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에드윈은 자신의 말을 지키겠다는 듯이 매일같이 두어 시간쯤 짬을 내 나디아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볼썽사납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말 등에 딱 달라붙어 덜덜 떠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그녀도 이제는 뻣뻣한 자세로나마 허리를 세워 앉을 만큼은 되었다.
그는 몇 번인가 쓸모없다든가 한심하다는 말을 늘어놓다가, 그런 말들이 나디아가 긴장을 풀거나 그녀의 호승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바로 그만두었다.
에드윈은 그녀가 억울해하거나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의 나디아에게는 매도하는 말에 발끈할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내내 같이 잡아 주었던 말고삐를 놓아 버릴까 봐 긴장하느라 그의 말을 반쯤은 흘려듣고 있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허리를 좀 세우고 나서야 나디아는 그의 말을 들을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허리를 세웠으니 이제 어깨에는 힘을 빼고 허벅지는 꽉 조이라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얼마나 음탕하던지,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승마 연습을 하러 나온 공터인지 휘장을 내린 침대 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순하다던 이 작은 암말은 나디아가 실수로 갈기를 잡아당기거나 허둥거리다 옆구리를 걷어차도 움찔거리며 놀랄 뿐 전혀 날뛰지 않았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가 버리고 나면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고 마구간지기가 건네준 사탕무를 먹이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말은 푸르릉거리며 즐겁게 간식을 먹어 치웠다. 나디아는 마구간지기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 이상 먹이면 밥을 안 먹는다고 울상을 지을 때까지 사탕무를 먹였다.
나디아는 말도 개나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녀는 말을 자주 보러 가며 얼굴을 익히게 하고 쓰다듬어 주거나 간식을 먹이는 방법을 통해 급속도로 친해졌다.
말은 이제 나디아를 알아보고 반가운 티를 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드윈이 불쑥 말을 걸었다.
“이름은 지어 줬나?”
“제가 지어 주나요?”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놀라며 사탕무를 떨어트렸다. 말이 작게 발을 굴렀다.
“네 말이니 네가 지어 줘야지.”
“내 말….”
나디아는 홀로 중얼거렸다. 말을 가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생 말을 탈 일도, 가질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의 이름으로 무엇이 적당할지 고민하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 그녀는 홀로 말을 타고 천천히 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비록 여전히 자세가 뻣뻣한 탓에 근육통을 달고 살아야 했지만 말을 타는 것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마차를 타는 것과 다르게 말을 타고 풍경을 가로지를 때 스쳐 지나는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는 감각은 얼핏 자유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면 욜이라고 부를래요.”
“그래.”
에드윈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느닷없이 시작했던 승마 교습은 오늘로 끝이었다. 나디아가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달리게 되자 에드윈이 손을 뗐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 낭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등 정떨어지는 소리나 지껄이더니 이걸 가르치느라 일이 잔뜩 밀린 것은 아냐며 있는 대로 트집을 잡았다.
그는 나디아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당황하다가 눈물을 글썽거리고 종내에는 화가 날 때까지 말로 괴롭혀 댔다.
그의 입에서 나는 잘 타더니 말은 왜 이렇게 못 타느냐는 소리가 나왔을 때에 나디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들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지 살펴야 했다.
입도 벙긋 못 하고 터무니없는 트집을 듣고 있던 그녀는 불쑥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에 눈을 흘겼다.
“뭐야? 할 말 있어?”
“그렇게 바쁘면 이렇게 화낼 시간에 바쁜 일을 처리하러 가는 게 낫지 않아요?”
나디아가 쏘아붙이자 그는 더 화를 내기는커녕 눈을 빛내며 팔짱을 꼈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내려다보기에 그녀는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던 반박을 쏟아 내기로 했다.
“그리고 승마는 내가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당신이 멋대로 가르치겠다고 한 거면서 왜 자꾸 내 탓만….”
