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35화 (35/115)

35.

황제와는 사이가 좋은 것이 아니었나? 좋은 군신 관계라 알고 있던 생각이 뒤흔들렸다.

실수겠지.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신하의 옆구리에 고의로 화살을 박을 리는 없지 않나. 그냥 신하도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고종 사촌, 그리고 실제로는 이복형제….

‘설마, 일부러…?’

한발 늦게 황제는 황위를 빼앗기 위해 제 친형제들마저도 도륙 낸 자라는 것이 떠올랐다. 주위의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간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나디아가 에드윈을 업은 기사의 뒤를 따라가려는 찰나, 황제가 탄 말이 도착했다. 예상한 대로 황제의 미끈한 얼굴에서 당황이나 미안한 기색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엘하임에 처음 도착했던 날처럼 쾌활한 얼굴로 말에서 내린 그는 기다리고 있던 시종에게 활과 화살통을 건넸다. 그 화살통 안에 담긴 화살들과 에드윈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것이 같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 된 나디아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홀로 걸어 들어오던 황제와 나디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황제의 얼굴 위로 침통함이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마주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훌륭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듯 표정이 내려앉는 것을 목격한 나디아는 속지 않았다.

“에드윈은 좀 어떤가?”

“…지금 보러 가려던 차였습니다.”

나디아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동요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가증스럽게 걱정하는 척은 그만두고 자리를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뻔뻔하게 나디아의 어깨를 감싸 왔다.

“잘됐군. 나도 그러려던 참이니 같이 가도록 하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황제의 손을 쳐 내고 싶었지만, 그저 생각으로 그칠 뿐이었다. 나디아로서는 잘 지내던 사촌에게 화살을 박을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죽이고 싶었던 거라면 제 형제들을 죽였을 때가 가장 적합하지 않은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어쩌면 에드윈을 죽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형제를 잔인하게 죽인 것으로 황제의 평판이나 지지 기반은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 황태자를 지지했던 북부 귀족들은 사실상 등을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다른 귀족들의 태도 역시 뜨뜻미지근했다.

그의 찬탈 행위로 강력했던 황권이 약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외려 명분도 없이 대귀족을 죽여 버린다면 황제를 따를 자는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에드윈을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을 만큼 괴롭게 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도대체 왜?

두 사람은 금방 의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시에 탑에서 급하게 달려온 듯 마법사들 여럿이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더니 급하게 치료사들이 붙어 있는 침상으로 향했다.

하인들이 물을 끓이고 깨끗한 천을 가져오느라 수선스러운 공간에서 나디아와 황제는 그저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나디아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얌전히 되돌아 나올 생각이었지만 황제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상태가 어떻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묻는 황제는 당당했다. 나디아는 기가 막혔다. 치료사 한 명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폐하. 화살을 뽑아야 하는데, 맹수 사냥용이라 끝부분에 갈고리가 달려 있어서 이대로 뽑으면 출혈이 심할 것 같습니다. 이 이상 피를 흘리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 그래서….”

치료사가 연신 침상을 곁눈질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얼마나 상태가 심각한 것인지 확 와닿았다.

나디아는 문 안쪽을 초조하게 건너다봤다. 그녀를 곤란하게 하기를 즐기고 폭언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몇 달간 부대끼며 살았다고 걱정이 됐다. 화살이 아주 흉악해 보이더라니, 역시 맹수 사냥용이었구나. 그런 것을 옆구리에 두 대나 맞다니. 손이 차게 식었다.

만일, 만일 일이 잘못되어 그가 이대로 죽어 버리기도 하면… 덜컥 겁이 났다. 그녀를 매번 끝도 없는 불안에 떨게 하는 남자인 반면 그녀의 유일한 방패막이였다.

하지만 그가 없다면 나디아는 맨몸으로 버티고 서야 했다.

무엇이 부딪쳐 올지 모르는 세상을 혼자서 감당해 낼 자신이 없다.

나디아는 새삼 그가 얼마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지 깨달았다. 그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그게 솔직한 내심이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끝도 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춰 세운 것은 익숙한 마법사의 목소리였다. 소맷자락에 피 자국이 낭자한 마법사가 피곤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디아는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마법사가 그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는 치료사들이 항아리에 든 것을 끓이고 무언가를 빻고 섞는 등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공기 중으로 무언가 매콤한 냄새와 함께 짙은 풀 냄새가 퍼졌다. 나이 든 마법사는 몇 번인가 기침을 하더니 반쯤 쉰 목소리로 대략적인 설명을 늘어놓았다.

