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아실은 에드윈이 아닌 에드윈이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귓가에 시선이 꽂혀 있었다. 나디아는 당황해서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에 에드윈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못 가서 아쉽네요.”
“거짓말 정말 못 하네.”
그는 피식 웃었다. 에드윈의 손이 뒷덜미를 감싸 왔다. 나디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닿았다. 가벼운 접촉이 길어지다가 살짝 점막이 빨리며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나디아는 짧은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에드윈이 아실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허리를 조금 더 숙이더니 나디아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속삭였다.
“쿠르쉬드가 계속 네 호위를 맡겠다고 자처하는 이유를 알아?”
그의 눈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 입술이 호를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기분이 마냥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디아는 그저 계속해서 고개를 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평소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에 담지 않았을 단어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수 없었다.
“보, 보지 간수 잘, 잘하라고….”
“그래. 나는 바빠서 못 갈 것 같으니 얌전히 쉬다 와. 얌전히.”
에드윈의 손이 엉덩이를 꽉 쥐었다 놓았다. 그가 허리를 일으키며 고갯짓을 하자 수잔이 다가와 나디아를 마차로 이끌었다.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로 아실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금세 떨어져 나갔다.
당장이라도 고개 돌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나디아는 안도했다. 그러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던 마음은 이미 바닥에 처박힌 후였다.
나디아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마차 안의 푹신하기 그지없는 의자에 앉은 채로 멍하니 우울한 생각에 잠겼다.
아실을 사랑했다. 하지만 아실과 나디아, 두 사람은 이제 끝을 맺었다. 파국을 맞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디아에게는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에드윈이 정말 나쁜 남자였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성으로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고 폭력을 휘두르기라도 했다면, 그녀도 좀 더 뻔뻔하게 굴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에드윈은 말버릇이 나쁘고 그녀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희롱하려 들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남편이었다. 계집질을 일삼고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는 하늘의 별만큼 많았지만, 그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으니 괜찮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에드윈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바로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싫어하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그가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거나 입 맞추는 건 단순한 변덕일 뿐, 애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기갈 난 사람처럼 감정의 흔적을 좇게 되었다.
에드윈의 감정은 어떨까? 나디아를 다정하게 안아 주거나 입 맞춰 줄 때면 설마 그녀를 사랑하나 싶다가도, 심한 말을 들으면 역시 그럴 리가 없다고 결론 내리곤 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 역시 갈팡질팡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모두 배제하고 본다면 나디아를 대하는 그의 행동은 그저 가까이 두고 언제든 제 욕구를 풀 수 있는 여자를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두려웠다. 배부른 맹수처럼 그녀를 이리저리 굴리며 데리고 노는 그가 언제쯤 이를 드러내며 물어뜯으려 할지 몰라서.
누군가는 그리 두려우면 도망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디아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 자그마한 알 속에서 부모님이 시키는 것만 따르면 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삶. 결혼하라는 한마디에 거부할 생각 한 번 못 하고 마음을 외면하는 게 당연했던 삶.
나디아의 삶의 주체는 부모님에서 남편으로 옮겨 갔을 뿐이었다. 그걸 거역하라는 건, 그녀에게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손발이 차게 식을 만큼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어서….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던 셈이었다.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달린 평탄한 여정의 이틀째가 되는 날, 마차는 해질 무렵에 랑카드에 도착했다. 번화한 항구 도시의 외곽으로 달리면 새하얀 대리석으로만 지어진 듯한 호화로운 별장이 나타났다.
별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몇 걸음만 걸으면 바로 깨끗한 백사장이 펼쳐진 해변으로 나갈 수 있었다. 별장을 관리하는 노인이 해변은 사유지라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나디아는 노을 지는 하늘을 따라 이어지는 수평선과 함께 사각거리는 모래를 밟았다.
