냈다.
따끔한 통증에 놀라 반사적으로 팔을 빼내려고 했던 나디아의 행동은 에드윈이 팔목을 세게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탓에 가볍게 저지되었다.
마법사는 나디아에게서 받아간 핏방울을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흰색 돌 위에 떨어트렸다. 잠시 은은하게 빛을 발하던 돌 위로 이상한 무늬가 떠오르더니 연한 녹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흰색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방 안은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나디아는 일련의 행동들이 무엇을 알아보기 위한 일인지, 또 그 색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몰라 불안하게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돌의 변화 과정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디아는 아주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각하의 아이가 맞습니다.”
“확실해?”
“…네.”
에드윈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얼굴이었다.
한참이나 마법사를 노려보던 시선이 나디아에게로 넘어왔다. 그녀는 그가 말도 없이 이런 것을 꾸미고 있었단 사실을 알고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역시 무언가 이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번 일 역시 마법사에게 미리 지시를 해 두었을 정도라면 다 알고 있었다는 거겠지.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두려웠다가, 이윽고 마음이 놓였다.
그의 아이가 맞다. 더는 태어난 아이가 붉은 머리를 하고 있으면 어쩌나, 녹색 눈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상상을 하며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던 시간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눈물마저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나디아는 손바닥으로 배를 슥슥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곁에 있는 동안 눈에 띄게 안심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애초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산 것에 화를 내는 것이 평범한 귀부인들의 반응일 테지만 그녀는 지금 당장 찾아온 안도감에 휩싸여 있느라 미처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제 누가 보아도 임산부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 확연하게 부른 배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묘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섰다. 안심하는 것도, 그렇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다음으로 아실과 함께 있었던 이유가 무어냐며 추궁할 줄 알았는데 왜 그냥 가 버린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돌바닥을 울리는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멀어지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침묵했다. 나디아는 긴장이 풀려 한 걸음 내딛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마법사는….
“이걸로 빚은 갚은 겁니다.”
마법사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샤는 몇 년은 늙어 버린 듯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바로 옆에 있던 동그란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느리게 이마를 더듬는 마법사의 손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나디아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갑작스럽게, 빚을 갚았다니?
“무슨 말이에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귀부인.”
질책하는 듯한 시선에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불쾌해졌다. 나디아는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를 지우고 날카롭게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묘한 불길함이 발목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각하의 아이가 아닙니다.”
나디아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쯤 열려 있던 문 밖에 시선을 두었다. 다행스럽게도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터질 듯이 거세지는 심장 소리와 갑작스럽게 낭떠러지로 떠밀린 듯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귀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쿵쾅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나디아는 가슴께를 짓누르며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었다.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간 것처럼 한기가 들었다.
바로 조금 전에 에드윈의 아이가 맞다고 말했으면서. 거짓말일 것이다. 에드윈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말보다는 그녀에게 하는 말이 거짓인 편이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머릿속으로 필사적인 부정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디아는 더 이상 모른 척하며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타샤의 얼굴은 농담을 하는 사람이라기엔 너무도 지쳐 있었으므로.
“…분명 조금 전에 에드윈에게는 그의 아이가 맞다고 했잖아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귀부인.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빚을 갚은 것으로 하겠다고요.”
어느새 피곤한 기색을 지워 낸 마법사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돌을 서랍에 집어넣고 나디아의 손끝을 찔렀던 뾰족한 칼끝을 닦았다.
나디아는 마법사가 칼을 칼집에 넣고 그녀에게 다가와 손끝의 자그마한 상처에 약을 발라 줄 때까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언젠가 타샤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빚을 이렇게 갚는 건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더없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벌써부터 후회가 되는군요. 곧 들통날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은…. 됐습니다. 이만 가 주세요. 쉬고 싶습니다.”
마법사가 한숨을 내쉬고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동안 석상처럼 굳은 채 충격을 견디던 나디아는 정중한 말투를 가장했지만 가차 없이 건네 오는 건방진 축객령을 듣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마법사의 거처를 떠났다.
***
무슨 정신으로 방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에드윈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할지언정 이리도 충격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윈의 아이란 말을 듣고 안심한 이후에 듣게 된 정반대의 진실은 갑작스럽게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선사했다.
나디아는 방 안에 홀로 선 채로 배를 내려다보면서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끔찍한 혼란을 맞닥뜨렸다. 이 아이가 에드윈의 아이가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지금, 도무지 이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다.
나디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낳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배가 이만큼이나 불렀으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지.
수도의 귀족들이 외도를 일삼고 정부를 두는 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수도와 엘하임은 한 나라 안임에도 문화가 많이 달랐다. 그리고 수도의 귀족들이라 해도 아이가 생기게 외도를 하지는 않았다.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일 뿐이니까.
사생아. 나디아는 손끝을 깨물었다. 사생아를 낳을 수는 없었다. 아이를 없애고 싶었다.
혹시나 붉은 머리 아이가 태어나면, 녹색 눈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걸 본 에드윈이 어떤 얼굴을 할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될지. 다른 사내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하는 남자가, 제 아내가 다른 사내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그녀는 초조한 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르며 중얼거렸다.
아실에게 알려야 할까? 알리면 뭐가 달라지는데? 애초에 그 남자의 잘못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해서, 왜…. 하지만 그녀 자신도 안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그때 약이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차올랐고 자꾸만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얼굴을 감싼 손 틈으로 울먹임 섞인 원망이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배를 내려칠까? 하지만 아픈 건 싫었다. 나디아는 몇 번이고 망설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짓을 할 용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