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에인트 위겔이 그를 기사단의 차기 단장 후보로 생각하기 시작한 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고무되었다. 평민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실의 나이 스물,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위겔의 인정을 얻었다는 생각과 또 직위에 따라올 명예를 떠올리며 설레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장의 업무를 배우기 위해 위겔의 뒤를 따라다니던 아실의 기대는 오래 지나지 않아 깨어졌다.
직위가 높아질수록 큰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각오는 해왔던 바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의 일이란 단지 책임의 무거움만 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가시 기사단은 누가 뭐라 해도 제국에서 손에 꼽는 무력 집단이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여러 세력과 힘을 합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은 물론, 다른 기사단, 또는 마법사들과 사전에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단장쯤 되면 수많은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곳에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도록 처세술을 익혀 둘 필요가 있었다.
아실은 그 일이 어려울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민족의 피가 섞인 그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 속에 깊이 뿌리내린 경멸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평민, 이민족, 고아…. 명백한 비웃음을 띠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찔러 댔다. 칼날 같은 시선들이 그를 저미는 동안은 서코트 안에 입은 튼튼한 갑옷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어린 시절에야 자주 겪었던 일이었지만 적어도 기사단에 들어간 이후로는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밖으로는 기사단 정복을 입고 검을 찬 남자를 업신여길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없었고 안으로는 엄격한 규율이 기사들을 옭아맸다. 어쩔 수 없는 질시는 있었지만 실력이 전부인 집단에서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경멸이 따라붙은 적은 없었다.
평민이 기사가 되는 것은 봐주더라도 기사단장 자리에 올라 기고만장한 건 아니꼬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 가시 기사단도 이제 별 볼 일 없어지려나 봅니다, 위겔 경.”
“그러게나 말입니다. 경의 눈썰미가 좋은 건 유명했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스물. 저는 물론이고 부모처럼 따르던 남자까지 말려들게 하는 조롱을 의연히 받아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느물거리며 웃는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주먹질 몇 번이면 살려 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이 잡혔다. 아실은 희미한 미소가 걸린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위겔의 옆모습을 봤다. 그가 붙잡지 않았더라도 달려들진 않았을 것이다. 결코 그 혼자서 책임지고 끝날 일이 되지 않을 테니까. 앙다문 턱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했다.
아실 쿠르쉬드는 더 높은 자리를 위한 꿈을 접었다. 이제야 현실을 직시한 기분이었다. 위겔처럼, 조롱을 퍼붓는 귀족들 앞에서 웃는 얼굴로 버틸 자신도 없었고, 혹여 자신이 참지 못해 폭발했을 때 그 피해가 기사단 전체에 미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에인트 위겔이 차기 단장의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야 거절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에인트 위겔은 몇 년 동안이나 슬금슬금 눈치만 보며 말을 꺼내지를 않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달랐다.
기사단장에게는 작위와 함께 자그마한 영지가 주어졌다.
귀족인 녀석들에겐 별 볼 일 없는 것일지 몰라도 아실에게는 달랐다. 그는 작위가 필요했다. 귀족이 되면 그녀의 집안에 정식으로 청혼을 넣을 수 있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도 좀 있으니 자그마한 영지가 생긴다면 귀족 아가씨 하나 정도는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기사인 것도 숨기는 거야?”
“신경 꺼. 안 가냐?”
유겐이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손이 아실의 어깨를 몇 번이고 두드렸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새빨간 불씨를 매달고 타들어 가는 연초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손을 흔들었다. 손의 움직임을 따라 연기가 흩어졌다.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지만….”
장난기로 가득한 손이 쉼 없이 흔들렸다. 아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어 조마조마하게 그 손가락 사이에 매달린 연초를 바라보았다.
“약속도 잡지 않고 나타나는 건 기사도에 어긋나지.”
불씨가 남은 연초를 바닥에 내던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유겐은 불씨를 짓밟아 끈 뒤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는 것처럼 과장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웃음이 샐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아실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장난스럽게 쳤다. 손바닥이 마주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간다.”