난생처음 보는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맑고 새파란 바다 위로 저만치 지는 해가 주홍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한껏 가라앉았던 기분을 모두 띄우지는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하녀가 신발을 벗겨 주자 망설임 없이 느린 파도가 밀려드는 바다로 뛰어갔다. 젖은 모래가 발바닥에 달라붙자 곧 미지근한 바닷물이 시원한 소리와 함께 밀려들며 모래를 씻어 갔다.
나디아는 묘한 감동에 휩싸인 채로 바닷가를 걸었다. 그녀는 바닷물이 짜다는 게 정말인지 바닷물을 찍어 먹어 보고 싶었지만 하녀들이 기절초풍하며 만류하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나디아는 느긋하게 휴양을 즐겼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낯선 곳, 낯선 풍경 속에 있어서인지 그녀가 엘란츠 성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녀의 등을 벼랑 끝으로 밀어 버릴 불안도 지금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수영을 못 했기 때문에 그저 발목까지 오는 깊이의 물을 발로 헤치고 다니거나 예쁜 색깔의 조개껍데기를 주우러 다니고,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가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신선한 해산물을 원 없이 먹었다. 타샤가 만든 약이 제 몫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루는 날을 잡아 랑카드 시내를 구경하러 나섰는데 엘하임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항구가 펼쳐져 있었다.
각국의 배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선 선착장은 가장 큰 항구 도시라는 위명에 걸맞은 규모였다.
강을 통해 배가 오고가는 엘하임과 드넓은 바다를 끼고 무역을 하는 랑카드의 항구 규모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로 전해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크고 작은 배들에서 쉴 새 없이 물건을 실어 내리는 일꾼들의 모습과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큰 목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심부름을 하러 뛰어다니는 꼬마들, 꽃을 파는 소녀들과 흙바닥을 뒹구는 생선 내장을 허겁지겁 삼키는 떠돌이 개들의 모습. 이를 지켜보던 나디아는 언젠가 비슷한 모습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봤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인데도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두 남자에게서 떨어져 보내는 시간은 그녀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돌아가는 대로 서랍에 들어 있는 끈 팔찌를 버릴 작정이었다. 이대로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불안에 떨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실에게서 더 들을 이야기는 없었고 혹시라도 화근이 될 만한 그 무엇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에드윈을 배신하는 건 상상만으로 피가 식을 만큼 위험하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손에 꼽는 권력자였고 그녀를 생각보다 무르게 대한다고 해서 그게 오욕을 참아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를 상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아이에 대한 것은… 에드윈의 아이이길, 만일 아실의 아이라고 해도 그녀를 똑 닮은 여자아이이기를 바랄 수밖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수도 없이 불안에 떨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디아는 몸을 떨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마음 쓰지 말자. 이 아이는 분명 에드윈의 아이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몇 번이고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다고.
휴양을 끝내고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자 그녀는 덜컥 찾아온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디아는 엘란츠 성을 좋아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성으로 돌아가면 그녀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던 불안에 잠겨야 할 것 같아서.
나디아는 기사들에게 돌아가는 날을 미룰 수 있는지 물었다. 원래 머물기로 했던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한 주 더 머물기로 계획을 바꾼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는 것에 집중했다.
평소에도 특별히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몸보다는 마음을 쉬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나디아는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다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별장에 도착한 것은 그녀가 엘란츠 성으로 돌아가기 사흘 전이었다.
바빠서 함께 가지 못할 거라던 에드윈이 기사들을 이끌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온 기사들 중에는 그녀가 언제나 무의식중에 찾곤 하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섞여 있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의 뒤에 버티고 선 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남편의 팔에 손을 올렸다. 떠나기 전, 성 앞에서 그가 했던 의심으로 가득한 추궁의 말을 열심히 부정했으니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에드윈, 바쁘다고 했잖아요.”
“일이 빨리 끝나서 와 봤지. 돌아오기 싫을 만큼 좋다니 궁금해지잖아.”
다행스럽게도 에드윈은 그때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는지 태연한 낯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뒤에서 넘어온 아실의 찌를 듯한 시선이 그사이를 가로질렀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