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가 여기까지 따라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디아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취한 듯, 마주친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허리를 감싸 쥐었던 손이 꿈틀거리며 자꾸만 위로 올라왔다. 막으려고 붙잡고 당겨도, 그만두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커다랗고 거친 손이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통증에 나디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흠칫 튀어 올랐다.
어떻게 해야 그의 손을 털어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밀어내도 화를 내지는 않을지, 화를 낸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이런 것은 아무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사내가 강제로 탐하려 하면 거절하는 것이 맞지만 그 사내가 황제여도 해당되는 대처인가? 머리가 바쁘게 뱅글뱅글 돌았지만 무엇 하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더니 나디아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나.”
나른하게 속삭이면서도 쉴 새 없이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나디아는 계속해서 몸을 움츠려야 했다. 에드윈이 나와 주었으면 했다. 여기서 황제를 저지할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아니, 그녀도 충분히 황제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지고한 제국의 황제라 하여도 귀부인을, 그것도 다른 대귀족의 부인을 함부로 취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짝바짝 말라붙는 입술을 축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애써 끌어냈다.
“…무례하십니다. 노, 놓아주세요.”
“무례? 우습군.”
그가 비웃으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다리가 무력하게 벌어지고 그 사이로 황제가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가 불룩하게 솟은 부분을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문질러 왔다.
나디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어둡다고는 했지만 누구든 지나갈 수 있는 회랑이었다. 황제는 조금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에드윈의 것은 다 내 것이지. 여자도 마찬가지야. 닳고 닳았을 텐데 빼지 말지 그래.”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그리고 황제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알 텐데 에드윈이 나와 보지 않은 것은 그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황제의 말은 이전에도 에드윈과 여자를 공유해 보았다는 뉘앙스였다.
황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고 있나? 임신한 계집은 맛이 달라서 좋다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랐다. 홀로 나오지 말 것을. 나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텅 빈 회랑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어둠에 잠긴 통로를 내다보았다. 황제도 발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대리석 기둥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발소리의 주인을 비췄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울먹이며 그를 불렀다.
“에드윈….”
뺨만큼이나 눈물에 흠뻑 젖은 목소리였다. 최악의 상황을 의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사람 역시 그뿐이었다.
에드윈이 느린 걸음으로, 하지만 막힘없이 걸어왔다. 그리고 지척에 멈춰 선 그가 황제의 행동을 만류하듯이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황제가 매우 언짢은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다 이내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형님, 이런 곳에 계셨군요.”
“이런, 딱 걸려 버렸군. 자네 없이 부인 맛을 좀 보려던 참이야.”
에드윈이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선량한 얼굴로 마주 웃으며 황제의 손을 잡아끌었다. 취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손길에 순순히 따른 황제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몸을 벽으로 밀어붙이던 압박감 역시 사라졌다.
그제야 나디아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나디아는 그녀가 이 자리를 떠나도 좋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황제와 에드윈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좀 더 구미가 당기실 만한 걸 준비했습니다.”
“나는 이게 먹고 싶은데.”
황제의 거친 손끝이 나디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긴장해 몸을 굳히며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드시라며 그녀를 황제에게 던져 주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까지 에드윈이 그녀를 대하던 방식을 떠올려 보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그녀를 보호해 줄 리가 없었다.
에드윈의 입가에 뾰족한 웃음이 걸렸다.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 나디아에게 머물렀다가 지나갔다.
“다음에 드시죠.”
“이걸 처리해 줄 다른 걸 준비했나 보지?”
황제가 여전히 불룩하게 치솟은 제 아랫도리를 눈짓하며 말했다. 에드윈이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황제가 두 손을 치켜들며 물러났다. 그는 집요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조금의 미련도 없는 사람마냥 뒤돌아 걸어갔다.
언제 따라 나온 것인지 불쑥 나타난 시종이 황제를 어딘가로 이끌자, 얼굴 가득 띠고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거칠게 나디아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그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멍청한 건지, 일부러 약 올리려는 건지 모르겠군.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한 걸 잊었나? 내 말이 우스워?”