휘적거리며 멀어지는 유겐의 뒷모습을 본 후에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실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골목 안쪽을 훑어보며 언제쯤 그가 기다리는 연인이 나타날지 생각했다.
늘 나디아가 나타나곤 하던 방향에서 그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언제쯤 보폭이 좁은 발소리가 귀에 들릴지. 언제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지.
그러나 해가 시계탑 위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던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엇갈릴 것을 걱정해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서 있던 아실의 얼굴 위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초조함으로 그리고 걱정으로 물들었다.
약속했던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가 버렸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이 들끓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딘가에서 양아치에게 붙잡히기라도 했다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뛰고 있었다. 지는 해가 선명한 황금빛을 골목 안쪽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온 골목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던 아실은 결국 어디에서도 나디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아실은 그녀가 약속 장소로 출발조차 하지 않았다는 가설과 누군가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해가 진 후에도 밤색 머리의 아가씨를 본 적이 있냐고 캐물으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인근을 뛰어다녔다.
그를 찾으러 종자가 왔을 때에서야 하루 종일 구석에 앉아 구걸을 하던 노파에게서 밤색 머리에 고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급하게 골목에서 뛰어나와 마차를 잡아타는 걸 본 것도 같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목격담도 확실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 속의 아가씨가 나디아인지 역시 확실하지 않았지만 딱 히 부근에 그런 차림을 하고 홀로 다니는 여자가 여럿일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안심해도 좋을지 또 다른 불안을 상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계속되는 종자의 재촉에 마지못해 후작저로 돌아가면서 대체 나디아가 왜 그를 만나지 않고 돌아갔는지, 그 이유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아실은 약속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서 나디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눈에 익은 골목길에 그가 아는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날 종자가 돌아갈 것을 재촉해도 조금 더 찾아봤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끊이지 않는 걱정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아실의 얼굴을 본, 친분이 있는 동료 기사들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눈치챘다. 누군가는 술을 샀고, 누군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위로를 했다. 마치 모두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실은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메마른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선배들이, 동료들이 귀부인들의 유희에 어울리려면 돌 같은 심장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내 연인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대충 웃어넘겼었다. 나디아가 그럴 리 없으니까.
그 순진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눈 속에 담긴 것은 선명하고도 맑은 애정. 애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다른 감정일 리 없으니까.
우연히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아실은 제가 그녀와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홀로 쑥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나오지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몇 번이나 생각이 교차했다. 이렇게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비산하며 어지러운 건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마지막 약속이 있던 날로부터 한 달 가까이 지나자 필사적으로 늘어놓던 변명이 멎었다.
이런 게 버려진다는 거군. 아실은 몇 번인가 목도한 적 있는, 실연의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던 기사들의 심정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실은 될 수 있으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원망과 비참함, 슬픔 그리고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희망 따위의 감정이 밤마다 휘몰아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기사단의 일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주군인 엘란츠 후작의 결혼식이 가까워졌다. 황제의 입김으로 성대하게 열릴 결혼식에서 유겐이 속한 퀘른 기사단과 아실이 부단장으로 있는 붉은 가시 기사단이 경비를 맡게 되었다.
강도 높은 합동 훈련이 몇 번이나 이어졌고 그것은 쓸데없이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비우기에 좋은 수단이 되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훈련을 하고 나면 빨리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주군의 결혼식 당일 그가 보게 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기사단 정복을 차려입고 신부가 걸어갈 주단의 한쪽에 선 채로 멍하니 꽃향기를 맡던 아실은 새하얗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잉그램 공작 영애가 지나가는 것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바라보았다.
얇디얇은 베일 아래로 보인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녀가 이미 저만치 앞에서 엘란츠 후작의 손을 붙잡았을 때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머리가 부정을 시작했다. 닮은 사람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그럴 리가 없지.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란히 선 신랑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실은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꽉 쥔 주먹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정신 차리고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리저리 가지를 뻗어 가는 어두운 생각들을 간신히 붙잡아 멈춰 세운 아실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실이 터무니없는 착각이라 결론짓고 애써 경직된 미소를 입가에 띨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의 힘으로 본래의 것보다 몇 배는 커진 황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신부 나디아 잉그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