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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32화 (32/115)

32.

흔쾌히 들어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 얼굴을 봐서라도 적어도 고민하는 티는 낼 줄 알았다.

그러면 이제 어디에 부탁을 한담. 역시 밀라에게 가야 할 모양이었다. 수잔이 혼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지만 그런 효과가 있는 약초가 있긴 합니다.”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가던 생각에 마법사가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건조한 얼굴로 책을 뒤져 약초의 모습이 그려진 삽화를 보여 주더니 마구간 뒤뜰에 잔뜩 있다며 위치까지 알려 주었다.

어린잎을 따 한 번 닦은 다음 차를 끓여 마시라는 말까지 귀담아 들은 수잔이 머쓱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고 배앓이를 하게 되면 찾아오세요. 배앓이 약은 만들 수 있습니다.”

수잔이 눈물마저 글썽이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나디아는 하녀와 함께 방을 나선 뒤 그녀를 먼저 보냈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마님을 홀로 다니시게 할 수는 없다며 따르겠다는 것을 기어코 돌려보냈다. 몇 번이고 뒤돌아보던 하녀는 이내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신경을 쏟을 것이 사라지자 다시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디아는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배 위로 손을 얹었다.

살이 좀 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크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심하던 입덧은 타샤의 약으로 가라앉았지만 때때로 기분이 오락가락하거나 두통이 자주 일었다. 이것이 임신과 관련된 증상인지, 그저 예민해진 감정 때문인지 긴가민가했다.

입덧이 가시자 식욕이 두 배쯤 늘어난 것과 허리선이 좀 변한 것만이, 정말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구나, 하는 희미한 감상을 느끼게 했다. 그러고 보니 가슴도 좀 커진 것 같고.

제 가슴을 쥐어 보던 나디아는 휘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뗐다. 그녀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만져 줄 사람이 필요하신가, 귀부인?”

몇 걸음 떨어진 곳의 나무 그늘 아래 차림새가 단정치 못한 사내 몇이 늘어져 모여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발치로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나디아는 그들이 지껄인 말이 정말 저를 향한 것인지 의심해야 했다. 하지만 주위에 귀부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그녀뿐이었으므로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디아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졌다. 이래서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던 거였군. 하녀들을 줄줄이 달고 왔다면 그네들이 대신 화를 내 줬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디아는 직접 말을 해야 했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최대한 차갑고 위엄 있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무엇이 그리 웃긴지 또 한 번 와하하 웃어 젖혔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음담패설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용병이라고 해도 귀족 여성을 상대로 이렇게 예의를 지키지 않을 줄이야. 이런 무뢰배들이 언제까지 성을 돌아다니게 둘 셈인지.

“이런, 심기가 상하셨군. 젖가슴을 주무르고 있기에 조금 도와 드릴까 했더니.”

그녀는 에드윈을 찾아가 무어라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술로 인사불성이 된 자들이라 더 이상의 대화는 소용없을 듯했다. 고작해야 남편에게 달려가 부탁하는 수밖에.

나디아는 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대로 에드윈의 집무실로 갈 요량이었다.

다음부터는 정말로 하녀를 대동해야겠다. 그보다 용병들이 성을 빨리 떠난다면 더 좋겠지만, 나름의 필요가 있어 고용한 것일 테니 나디아가 아무리 내보내라고 해 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래도 말은 꺼내 봐야지. 에드윈의 변덕이 그녀의 편을 들어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두려웠지만 그녀가 누구의 눈도 걱정하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건 그 남자뿐이었다.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저런 천한 것들에게 당한 모욕쯤이야, 네놈들은 이제 죽을 목숨이라며 코웃음을 치고 털어 내면 그만인 것을, 자꾸 서러워지기만 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죄다 저를 비웃는 것으로만 들렸다. 나디아의 귓가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흠칫 놀라기 무섭게 팔목이 거칠게 잡혀 올라갔다.

시뻘건 얼굴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술 냄새와 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거친 손바닥에 쓸린 손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그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이를 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히 귀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예전에 수도의 어느 골목에서처럼 신분을 감추기 위해 수수한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엘란츠 성의 유일한 귀족 여성일 그녀의 신분을 짐작할 텐데도 어찌 이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는지 놀라웠다.

