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하자 황궁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다. 황제의 방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잊힐 뻔했던 밀라의 말이 떠올랐다. 가을이면 사냥을 즐기러 내려온다고 했던가.
에드윈이 보여 준 황제의 친서에는 휘갈겼지만 우아함이 느껴지는 필체로 잠시 머물다 갈 예정이니 요란스레 준비할 필요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올해는 예년보다 빠르다는 말이 반짝 돌아다니더니 금세 잦아들었다.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찧을 시간도 없이 일거리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수행원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디아는 인원을 모르는데 어떻게 준비하냐고 물었지만 밀라는 언제나 그랬다며 곤란한 얼굴로 웃을 따름이었다.
규모를 모르기 때문에 성안의 모든 방을 정리해야 했다. 하녀고 하인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침대 시트는 물론이고 커튼과 양탄자까지 모두 걷어 세탁하고,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고, 창을 닦고 가구에 윤을 내느라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내내 맑아 빨래는 금방금방 말랐다.
성이 내내 분주한데 나디아라고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것이 기꺼웠다.
이제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한 터라 조금만 움직여도 쉬이 피곤해졌지만 나디아는 오전 내내 성 곳곳을 돌며 야단을 떨었다.
아실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드윈도 요즘은 잠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평안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하던 그 순간부터 한순간도 곁을 떠난 적 없던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같았기에 하녀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일을 찾아다녔다. 그나마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몸이 축 늘어질 만큼 지쳐 버렸지만 원하던 결과였기에 그녀는 만족했다.
나디아는 반쯤 졸면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입덧이 줄었고 식욕이 확 늘었다.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기름진 음식들이 당겼다.
식사 후에 바로 눕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침대 위에 늘어졌다. 하녀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녀는 반쯤 잠에 잠긴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황제, 율리안 1세는 도착 예정일을 이틀이나 넘겨서 도착했다. 요란한 코펠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제의 행렬을 보러 나온 영지 주민들로 대로가 가득했다.
황금빛 사자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기사들이 앞서고 그 뒤로 찬란한 백금 갑옷과 붉은 천에 금색 실로 황가의 문양이 수놓인 망토를 늘어트린 황제가 손을 흔들었다. 요란하게 준비하지 말라고 하더니 실로 요란스러운 등장이었다.
나디아는 황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며 요란스레 준비하던 밀라의 말에 얌전히 따르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껏 치장한 채 에드윈과 나란히 성 앞에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에드윈을 친근한 손길로 일으켜 세우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끌어안았다. 차갑게만 보이던 눈이 웃음을 머금자 보기 좋게 휘어졌다.
“에드윈!”
“폐하.”
“형님이라 부르라고 했잖은가.”
황제와 에드윈은 둘도 없는 절친한 친우처럼 보였다. 심술 맞은 것은 집안 내력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사람 좋다는 듯 웃고 있는 황제의 얼굴도 꾸며 낸 것일 테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황제의 사생아야.”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듯 집요했던 시선까지 느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기 두 사람은 이복형제인 셈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질 뻔했지만 나디아는 간신히 표정을 수습했다.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넘어왔다. 나디아는 태연을 가장해 치맛자락을 잡은 채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엘란츠 부인.”
황제가 나디아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다른 귀족들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닿았다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황제는 지나치리만치 강하게 그리고 오래 입술을 짓눌렀다.
그러고는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혀가 손등을 핥았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황제의 손아귀 힘이 너무 강했다. 나디아의 당황을 눈치챘는지 제 입술을 핥는 그의 푸른 눈 위로 즐거움이 깃들었다.
황제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디아는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황제의 외견은 에드윈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굳이 닮은 곳을 찾자면 명도가 다른 금발과 체격 정도였다.
“내려올 때마다 홀로 서 있는 게 안타까웠는데, 보기 좋군. 아이를 가졌다지? 축하하네. 선물을 가져왔어.”
그가 대충 손짓했다. 기사들의 뒤쪽으로 짐을 가득 실은 채 줄지어 들어오는 마차들이 보였다. 그 이후, 황제의 시선이 나디아의 아랫배에 길게 머물렀다.
그녀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황제의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감추듯이 에드윈이 앞을 막아서며 요령 좋게 그를 구슬렸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형님.”
