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마법사들이 정신을 잃은 에드윈에게 어떻게든 먹이려 애쓰던 약은 강한 수면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약의 주된 효과는 잃은 피를 빠르게 보충하는 것이었지만 피를 보충하는 것만큼이나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 역시 중요했기 때문에 쭉 수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에드윈의 성격상 의식을 찾으면 가만히 누워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말은 속삭이듯이 덧붙였다.
나디아는 그에 동의했다. 그는 일중독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많은 일을 했다. 그가 굳이 손대지 않아도 될 만한 일까지 해치우는 것을 보면 언듯 통제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드윈은 나흘은 더 지나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여전히 창백했고 그 짧은 시일 동안 뺨이 움푹 패어 버린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사람 꼴이라는 것에 안심했다.
거무튀튀한 고약을 붙인 상처는 제법 많이 아물었고 엉망진창이 되었다던 내장도 어느 정도 수습된 모양이다. 나디아는 괴짜들이라고만 생각했던 마법사들의 능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는 묽은 수프를 한 그릇 먹고 마법사가 건네는 약까지 챙긴 다음, 한결 편안한 얼굴로 황제가 돌아갔는지를 물었다. 나디아가 별다른 덧붙임 없이 돌아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희미하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표정을 읽기 어려운 남자였지만 지금의 그에게 평소와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기력은 없는 듯했다.
군말 없이 마법사들이 가져오는 약을 먹고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며 긴 수면을 취한 에드윈은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며칠이 지나자 침대를 벗어나는 건 모두가 만류했지만 적어도 높게 세운 쿠션에 기댄 채 한두 시간 밀린 업무를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디아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에드윈의 방에 들렀다. 에드윈은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굳이 그녀를 쫓아내거나 왜 왔느냐며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그만큼이나 나디아의 얼굴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최근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꿈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식은땀으로 젖은 채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면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최근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그녀의 정신 건강에 해가 된 걸지도 몰랐다. 자꾸만 에드윈이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방문하는 시간은 일정했으나 에드윈은 그렇지 않았다. 나디아가 방문했을 때 그는 자고 있기도 했고, 업무를 보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과 대화 중이기도 했다.
그녀는 문병을 핑계로 그의 방을 방문하면 조용히 차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치열하게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에게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에 대해 질문해도 좋을지.
먼저 인내심이 다한 것은 에드윈이었다. 그는 침상 위에 올려 두고 보던 서류를 모두 한쪽으로 치우더니 팔짱을 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랬지. 신경 쓰이게 자꾸 찾아오지 말고.”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민망함에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말의 내용을 떠올리자 머쓱했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나디아는 말이 나온 김에 망설이지 않고 이미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연습한 바 있는 질문을 입에 올렸다.
“당신이 활 맞은 거, 실수 아니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디아는 에드윈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에드윈이 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까슬하게 수염이 난 턱을 매만지며 나디아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그녀가 시선을 불편하게 느낄 때쯤이 되자 그제야 그는 여태 뜸을 들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가벼이 수긍했다.
“그래.”
이미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임에도 나디아는 그가 단호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디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에드윈이 빙글 웃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도 생사를 넘나든 장본인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을 수 있다니 놀라웠다. 역시 무언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이유가 있긴 한가요?”
나디아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비틀었다. 분명 황제를 향한 분노였지만 정작 받아 낸 이는 눈앞에 있는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의 피 냄새가 가득한 홀로 걸어 들어오던 황제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 고의였을 활에 맞았으면서도 에드윈의 얼굴에서는 분노나 괘씸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장난이나 심심풀이. 고작 그 정도의 이유로, 노예도 아닌 귀족에게 활을 쏠 수 있다는 것은 나디아의 기준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황제는 그리했다.
“있어. 내가 폐하의 뜻에 반했잖아.”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키우던 개가 자신을 막아서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분이라.”
순간 나디아는 그가 언제를 말하고 있는 건지 알아채고는 너무 놀라 크게 당황했다. 나디아를 범하려는 황제를 회유하던 그날 밤. 그 행동으로 인해 본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음 이미 알고도 나디아를 지켜 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알면서도 막아선 건가요?”
“너는 내 것이니까.”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나디아는 제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에드윈을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 웃음이 매달려 있는 걸 알아챈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그는 넋 나간 나디아의 얼굴을 보더니 낄낄 웃다가 상처가 당기는지 배를 부여잡았다.
