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귓가에서 메아리가 울렸다. 아니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제대로 들었는데도 누군가 귀에 대고 몇 번이고 나디아, 나디아…. 하며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꾸만 들려오는 메아리의 실체가 있다면 분명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 닥치라고 쏘아붙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 아실 쿠르쉬드는 거기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칠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얼굴이 닮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름까지 같다면 착각이라는,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을 계속 우겨 볼 수가 없었다.
성대한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을 하는 내내 그리고 교대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실은 계속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구는 그를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너 요즘 왜 그래?”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꼭 누군가 물꼬를 트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추측과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실은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가 만나던 소녀가 각하의 아내가 되어 나타났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리만치 멀쩡한 얼굴을 할 수도 없었던 아실은 동료들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 맡에 앉아 속에서 들끓는 감정들을 가라앉혀 보려 노력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뱉어 낼 것처럼 한숨을 거푸 쉬던 아실은 그 밤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결혼하기 전에 잠시 놀아 보려던 생각이었던 걸까? 그가 보았던 나디아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어딘가에서 부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금이 간 지 오래인 믿음은 크나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분노와 배신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흉포한 마음이 자꾸만 그를 충동질했다.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아주 느리게 동이 트고 있었지만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어 잘게 경련마저 이는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고 벽에 이마를 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나디아를 찾아가 그 발치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고 싶어졌다가, 그녀가 입었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갈가리 찢어 버리며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어둑한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로 고개를 숙인 그의 입술 사이로 상처 입은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참담함에 빠져 있는 동안 붙잡을 수도 없이 해는 떠올랐고 아침이 밝아 왔다. 한숨도 잠들지 못한 탓인지 충혈된 눈을 한 채로 소집에 응한 아실은 무슨 맛인지도 모를 아침을 먹고 성을 돌아보기 위해 나섰다.
본래 2인 1조로 해야 할 일을 극구 홀로 하겠다며 고집을 부린 것은 혹시라도 누군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까 봐 지레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아실은 그가 이번만큼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밤을 새운 수척한 얼굴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오가 지나도록 별다른 일은 없었다. 결혼식 이후에 열렸던 피로연의 후유증처럼 은은한 포도주 냄새가 연회장 근처를 아직까지 맴돌고 있었다.
황궁의 방에서 느지막이 일어나 저녁에 있을 연회의 치장을 위해 돌아가는 귀족들을 지나치며 아실은 혹여 그 사이에 나디아가 있기라도 할까 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은 건지, 만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하나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많은 생각을 정리하고 또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 하룻밤은 지나치게 짧았으니까.
그리고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텅 빈 복도를 걷는 아실의 앞에, 거짓말처럼 나디아가 나타났다. 어제보다는 조금 덜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그가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몸을 떨며 밤을 지새웠건만, 그에게 어두운 감정을 선사한 여자가 너무도 아름다워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새삼 나디아와 그 사이를 가로지른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 깨닫게 되었다.
아실은 그대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가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 여기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의지를 배반한 것처럼 그의 걸음은 이미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가느다란 팔을 잡아챌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멈춰 서자 그제야 타인의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파란 눈이 놀라 커졌다.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경악하던 그 시선이 재빨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기에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놓아주자고 생각했으니 결혼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무슨 일이죠?”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나디아가 말했다. 누군가 머리 위로 찬물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짓누르려 했던 풍랑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아실은 이를 악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궁 안이라도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귀부인.”
“이제 돌아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먼 곳을 바라보던 나디아는 이내 찬바람이 불 만큼 냉랭한 태도로 돌아섰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아실은 품속에 고이 아껴 두었던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빈껍데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감정인 줄 알았다. 아름다운 눈에 담긴 그 반짝이는 감정이 제 것과 같은 줄로만 알았었다. 얼마나 건방진 착각이었는지.
아실은 무얼 말하고 싶은지도 정하지 못한 채 멀어진 나디아의 뒤를 쫓았다. 늦봄의 미풍에 부드럽게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과 은은하게 풍겨 오는 향기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텅 비어 버린 마음속에 차오르는 어두운 것을 씻어 내지는 못했다.
아실은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붙잡고 근처의 빈 방으로 밀어 넣었다. 입을 틀어막은 탓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여자의 눈이 원망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말을 내뱉는 것이 이렇게 힘들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지금만큼은 마치 숨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누군가 목을 잡고 조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아실은 억지로 침을 삼키며 울컥울컥 치솟아 올라오는 감정들을 삼키려 애썼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손이 경련했다. 당장이라도 가녀린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네가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이 모두 거짓이었느냐고 추궁하고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혹은 귀찮은 무언가를 얼른 털어 내고 싶다는 듯한 말투에 가슴이 시렸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차갑게 불타오르는 분노였다.
다른 남자를 위해 아름답게 차려입은 옷과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이 제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것을 참아 내는 것도 너무도 무섭고 어려웠다.
몇 시간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이대로 손을 떼고 행복을 빌어 주며 물러나자고 몇 번이고 자신에게 속삭여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식?”
“이렇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매달리지 말자. 스스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몇 번이고 그리 되놰도 한참 전부터 통제를 벗어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실은 아직도 제가 뭘 어쩌고 싶은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망가트리는 것은 너무도 쉽다. 분명 후회할 테니, 아무리 화가 나도 소중히 대해야지. 그녀에게 자신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소중했으니까.
머릿속에 박아 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되뇌는 다짐과 폭력적인 충동이 번갈아 가며 튀어나왔다. 아실은 스스로에게 새로이 일러 주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날 세울 거 없어.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시기가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당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비켜. 당신이랑 더는 할 이야기 없어.”
미약한 힘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약한 힘이었지만 너무도 쓰라렸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도, 이렇게 어쩔 줄 모르는 혼돈에 휩싸인 것도 처음이라서 아실은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생각하던 것처럼 냉정하게 물러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끝났어. 놀 만큼 놀았잖아?”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가슴 한복판에 무자비하게 내리꽂힌 말에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아니야. 나는, 나는. 누구 맘대로 끝이란 말인가? 어느 날 갑자기 약속을 어기고 홀로 내버려 둔 채 사라져 버렸다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나타나서 이제 결혼했으니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면 나는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거칠기 짝이 없는 행동에 겁에 질린 얼굴이 보였지만 아실에게는 그녀를 달래 줄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나디아가 준 고통에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숨이 가빴다.
필사적으로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며 다독였던 순간들이 모두 부질없었다고 깨닫는 건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그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것 보라고.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며 소리 높여 웃는 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넌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는 끝내지 않았어.”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난 어제 결혼했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마음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그녀에게 상처 주고 싶었다.
그가 받은 만큼, 그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그녀도 상처 입길. 고통스러워하길.
“중요한 건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거지.”
정신이 든 것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였다. 아실은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다 망쳤어. 내가….
스스로의 환상이 만들어 낸 비웃음 대신, 판단력을 잃지 말라던 스승의 목소리와 망가트리지 말자던 스스로의 다짐이 떠올랐다.
끝도 없는 후회와 자책감 그리고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얼굴을 감싸 쥔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물속에 잠긴 것처럼 자꾸만 숨이 찼다. 홀로 꿈꾸었던 미래, 소중히 하겠다던 다짐, 그 모든 것들이 붙잡을 기회도 없이 부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갔다.
내가 망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