“그거 좋지.”
황제는 네 수작에 넘어가 주겠다는 듯이 쉽게 몸을 돌렸다. 궁에서 따라온 시종들이 집사의 뒤를 부리나케 쫓아가고, 황제 역시 에드윈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을 잔뜩 굳히고 있던 나디아는 뒤늦게 숨을 내쉬었다. 성에서 봤을 때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때는 기품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만큼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디아는 밀라에게 황제의 손님들을 부족함 없이 대접하라 이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가슴속이 자꾸만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술렁거렸다. 그동안 불안에 관해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기묘했다.
그가 머무는 기간은 기껏해야 일주일 남짓이었다. 매년 그 기간 내내 사냥을 하다 가곤 했다고 했으니 이번도 그럴 것이다. 나디아가 그를 마주할 시간은 식사 시간 정도겠지.
황제의 수행원은 작은 기사단 한 부대 정도의 규모였다. 정예 기사 스무 명과 그들의 종 기사, 마법사 두엇과 시종 등으로 구성된 60여 명의 인원은 미리 준비해 둔 방에 무리 없이 배정되었다. 마구간의 수많은 말들 사이에 그들이 데려온 준마들이 더해졌다.
그날 저녁, 나디아가 엘란츠 성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열흘이 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온 황제와 기사들은 기름진 음식과 값비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여독을 풀었다.
연회 내내 상석에 앉은 황제의 시선이 나디아를 핥듯이 그녀의 몸 위를 배회했다. 나디아는 음식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내내 얼어 있어야 했다.
제가 그새 무언가 밉보이기라도 했던가? 될 수 있으면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몇 번인가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면 황제가 별 의도는 없다는 듯이 사르르 웃었다. 나디아 역시 그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와 에드윈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큰 사냥감을 잡는 이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내기를 하고 있었다.
사냥을 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그 두 사람뿐이었지만 작은 여흥을 두는 것이 동기 부여에 좋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사냥에 문외한인 나디아는 그들의 대화에 끼기 어려웠으므로 그저 에드윈의 옆에 앉은 채로 인형처럼 웃음만 흘릴 따름이었다.
그날 밤, 에드윈은 나디아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불러 오는 배를 의식한 듯 답지 않게 부드러운 행위였다. 그가 목덜미며 쇄골 위나, 손목 안쪽 등 옷으로 가릴 수 없는 곳에 자국을 잔뜩 남겨 놓은 탓에 늦은 오전에 일어난 나디아는 당황해 울상을 지어야 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황제와 에드윈은 새벽같이 성 뒤편의 넓은 숲으로 사냥을 나섰다고 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피비린내를 흠뻑 묻히고 돌아온 그들은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나무 수레에 뿔이 커다란 엘크나 검은 여우 따위가 실려 왔지만 그것들은 그들 기준에 괜찮은 수확물 축에 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사내들이란. 나디아는 혀를 차며 피비린내 나는 사체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검은 여우 털로 망토를 장식하면 보기 좋을 거야.”
에드윈이 나디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제법 좋아 보이는 그의 기분에 맞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에드윈은 나디아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날 밤도 황제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은근하게 전신을 훑어 내리는 황제의 시선도 여전했다. 나디아는 이제야 그 시선이 뜻하는 바를 눈치채고는 당황했다. 애욕이 담긴 눈빛이었다.
대체 왜? 여기까지 내려와서 하는 짓이라는 게 고작 사촌 동생의 아내를 탐내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는 당혹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완곡히 거절을 표현했지만, 집요한 시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디아는 에드윈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건지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저 술잔만 기울일 따름이었다.
결국 나디아는 조금 이르게 자리를 떴다. 조금 체증이 이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회랑을 걷던 그녀는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하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뒤늦게 쫓아온 하녀겠거니, 안심했던 마음은 커다란 손이 허리께를 파고 들어오자 덜컥였다. 이리 대담하게 스킨십을 할 만한 사람은 에드윈뿐이었지만 그녀는 손의 주인이 에드윈이 아닌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냄새가 달랐다.
“폐, 폐하.”
나디아는 무례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만 남자의 가슴을 밀어내며 낯선 품에 폭 안기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에게서는 옅은 피 냄새와 함께 포도주 그리고 사향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