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36화 (36/115)

36.

에드윈이 황제의 화살에 맞았다는 이야기는 금세 성안에 퍼져 나갔다. 소문이 성 바깥까지 흘러 나가는 것은 곤란했기에 모두 입단속을 시켰지만 쉬쉬하면서도 성안의 사람이 둘만 모였다 하면 그 이야기가 도마에 오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돌아가는 날에도 에드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법사들이 회복 마법을 퍼부었으나 그의 상처를 완벽하게 낫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흘린 피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치료사와 마법사들은 며칠간 내내 그의 곁을 지키며 호흡이 느려지거나 체온이 내려가지는 않는지를 살피며 목숨을 위태롭게 했던 상처의 경과를 살폈다.

기절한 후에 자신의 침실에서 눈을 뜬 나디아를 마법사가 찾아왔다. 그가 설명하기로는 목숨이 위험할 만큼 큰 상처를 마법으로 완전히 회복을 시키는 것은 수명에 지장이 가는 일이라 했다. 그들은 그저 피가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만 간신히 이어 붙여 놓았을 뿐이니 기나긴 잠과 효과 좋은 약과 휴식이 필요할 것이라 덧붙였다.

정말로 목숨이 위험했다는 말에 나디아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지만 마법사는 깐깐해 보이는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에드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황제의 배웅은 나디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밀라의 도움으로 어수선한 성안 분위기를 수습하고 황제의 귀환 준비를 도왔다.

연기를 할 생각조차 그만뒀는지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깃들지 않은 얼굴을 한 황제가 쾌활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는 아랫것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나디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추잡스러울 만치 집요하게 뺨을 핥았다. 혐오감에 가늘게 떨면서도 그 행동을 참아 내고 있는 나디아의 반응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황제를 참아 내는 동안 하인들과 기사들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디아는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에 입 맞추지 않은 게 어디냐는 터무니없는 위안을 되뇌며 그의 행동을 묵인해야 했다. 이 자리의 누구도 그의 행동을 만류하지 못했다.

“맛을 못 보고 가는 게 아쉽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렇지 않나, 부인?”

그가 작게 속삭이더니 나디아의 목을 콱 깨물었다. 짙푸른 드레스와 대비되어 평소보다 더욱 창백해 보이는 피부 위로 붉게 남은 잇자국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으나 황제가 두고 보지 않았다. 그는 더 강하게 나디아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불룩한 배를 쓰다듬었다.

혐오감이 강하게 일었다. 나디아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황제는 한참이나 나디아를 주물럭거리다가 기사가 이제 그만 출발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환대해 주어 고마웠네. 그러고 보니 사냥 내기의 승자는 나로군. 엘란츠 후작을 잡았으니 이 얼마나 커다란 사냥감이란 말인가.”

그가 껄껄 웃자 그의 기사들이 호응하듯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러는 내내 엘란츠 성의 사람들은 희미한 미소 한 조각 입에 걸지 않았다. 나디아 역시 예의상 짓곤 하던 미소마저 짓지 않았다.

황제는 싸늘한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옆에 제 기사를 세워 둔 채 나디아에게 모욕적인 작별 인사를 계속했다.

“겨울에 에드윈이 수도로 올라올 때 함께 오는 건 어떤가? 그대에게 황제의 침실에서 밤을 보낼 기회를 주겠네. 침실이 싫다면 황궁 복도나 정원도 좋아.”

황제의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혹은 이 모든 게 제 딴엔 농담이라 지껄이는 것인지 진담인 것인지, 그녀는 조금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 대한 존중을 완전히 버린 듯했는데 무엇이 발화점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디아의 마음속에 에드윈에 대한 동정심이 차올랐다. 그는 매번 이런 작자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황제는 다시 한번 재촉하는 기사의 부름을 듣고서야 질기게 붙어 있던 걸음을 떼었다. 그는 미적거리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말에 올라탔고 더 지체하는 일 없이 길을 떠났다.

요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고 난 뒤 엘란츠 성의 홀은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맴돌았다. 기사와 하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홀을 떠났다.

나디아는 잦아드는 발소리들을 들으며 그저 멍하니 매끈한 대리석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녀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두 남자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거늘. 황량한 마음속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모두가 떠나 한동안 잠잠했던 공간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디아는 제 앞에 멈춰 선 가죽 장화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제는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지는, 과거. 그녀와 아실이 연인이었던 때에, 그에게 빌려 주었던 손수건이었다. 나디아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받아 들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한 손을 들킬까 봐였다.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잔상이 남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것을 태연하게 넘기기가 너무도 힘이 들었다.

