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02. 아실 쿠르쉬드
아실 쿠르쉬드는 고아였다. 그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부모가 없는 아이는 철드는 시기가 빠른 법이었고, 그 역시 당연한 수순처럼 법칙을 따르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든 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감정을 숨기고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실 쿠르쉬드는 이민자의 피가 섞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제국은 거대한 나라였기에 수많은 인종들이 뒤섞여 살아갔다. 하지만 유난히 멸시받거나 배척당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필이면 개중 하나인 집시의 피가 섞인 것은 불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는 이유 없는 적의를 마주하는 일이 잦았다.
하루 종일 구두를 닦으며 번 돈으로 산 빵에서 곰팡이를 발견했을 때, 골목 한편에 웅크리고 잠들었다가 무수하게 쏟아지는 걸인들의 발길질을 맞으며 눈을 떴을 때, 여관에서 손님들의 잔심부름을 해 주고 받은 팁을 몇 살인가 더 많은 소년에게 모조리 빼앗겼을 때, 고아 새끼라며 조롱하는 또래 남자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자 그 소년의 부모가 나타나 난동을 부려 일자리를 잃었을 때가 그랬다.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가끔은 손에 든 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고 떼를 쓰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부모가 있는 다른 또래 아이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하는 것처럼.
하지만 아실이 그들과 다른 점은 아무리 울어도 입에 과자를 물려 주며 달래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실은 울지 않았다.
어린 몸으로 바람막이 하나 없이 힘든 하루하루를 버터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삶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었다.
특별히 그가 더 힘든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의 삶이란 거의 비슷했다.
다만 몇 번인가의 갈림길에서 운명이 바뀌곤 했다. 단순하게는 성인으로 자라날 기회가 있는가, 혹은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아이로 머문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가. 또 시궁창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는가, 찾아오지 않는가 따위의 갈림길이었다.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얼굴로 쓰레기장 근처의 공터에 둘러앉은 고아들은 옆 마을의 어느 아이가 사실은 귀족가에서 잃어버린 외동아들이어서 그를 찾아 헤매던 부모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갔다든가, 혹은 주점에서 서빙 일을 하던 예쁘장한 여자아이는 젊고 잘생긴 남자의 청혼을 받아 귀족가 마나님이 되어 있다든가 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자기에게도 그런 동화 같은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랐다.
아실은 그 모든 이야기들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회를 바랐다. 이 시궁창 같은 삶을 벗어날 기회. 그리고 운 좋게도 아실 쿠르쉬드에게 그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열네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또래보다 훨씬 자그마한 체구에 비쩍 마른, 별 볼 일 없는 소년이었다.
모든 것은 우연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었다. 여관에서 손님맞이 일을 하던 소년이 다리를 다쳐 나오지 못한 것과 그 빈자리를 아실이 맡게 된 것 그리고 지저분한 붉은 머리를 한 소년이 한 남자의 눈에 띈 것까지.
한 번도 그 갈림길이나 기회를 접한 일은 없었지만 아실 쿠르쉬드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굳은살과 흉터가 빼곡한 남자의 손은 언뜻 보면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물러서고 싶을 만큼 험한 일을 떠올리게 했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의 눈을 마주한다면 그 감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시간을 축내는 건달들이나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내다 파는 놈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렇게 단단한 눈을 한 남자는 처음 보았다.
“밥은 안 굶게 해 주마.”
그날 처음 만난 남자가 아실을 데려가길 원하며 한 말이었다.
어쩌면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달콤한 말이 아니어서 마음이 동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일찍부터 위해를 끼칠 만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몇 번인가의 경험 후 살아남기 위해 길러진 것이었다.
단순하고도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열심히 갈고닦아 온 아실의 감이 말했다. 이게 바로 네게 주어진 기회라고.
아실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흉터로 뒤덮인 손을 붙잡았고 그러자 남자 역시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뜨거운 온기가 아실 쿠르쉬드의 인생을 차가운 흙바닥에서 끌어 올렸다.
단단한 눈을 가진 남자의 이름은 에인트 위겔. 붉은 가시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아실은 그의 종자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아실이 굶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아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썼다. 어렵게 잡은 기회였다. 너를 데려온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는 말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이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더욱 싫었다. 아실은 악바리 소리를 듣던 근성을 발휘했다.
그 이후로 아실 쿠르쉬드가 붉은 가시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단조롭고 지난해서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어디서 저런 놈을 데려왔냐는 기사단원의 추궁에 에인트 위겔은 단순한 변덕으로 데려온 것뿐이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실 쿠르쉬드는 성장했고, 이유 없는 적의에 무력하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는 제가 잡은 기회와 스스로 만들어 낸 삶에 제법 만족했다. 평범한 삶의 궤도에 오르게 된 것 같은 안정감은 찬바람만 불던 가슴속의 빈자리를 대신해 차올랐다.
게다가 그는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내지 않을 셈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 생각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안에서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디아’는 아실 쿠르쉬드에게 분에 넘치는 상대였다. 숨긴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소한 습관, 별거 아닌 말투에서 흘러나오는 숨길 수 없는 격차가 그랬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아실 쿠르쉬드는 나디아를 차마 놓지 못했다. 처음 느껴 보는 달콤한 감정이었다.