“착각하지 마. 개라고 해도 갖고 놀던 장난감을 뺏으려 하면 이를 드러내는 법이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찰나라고는 하지만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그가 눈치챘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나디아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많았던 것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도 없이 방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뒤로 에드윈이 낮게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어. 곧 끝날 테니.”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궁금증보다 당장의 부끄러움이 더 컸다. 나디아는 흘끗 뒤를 살피는 것을 마지막으로 에드윈의 방을 떠났다.
***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착 가라앉았던 성안의 분위기는 에드윈이 무사히 회복하여 일어난 뒤로 서서히 정상 궤도로 돌아갔다.
이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활기찬 분위기가 흘렀지만, 나디아는 이전과는 달리 그 모든 게 살얼음이 언 호수 위를 걷듯이 위태하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녀가 정신적으로 몰려 있기에 그런 감상을 받은 것뿐일 수도 있다.
에드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후로 다시 성을 드나들기 시작한 남부 귀족들의 전령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집무실 창밖으로 날아가는 전서구, 한층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기사들과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다시 돌아온 용병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시점에 곧 끝날 거라던 에드윈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나디아는 밀라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프람 제도 인근에서 해적선이 나타났다나 봐요.”
“해적이요?”
“네.”
여인의 주름진 얼굴 위로 걱정의 기색이 서렸다. 나디아도 덩달아 심각한 얼굴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프람 제도는 랑카드와 가까웠다. 그 인근에 해적선이 나타났다면 무역 도시인 랑카드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용병들이 안 보였던 건 그 일 때문인 걸까? 깊은 생각으로 빠져 들어가려던 나디아를 건져 낸 것은 수잔이었다. 쟁반 가득 달콤한 디저트를 담아 온 하녀는 테이블 위로 접시를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얼른 드셔 보시라고 나디아를 유혹했다.
나디아는 어린 하녀의 잔망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차가운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 든 슈와 새빨간 체리 필링이 가득 든 파이 그리고 말랑하고 달콤한 복숭아를 듬뿍 얹은 연유 푸딩 등. 확실히 단것을 살찔 걱정 없이 먹고 나니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나디아는 귀여운 짓을 한 하녀의 입에 슈를 하나 물려 준 뒤 방을 빠져나왔다.
나디아는 최근 품 안에 손수건 한 장을 품고 다녔다. 아실에게 받았던 것이다. 깔끔하게 세탁을 했지만 직접 전해 주러 가기는 마음에 걸리고 우연히 마주치면 가볍게 건네주고 물러설 생각으로 지니고 다녔다.
원래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대로 가지기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실이 떠올라서 괴로워지는 물건이었다. 버리기는 마음에 걸리고 될 수 있으면 그에게 다시 떠넘기자는 생각이었지만 이 넓은 성안에서 기사 한 명을 우연히 마주치기란 그녀의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기사들과 동선이 겹치는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들은 기사 숙소와 연병장을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았고, 나디아 역시 본성과 후원을 다니는 것 외에는 방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손수건 따위야 하녀들을 시켜 전해 주면 그만이라는 해답을 애써 외면하던 나디아는 아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한 번이라도 더 에드윈의 눈에 띄면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생각하자 그제야 해답을 따를 마음이 들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가던 나디아는 정말 우연히도 에드윈과 마주쳤다. 에드윈의 뺨에는 혈색이 돌아왔고 걸음걸이에도 불편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옆구리에 커다랗고 흉측한 흉터가 남긴 했지만.
나디아는 그날 이후로 우연이라도 에드윈을 마주하게 되면 그가 괜찮아 보이는지를 가장 먼저 살피게 되었다.
지나치게 피를 흘려 파리해진 얼굴에 맺히는 식은땀과 목을 쥐어짜며 토해 내는 듯한 비명 소리와 입가를 흠뻑 적시던 검붉은 피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했다. 그가 이렇게 멀쩡한 얼굴로 걸어 다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에드윈의 곁에는 행정관 몇이 붙어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걸음이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서너 걸음 떨어졌을 때 그가 나디아를 불러 세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덜컹거렸다.
“내일 일어나는 대로 나한테 와.”
나디아가 재빠르게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저만치 가 버렸다. 일방적은 부름을 받을 만한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던 그녀는 어리둥절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부르던 일이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쉬이 납득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밀린 일을 해치우느라 그녀를 상대해 줄 시간도 없는 듯하더니 이제 여유가 좀 나는가 보다, 그리 여길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그녀를 불러낼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가슴이 술렁거리는 게 기대감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나디아는 지금껏 에드윈이 그녀를 불러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정사로 이어졌던 것을 떠올리자니 술렁임도 잦아들었다.
그녀는 침울해진 표정을 깨닫지 못한 채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