한참이나 손수건을 내밀고 있던 아실은 결국 제 손으로 나디아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의 손길에 끈끈하게 남아 있던 불쾌함마저 닦여 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라도 위안받고 싶었던 나디아는 당장이라도 그의 품으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삼켰다.

아무리 힘들어도 상대를 가려야 할 일이었다. 목울대가 긁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꼼꼼하게 뺨을 닦고 있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스쳤다. 나디아는 미모사처럼 움츠러들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고마워요, 쿠르쉬드 경.”

너무도 작은 목소리라 그에게 제대로 전해졌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뒤돌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디아는 문에 기대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숨이 막혔다. 그녀는 헉헉거리며 목구멍을 틀어막는 숨을 뱉어 내기 위해 가슴을 두드렸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공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디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고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건지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결국 생각이 다다르는 곳은 어쩌다 이렇게 됐는가 하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후회와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이었다.

느닷없이 배가 쥐어짜듯이 아파 왔다.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침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걷다가 결국 도달하지 못하고 양탄자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졌다.

***

누군가의 비명과 소란스러움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던 나디아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나,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한 다음 날 오후였다.

뺨에 닿아 오는 찬기에 눈을 뜬 그녀는 물수건으로 뺨을 닦아 주던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수잔의 얼굴이 곧 울어 버릴 것처럼 일그러지나 싶더니….

“마님!”

그리 소리쳐 부르고는 이내 엉엉 울어 버렸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문이 벌컥 열리며, 마치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밀라와 타샤가 뛰어 들어왔다.

인사할 새도 없이 서두르는 기색의 마법사가 들고 있던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틈틈이 나디아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여전히 통증이 있으신가요?”

“…어떻게 된 거예요?”

나디아는 멍한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밀라의 저지에 다시 누웠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봤다가 곁에서 엉망으로 울고 있는 수잔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꼭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슬프게 울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밀라의 손길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새하얗게 질린 나디아의 얼굴을 보며 모두가 당황했다.

“에드윈이 잘못됐나요?”

“지금 누구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각하 곁에는 이미 마법사들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있으니 지하 세계에 가려다가도 붙잡혀 오실 겁니다.”

그녀가 주머니 안에서 마른 약초 다발과 알 수 없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며 기가 차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마법사의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들으면서 나디아는 안심했다. 에드윈의 치료를 지켜보면서 했던 온갖 불행한 상상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타샤는 나디아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작은 돌절구를 꺼내 마른 약초를 빻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주머니 어디에서 절구가 튀어나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제야 나디아는 정신을 잃기 전에 느꼈던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떠올렸다. 미미한 통증은 남아 있었지만 그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약간 아파요.”

“드십시오.”

한참 무언가를 빻고 짜고 법석이던 마법사가 이내 손바닥만 한 그릇을 내밀었다. 나무 그릇에 담긴 검붉은 액체를 바라보던 나디아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옆에서 무얼 하는지 다 보았는데도 거부감부터 들 만한 색이었다.

마치 피 같기도 하고. 피라면 이미 질리도록 본 참이었다. 타샤가 다시 한번 그릇을 내밀며 그녀를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이상한 거 안 들어갔습니다. 몸에 좋은 거예요.”

나디아는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은 받아 들었다. 그리고 무언으로 재촉하는 마법사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약을 마셨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약은 약간 달짝지근했으며 걸쭉해 보였던 것과 달리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밀라가 빈 그릇을 받아 가며 냅킨을 내밀었다.

“하혈이 있었습니다. 조금 위험했어요.”

타샤의 말이 이어지자 저만치에서 수잔이 다시 어헝, 하고 울음을 터트리고는 눈치를 보며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깔려 있던 양탄자가 바뀌었다.

이상했다. 마치 남의 일을 전해 들은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타샤는 놀라지 않는 나디아의 모습을 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푹 쉬는 것이 중요하다고 몇 번인가 강조하고는 돌아갔다.

나디아는 방 안에 홀로 남은 채 멍하니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잘못되어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웅크린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기가 들었다. 그녀는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며 침대로 파고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