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43화 (43/115)

43.

03. 나디아 엘란츠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디아는 반박 대신 손끝의 거스러미처럼 거슬리는 의문을 끄집어냈다. 그녀도 깨닫지 못한 사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오해?”

“그날, 귀부인께서 저를 만나지 않고 돌아갔던 날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닙니까?”

그의 말에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눈가가 습해졌다.

그게 다 오해라고? 누군가 잔뜩 헤집은 것처럼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때도 오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판단을 해야 한다고. 그때 무서워 도망쳤던 것이 결국 어떤 모습이 되어 돌아왔던가? 나디아는 떨리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지러웠다.

“…그러면 뭐가 달라져?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야.”

고작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기도 했다. 무슨 짓을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만일 그녀가 들었던 말이 모두 오해일 뿐이라고 해도, 그 자리에서 오해를 풀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머지않아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청혼을 하려 했다니. 잉그램 공작이 고작 평민 출신의 기사, 작위도 고작해야 남작인 사내와 결혼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오해라는 말이나 청혼 같은 말에 애써 다잡은 마음이 흔들리려 드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동안 충분히 나약했으니,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하지만 그리 마음먹는다고 해서 쉬이 생각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다 망쳤다는 거 알아. 미안해.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아실이 한 걸음 다가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이다음에 할 말을 알 것 같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모른 체하고 싶기도 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며 그녀와 똑같이 작게 떨리고 있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마.

“정부여도 좋아. 좀 노는 거여도 좋아. 곁에 있게만 해 줘.”

“…말하지 마.”

“내가 널 너무 사랑해.”

나디아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굴러떨어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소스라치듯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가 난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이거 눈물이 다 날 것 같군. 아주 감동적이야.”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에드윈이 커다란 기둥에 기대선 채로 느릿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연극 대사라도 읊는 듯했다.

나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고 그녀와 똑같이 당황한 아실도 서둘러 서너 걸음쯤 물러나 나디아와 거리를 벌렸다.

설마설마했던 두려움이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에드윈에게서 화난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당연히 화가 나야 할 상황일 텐데 화를 내지 않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동안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그가 이미 아실과 그녀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을 리가.

혹여나 그가 이런 곳에서, 멀쩡한 얼굴로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기라도 할까 봐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만약 그를 마주하게 되면 늘어놓자고 생각하며 준비했던 변명거리가 머릿속에서 증발했다.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직접 닥친 상황이 주는 압박은 상상했던 것의 몇십 배는 더 강렬했다.

나디아는 그저 떨리는 손으로 에드윈의 팔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그가 나디아의 손을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아채며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물어 왔다.

“변명할 기회를 줄까?”

“…변명이라뇨?”

나디아는 일단 잡아뗄 심산으로 모른 척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제대로 통하긴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기사와 밀회를 하다가 들킨 아내가 무슨 말을 둘러댈지 아주 궁금해서 말이야.”

그가 살벌하게 웃었다.

“들어는 주지.”

화가 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의 눈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나디아는 자꾸만 말라 오는 입술을 핥으며 눈을 굴렸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더라.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모든 것이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드윈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가 모른 척 잡아뗐던 것이 통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가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경, 조금 전에 했던 말 다시 해 보겠나?”

그의 표적이 아실로 넘어갔다. 조금 전에 했던 말? 기억을 떠올린 순간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나디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 모습은 조금도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말해 봐. 내 귀가 잘못됐다든가, 사실 그런 뜻이 아니라거나.”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아실이었다. 그는 에드윈을 바라본 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물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건방진 새끼가.”

불편한 심기를 정통으로 건드린 듯 에드윈의 얼굴 위에서 비틀린 미소마저도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어디까지 들었으면, 뭐?”

“오해입니다, 각하.”

에드윈이 아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나디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해는 뭐가 오해야. 네 걸레 같은 보지가 나로는 부족하대?”

“각하!”

그녀는 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변명을 하더라도 거짓말이 되고 그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한 순간에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것을 보면.

어설픈 거짓은 그의 화를 돋울 뿐이다.

“내가 보지 간수 잘하라고 했어, 안 했어?”

“해, 했….”

그의 기세에 밀려 무심코 대답하려던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가 경악한 얼굴의 아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에드윈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다가 이내 나디아에게 고정되었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인지도 의심스럽군.”

그의 시선이 나디아의 배를 훑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배를 감쌌다. 이제 와서 아이를 보호하고 싶다던가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감춰 보고자 하는 헛된 행동일 뿐이었다.

그녀의 손이 차게 식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숨이 차오르고 현기증이 났다. 홀로 있게 되면 떠오르던 끔찍한 상상들이 이때다 싶게 앞다투어 나타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이대로 이혼당하고 수도원으로 보내진다면 오히려 그게 좋은 결말일 정도로 부정을 저지른 귀부인들의 결말은 참혹했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었고 아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그에 대한 처분은 모두 남편의 몫이 된다. 수도원으로 보내거나, 친정으로 보내거나, 탑에 가두거나, 돈 한 푼도 없이 길바닥으로 내쫓건,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친정으로 보내는 것도 집안에서 다시 받아 준다고 했을 때에나 가능했다. 보통은 가문에 누를 끼쳤다며 받아 주지 않고, 그리해서 맨몸으로 길바닥에 내쫓긴 여성은 더 이상 귀족이라 할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나이 많은 귀족들의 후처로 들어가거나, 그런 기회마저 잡지 못한 여자들은 사창가로 가거나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전에 마지막 남은 명예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이렇게 부정을 저지른 귀부인의 말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몇 번인가, 그런 결말을 맞이한 귀부인의 소식이 물밑을 휘돌았기 때문이다.

소녀들과 둘러앉아 한심한 여자라며 비웃었지만 모두들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차례가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그 선택지들 중에 어떤 것이 제게 찾아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배 속의 아이가 에드윈의 아이가 확실하다면 적어도 길바닥에 맨몸으로 내쫓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저 아실과 몇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뿐이라며 매달려 볼 수라도 있을 텐데.

아직 유예는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까지는 4개월은 더 남아 있었고 그 전까지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아이에게 매달려야 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에드윈이 나디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겁에 질릴 대로 질린 나디아는 반사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가 흠칫 놀랐다. 에드윈이 불쾌해했기 때문이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아실이 그를 막아섰다.

“각하.”

“내가 아직 경에게 꺼지라고 하지 않았나 보군. 천한 것은 어쩔 수가 없네.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나? 꺼져 있어. 네놈은 다음이야.”

아실이 멈칫거리자 에드윈은 이제 여유를 가장하지도 않았다. 아실이 나디아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던 에드윈의 시선도 나디아에게 향했다.

나디아는 소용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에드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실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아실의 행동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가 에드윈의 뜻에 반해 봤자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화를 당하는 사람은 그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실도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강경하게 막아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고 패배감에 젖은 눈빛이 바닥에 처박혔다.

나디아는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을 만치 뛰어 대는 가슴을 짓누르며 에드윈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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