이자들의 목이 여태껏 붙어 있다는 것이 의문일 따름이었다. 다른 곳에서도 이리 행동했다면 진작 큰 변을 당하고도 남았을 텐데.

하지만 팔을 낚아챈 사내의 눈 속에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자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 기사와 사용인들이 가득한 성안에서 그녀가 큰 변을 당할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당장 코앞에 닥친 위협에 몸이 얼어붙었다.

이 상황을 스스로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분했다. 이번에도 누군가 바람같이 나타나서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 주기만을 바라야 한다는 것이….

“놓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그때처럼, 아실이 나타났다. 검을 뽑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날카롭게 빛나는 검 끝이 남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나디아는 그녀를 보호하듯이 제 앞을 가로막고 선 넓은 등을 올려다보며 눈만 깜빡였다.

어떻게 당신은 매번 내가 곤경에 처할 때면 나타나는지. 가슴이 술렁거렸다. 랑카드에서의 그 밤 이후 처음 보는 아실이었다.

그는 예전처럼 몰래 찾아오지도 않았고, 산책길에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동안의 만남이 모두 그가 찾아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처럼.

그가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서 신음하던 제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아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그래서 그것이 뭐 어쨌다는 건가, 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실의 경직된 얼굴에 떠올랐던 죄책감을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제 탓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한 얼굴이었다.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삼키며 나디아는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나간 손목을 매만졌다. 시뻘건 손자국이 남은 것이 거슬렸다.

한시름 놓고 나자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실과 마주한 것을 에드윈이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끔찍했던 밤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고작 바라본 것만으로도 그런 경험을 해야 한다면 그다음은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귀부인, 괜찮으십니까?”

낯선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던 젊은 기사가 걱정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실을 본 것만으로도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린 탓에 다른 기사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나디아는 내심 안도했다. 아실 혼자보다는 여럿을 마주하는 게 의심의 여지를 남기기 어렵겠지. 게다가 그가 아무리 괴짜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기사와 마주한 것을 트집 잡을 만큼 융통성 없는 남자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창백합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자들은….”

기사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디아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처리한다면 굳이 에드윈을 찾아갈 필요도 없겠지.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 조금 두려웠던 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는 기사와 함께 자리를 떠나기 전에 아실을 한 번 바라봤다.

그는 나디아에게 말을 걸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불안하게 술렁이는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기사의 인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기사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제 소개를 했다. 나디아는 제 이름을 노먼이라 소개한 기사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좀 더 제대로 단속을 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귀부인.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앞으로는 꼭 하녀들을 대동해 주십시오.”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당부의 말이었다. 나디아는 이번에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하게도 꼭 일을 겪어야만 그 당부를 지킬 필요성을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큰거리는 팔목을 매만지며 걷던 나디아는 마침 떠오른 의문을 입에 올렸다.

“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용병들은 언제 성을 떠나나요?”

잠시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콧잔등을 긁적이던 노먼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각하께 여쭈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나디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아실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미련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랑카드에서의 밤 이후로 모두 털어 버린 것인지 그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거슬렸다.

모두 끝내자고 해 놓고 왜 신경 쓰는 것인지. 마음의 모순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나는 항상 왜 이렇게 우유부단한지.

칼같이 냉정한 판단을 내리곤 하던 나디아 잉그램은 모두 사라지고, 한심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나디아 엘란츠만 남은 기분이었다.

예전엔 무슨 일에 있어 선택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감정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어려워진 것일 테지.

스스로를 비난하느라 나디아는 노먼이 돌아가며 인사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랑이 그녀를 이렇게 한심하게 만들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하며 느꼈던 충족감과 행복은 이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 순간 불안으로 가슴 졸이고, 안타까워하거나 결코 다다르지 못할 상상을 하며 억울해하는 이 모든 감정이, 사랑을 몰랐더라면 겪지 않아도 됐을는지 모른다. 랑카드 별장에서의 그 떠올리기도 싫은 밤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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