아름다운 귀부인들과 그녀들의 한낱 유희를 위해 마음을 바치던 기사들, 또는 반대의 경우도 이미 몇 번이나 관조한 적 있었다.
때로는 서로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끝이 항상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버림받거나 혹은 신분의 벽에 가로막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아실 쿠르쉬드는 계속해서 자신을 타일렀다. 어차피 그녀도 다른 귀부인들과 비슷할 것이다. 팔려 가듯 결혼하기 전에 잠시 즐기려는 거라고, 함부로 매도하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짓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흰 아네모네처럼 피어나는 나디아의 미소를 보고도 그 생각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세워 두었던 벽은 감정의 파도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아실은 나디아의 하얗고 고운 손이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푸른 눈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이 그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아실은 참을 수 없어 그 눈가에 입 맞추었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가슴속을 파고들고 영혼을 사로잡았다. 달콤한 고통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감정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저 부드럽게 물결치는 소녀의 머리카락과 보드라운 분홍빛 뺨을 매만지며 한없이 속삭이고 싶었다. 좋아해, 예뻐, 좋아해, 예뻐….
그는 어느새 두 사람이 함께인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아담한 이층집과 벽돌담을 휘감고 올라간 장미 덩굴, 잘 가꿔진 정원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름다운 연인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플 만큼 행복한 광경이었다.
하루 종일 시간을 공유하는 기사단원들 중 아실이 몇 시간씩 자리를 비우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많았다. 그리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가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 역시 알아챘다.
몇몇은 메말라 있던 녀석에게 봄날을 가져온 여자를 궁금해했고, 또 다른 몇몇은 아실의 늦은 첫사랑을 놀려 줄 생각에 즐거워했다.
“쯧쯧….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네놈이 딱 그 짝이다.”
느닷없이 등을 강하게 후려치는 통증에 아실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겔 경.”
“다른 놈들은 몰라도 자네까지 이럴 줄은 몰랐지.”
여느 때처럼 단단한 눈이 꿰뚫을 것처럼 그와 시선을 맞추어 왔다. 아실은 단번에 그가 무얼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당황하며 물러섰다.
“판단력을 잃지만 마라. 후회할 일이 생기니.”
“네.”
아실은 그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기사란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항상 냉정을 유지할 것, 판단력을 잃지 말 것. 아침에 눈을 뜨고, 깊은 밤 지친 몸으로 잠자리에 들기까지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되새기는 말이었다.
에인트 위겔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니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여겼다.
지금은 국경도 아닌 평화롭기 그지없는 수도였다. 아실 쿠르쉬드는 자신이 판단력을 잃는 일이 적어도 한동안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건이라고 할 만한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그는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이미 기사단의 모두가 알고 있을 말을 굳이 한 번 더 입에 올린 것이 무엇에 대한 충고인지 말이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어차피 다 들통났는데 뭘 그래?”
점심시간이라 제법 한산해진 기사단 숙소를 몰래 빠져나오려다 오랜 친우에게 딱 걸린 참이었다. 하필이면 유들거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겐에게 들켜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비번이라 심심하다며, 아실이 돌아가라고 해도 듣지 않았고 모른 척 정강이를 걷어차려 해도 물 흐르듯 피해 가는 꼴에 아실의 약만 바짝 올랐다.
무시하다 보면 떨어져 나갈 것이라며 묵묵히 갈 길을 재촉하자 어느덧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거추장스러운 혹은 떼지 못했지만.
괜스레 초조했다. 할 짓이 없어서 이렇게 외진 골목에서 몰래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디아와의 만남을 숨기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녀가 귀족이었고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이 타인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이 없어서였다.
평민이라면 그리 큰 흠은 아니었지만, 귀족 영애에게는 지나치게 큰 흠이었다. 호위를 위해 수행 기사가 따를 때도 하녀들이 함께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줄까?”
적당히 놀리다 가겠거니 여겼건만 기대와 달리 유겐은 아예 죽칠 생각인지 연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퍼져 나갔다. 다른 기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한두 번씩 피울 때가 있긴 하지만 그리 좋아하는 냄새는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싫어해.”
손을 내젓자 연초를 쉬이 거두어 간 유겐이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고개를 돌리며 뱉어 냈다.
“진짜 오늘 만나는 날인가 보네.”
“이제 좀 가라.”
“아직도 만나? 귀족이라며?”
모른 척하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사실을 굳이 다시 한번 더 되새기는 목소리는 제법 아팠다. 아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끝 간 데 없이 치솟으려는 마음을 억지로 내리누를 때 되뇌곤 하던 말을 꺼냈다.
“그냥 좀, …노는 거지.”
하지만 그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는 나디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이 흔들렸다. 주변의 기사들이 그 아가씨는 그냥 좀 노는 걸 테니 깊게 마음 주지 말라거나, 너도 적당히 어울리다 발 빼라고 말하며 등을 두드리던 감각이 선명했다.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깊게 빠지지 않고, 적당히 발을 빼겠다고 마음먹는다 해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게 빠져 버렸다.
아실은 어느덧 그녀와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지 말자. 그런 다짐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