“곧 화살을 뽑아낼 것입니다. 내장이 상당히 상해서… 통증을 덜어 줄 마비약을 충분히 드시게 했으나, 출혈이 많아 약기운이 잘 돌지가 않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강행하겠지만 귀부인께서 보실 만한 광경은 아닐 겁니다.”

“…심각한가요?”

마법사는 말을 아꼈지만 얼굴 위로 감도는 비장함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디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이나 불안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태평한 낯으로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하녀들에게 술을 가져오라며 뻔뻔하게 굴고 있는 황제를 있는 힘껏 후려치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숨이 다 가빴다. 제 안의 어디에 이런 흉포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디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섰다. 하지만 마법사가 한 말대로 방으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안해서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서둘러 침상으로 다가가고 그사이에 불려 온 기사 두 명이 그들의 지시에 따라 맥없이 늘어진 에드윈의 팔다리를 짓눌렀다.

얼핏 드러난 그의 얼굴은 홀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욱 창백했다. 놀라운 정신력으로 간신히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의 악문 잇새로 쇳소리에 가까운 거친 숨이 가쁘게 흘러나왔다.

마법사는 그녀가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나디아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선 채, 피비린내로 가득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체격이 가장 좋아 보이는 남자 마법사 하나가 튀어나온 화살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기사들과 시선을 교환한 그가 일견 무지막지해 보이는 동작으로 조금 느릿하게 화살을 잡아 뽑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늘어져 있던 에드윈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기사들이 그를 붙잡아 누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간신히 숨만 쉬는 것처럼 보였던 남자의 몸이 고통을 참지 못해 몇 번이고 들썩거렸다. 에드윈의 입으로 쿨럭이며 피가 역류했다. 그리고 침상 아래로 무서울 만큼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피비린내가 자욱해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기사들이 몸부림치려는 그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마법사가 완전히 뽑아낸 화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두 번째 화살을 붙잡았다.

요란스러운 쨍강 소리와 함께 떨어진 화살은 맹수 잡이라는 용도에 걸맞게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일곱 갈래로 갈라진 날카롭고 둥글게 휜 갈고리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쉬이 뽑히지 않게 만든 것이 분명한 모양새였다. 그의 환부를 직접 보지 않아도 난자당한 것 못지않게 너덜너덜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자꾸만 울컥거리며 피를 토해 내는 에드윈의 입가로 어떻게든 약을 삼키게 하려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드셔야 합니다. 각하, 삼키셔야….”

“지혈제를 더 가져와!”

“각하,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그들이 쉴 새 없이 내뱉는 목소리를 에드윈이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법사들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며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에드윈의 하얀 목을 타고 검붉은 피와 어두운 녹색을 띠는 약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는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그가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빙글빙글 웃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하녀가 가져다준 술을 홀짝이며 무감각한 눈으로 수라장을 응시하는 모습은 그것대로 소름 끼쳤다.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디아의 등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그녀는 숨조차 쉬이 내쉴 수 없었다.

거대하고 누구도 함부로 여길 엄두조차 낼 수 없으리라 여겼던 남자의 이런 모습은, 마음속 어딘가의 딱딱한 부분을 물러지게 했다. 시야가 흐려진다 싶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또 한 번, 피에 젖은 화살이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서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달려들어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에드윈은 기절한 듯이 축 늘어졌고 기사들이 지친 기색으로 물러났다.

약초를 빻고 약을 끓이던 치료사들은 쉴 새 없이 새 약이 든 대접을 건네주었고 약을 받아 든 이들은 빠져나간 피 대신 약이 돌게 하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에드윈의 입 안에 약을 흘려 넣었다. 반은 삼키고 반은 흘러내렸지만 그래서 더욱 그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시며 바닥으로 흘러내리던 피가 천천히 멎고, 치유 마법을 집중적으로 받은 상처 부위가 어느 정도 아물자 마법사들이 한숨 돌렸다는 듯 이마의 진땀을 닦아 냈다.

한껏 날이 섰던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나디아의 손마저 진땀이 흥건했다.

에드윈은 죽지 않았고 가장 위험했던 상황이 일단락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정신이 아뜩해졌다. 휘청거리는 나디아의 어깨를 붙잡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기사들 중 하나겠지. 그녀는 안심하며 쓰러졌다.

뒤로 넘어가며 얼핏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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