그의 손이 뒷덜미를 감싸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물리는 것과 동시에 입 안으로 혀가 파고 들어왔다. 나디아는 휘청거리다가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길게 늘어진 머리채를 잡는가 싶더니 손끝이 아주 부드럽게 머리카락 아래의 맨살을 쓰다듬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창 열을 내던 중에 말이 틀어 막히자 분이 났다. 나디아는 에드윈의 가슴팍을 밀고 어깨를 두드렸지만 돌덩이 같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나디아의 손목을 한 손에 붙잡아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더니 저 좋을 만큼 한껏 입 안을 탐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휘발되고 허리가 움찔거리고 숨이 차올라 도무지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쯤에야 에드윈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나디아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느라 그가 코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엔 찍소리도 못 하더니 이젠 내가 좀 편해졌나 보지? 쫑알거리긴.”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짧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귓가를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일어섰다. 나디아가 흠칫하자 에드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좋네. 노려보는 얼굴이 아주… 돋우는데.”
그가 들으라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나디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자 이번엔 쉽게 밀려져 나갔다. 에드윈은 질척이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섰다가 다시금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요즘은 안 만나나?”
“누굴요?”
“쿠르쉬드 말이야.”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친하지도 않은데.”
“얌전히 있어, 얌전히.”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기에 완전히 잊었구나 싶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디아는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최근에는 정말 그의 의심을 살 만한 일 따위는 눈곱만치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온한 일상 덕에 나른하게 몸을 휘감고 돌던 고양감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디아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
아실과 그녀를 한데 엮을 만한 것들은 이제 없었다. 말 몇 마디면 끝낼 수 있을 만큼 별 볼 일 없는 인연이었다. 그러니까 더는 불안해할 이유가….
나디아의 손이 배를 짚었다.
‘아니야. 이건…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녀는 갑작스럽게 초조해졌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떠난 후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와 서랍장을 뒤져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끈 팔찌를 꺼냈다. 이딴 것을 고이 모셔 둘 이유가 없었다.
성큼성큼 발코니 앞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망설일 틈도 없이 끈 팔찌를 밖으로 내던졌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걸로 끝이야.
홀가분해야 하는데, 오히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쓸쓸했다. 바람을 쐬기 위해 방을 나서자 그 모습을 본 하녀가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마님, 어디 가셔요?”
“혼자 바람 좀 쐬려고.”
“혼자 다니시면 위험한데, 제가….”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후원에 갈 거니까 괜찮아.”
완곡한 거절이라는 것을 알아챈 하녀가 더 이상 나디아를 붙잡지 않았다. 돌바닥에 그녀의 발소리만 타닥타닥 울렸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 하인들의 대부분은 주방 일에 매달렸다. 수많은 기사들을 먹일 음식을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처럼 주방과 멀리 떨어진 곳들은 조용했다. 나디아가 홀로 꽃향기를 맡으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 딱 좋을 만큼.
그녀는 푸른 수국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 관목 미로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잔가지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끔히 정리된 관목 미로 안에서는 항상 풀을 베어 낸 후에 나는 듯한 풀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안쪽으로 더 들어가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멈춰 섰다.
“나는, 기다려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단장이 되면 작위와 영지를 받게 돼. 그러면, 귀족 아가씨 한 명 정도는 내가 책임질 수 있을 테니까.”
나디아는 그가 한 말을 깊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원까지 오면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듯이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안심해야 할지 곤란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인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청혼을 하려고 했어. 부귀영화를 약속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까지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문이 막혔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마치 머리가 거부하는 것처럼 의미가 튕겨져 나갔다.
청혼이라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귀부인은 제게 물어보셨어야 했습니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바닥에 떨구고 있던 시선이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멋대로 오해하고, 말도 없이 떠나 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저를 믿으셨어야….”
그제야, 그가 밑도 끝도 없이 꺼내 놓았던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실은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지만 결국은 그저 스스로 낸 결론을 진실이라 믿고 두려워 도망쳤던 그 일을.
나디아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