“나, 나는…!”
최근에 용병들이 잠잠하기에 조금 마음을 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나디아는 무어라 변명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에드윈이 코가 닿을 만큼 얼굴을 들이민 채 윽박질렀다.
“입 닥치고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 있어.”
에드윈은 제 할 말만 씹어뱉듯이 던지고는 멱살 잡았던 손을 놓았다. 천에 거칠게 쓸려 따끔거리는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떨고 있는 나디아를 향해 그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위를 가리켰다. 방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디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린 탓이었다.
그다음 날, 술 냄새를 풍기지 않는 말짱한 낯의 황제는 나디아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전날 밤에는 사과라고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을 것처럼 거침없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사과를 하는데 거부할 배짱은 없었다. 나디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에드윈처럼 변덕쟁이라면 그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태도가 또 돌변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디아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저녁 연회에 나가지 않았다. 에드윈 또한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도 그녀의 방까지 찾아오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되뇌면서도 내심 덜덜 떨던 것도 하루가 지나자 좀 안심이 되었다. 황제도 많이 취해서 그랬던 거겠지. 그녀는 어느새 황제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두 남자는 한동안 사냥에만 집중하는 듯했다. 그들이 잡아 온 사냥물로 성 뒤편 공터에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리고 황제가 돌아가기로 한 날을 하루 남겨 둔 시점에 일이 터졌다.
낯선 사람이 확 늘어난 탓에 북적거리긴 했지만 눈에 띄게 소란스러워진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궁금증에 어수선한 홀로 나간 나디아는 소란의 진원을 찾아내고는 얼어붙은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늘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쓸고 닦아 놓았던 홀 바닥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그제야 나디아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사냥으로 죽어 나간 짐승들이 실려 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덩치가 커다란 기사의 등에 축 늘어진 채로 업혀 있는 것은 바로 에드윈이었다. 그의 감청색 사냥복의 허리 부분이 짙은 색으로 젖어, 지독할 정도의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에드윈 엘란츠. 평소처럼 절대 무너질 일이 없을 법한 여유를 두른 채 비뚤게 웃는 얼굴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부터 하얗던 얼굴이 지금은 푸른기가 돌 정도로 창백했다.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미간이 아니었다면 나디아는 영락없이 그가 이미 죽어 버린 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보다도 시선을 끄는 것은 옆구리에 박혀 있는, 보기만 해도 끔찍하리만치 커다란 화살이었다. 한 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개나 박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길이나 굵기를 보자니 대체 몸 안으로 박힌 부분은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이내 대체 어쩌다 저런 것을 몸에 맞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나디아의 시야로 화살 깃에 새겨진 선명한 황제의 문양이 보였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기사의 곁으로 달려갔으나 차마 에드윈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치, 치료사, 치료사를….”
충격을 받아 휘청거리며 중얼거린 말을 용케 주워들은 하녀 한 명이 후다닥 탑 방향으로 달려갔다.
수잔이 빠르게 나디아의 팔을 붙잡으며 부축해 왔다. 에드윈은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냉정한 사고를 하기는 어려운지 기사의 어깨를 꽉 부여잡은 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숨길 수 없는 고통으로 엉망이었다.
나디아는 간신히 넋을 수습한 다음, 그를 업고 있는 기사를 재촉하여 하녀의 뒤를 따르게 했다. 그리고 함께 사냥터로 향했던 다른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폐하께서 늑대로 착각을 하셔서….”
그리 말하는 기사는 자못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이를 갈았다.
늑대라니. 이 숲에는 늑대가 살지 않는다. 주변에 서 있던 하인들이 곤란한 듯 시선을 피했다. 나디아는 경악하며 바닥을 온통 더럽힌 핏방울을 내려다보았다. 말의 내용으로 보나 기사의 표정으로 보나 하인들의 반응을 보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심히 미심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