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나디아는 마법사의 조언대로 산책을 줄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보냈다.
주로 책을 읽거나, 장부를 훑어보고, 낮잠을 자고, 차를 마시고,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던 자수틀을 다시 잡았다.
그녀는 푸른 천 위에다 성벽의 가장 위에 달린 엘란츠 가문의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다. 푸른 깃발에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백사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인지라 바늘에 손끝이 몇 번이나 찔리고 실을 모두 풀어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시간을 죽이기에는 좋았다. 집중이 필요한 일이라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다른 생각들이 파고들 틈이 없다는 것도 좋은 점 중의 하나였다.
열두 번째로 바늘이 손끝을 찔렀을 때 나디아는 작은 한숨 한 번을 내쉬고 수틀을 내려놨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퀘른은 절대로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처럼 굳건하고 평화와 번영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국경 지역은 언제 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회랑에서 대화를 엿들은 이후로 생각이 많아졌다. 느닷없이 수를 놓기 시작한 것도 그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에드윈이 가진 수많은 작위 중에는 기사 작위도 있었다. 연인이나 아내, 혹은 피붙이가 출정하는 기사에게 무사 귀환을 바라며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주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다.
놓기 시작한 자수를 끝마칠 생각은 있었지만, 이 손수건을 쓸 만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때맞춰 하녀들이 저녁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의 감상은 순식간에 스러졌다. 성에 손님이 머무는 동안 저녁 만찬은 항상 평소보다 호화로웠지만 나디아는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입덧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신료를 거의 쓰지 않은 적은 양의 음식과 과일 조금을 간신히 먹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반절은 토하기 일쑤였고, 식사량이 줄자 자연히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졌다.
드물게 먹고 싶은 것이 생겨도 막상 냄새를 맡으면 코를 틀어막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에드윈과의 식사 자리에서 다른 것은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던 그녀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체리파이를 보고서야 식욕이 조금이나마 도는 것을 느꼈다.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가 브랜디가 들어갔으니 안 된다며 저지당한 나디아는 스스로 이해하기도 전에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깨닫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윈이 답지 않게 놀란 얼굴을 하는 게 보였지만 참아지지가 않았다. 시야가 흐릿해질 만큼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둘러 뺨을 닦아 냈지만 한번 시작된 눈물은 멈추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작 체리파이를 먹지 말라고 한 것에 왜 이렇게까지 서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드윈이 하인들에게 브랜디를 넣지 않은 체리파이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는 별꼴을 다 보겠다며 어처구니없어하긴 했지만 결국 브랜디가 들어가지 않은 체리파이를 손수 나디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나마도 그녀가 우느라 제대로 먹지를 못하자 떠먹이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새하얀 크림을 얹은 파이를 받아먹으면서도 부끄러워서 차마 에드윈의 얼굴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를 가늠하자니 뺨이 달아올랐다.
“그쳤으면 직접 먹지 그래.”
그녀는 에드윈의 손에서 접시와 포크를 건네받았다.
이게 어제의 일이었다. 이런 것도 임신의 영향인 걸까. 마치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녀가 수습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디아는 납작하기만 한 제 배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타샤의 말에 따르면 아직 손가락만한 크기라던데 그 조그마한 것이 이리도 저를 휘둘러 댄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걱정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에드윈과 아실의 얼굴이 번갈아 가며 떠오르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한기가 들었다. 누군가 귓가에 대고 한시도 마음 편히 있지 말라며 윽박지르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마님.”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디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타샤 님께서 오셨어요.”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몇 번 봤다고 제법 익숙해진 마법사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인사치레를 싫어하는 사람답게 마법사는 나디아의 배를 훑어본 뒤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입덧이 심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만든 약인데.”
그녀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유리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어두운 녹색을 띤 알약이 몇 개 들어 있었다. 나디아가 그것을 받아 들자 타샤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루 한 번, 아침 식사 전에 한 알씩 드시면 입덧을 좀 덜하실 거예요. 후각을 아주 약간 둔하게 해 줍니다. 태아에겐 아무 해도 없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녀가 조심스럽게 약을 받아 챙겼다. 용건이 끝난 타샤가 방을 나서려 하자 나디아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나디아는 그동안 수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또한 묻고 싶었다. 배 속의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지, 그걸 당신이 말해 줄 수 있는지, 말해 준다면 비밀을 유지해 줄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도 수없이 질문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감당할 자신은 있는지, 에드윈의 아이라 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낼 수 있는지. 답을 듣는다고 해도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홀로 누구의 아이인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나디아가 내도록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물음을 꺼내 놓으려던 차에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성 내에서 이럴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에드윈이 조금 젖은 머리카락을 함부로 털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더니 비어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디아는 그를 보자마자 바짝 얼어붙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제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으로 끌어내리며 그 천한 놈과 붙어먹지 않았다더니 네 꼴 좀 보라고 신랄하게 비웃을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타이밍 좋게 찾아올 줄이야.
나디아의 머릿속으로 판단력을 잃은 의문들이 떠올랐다가 스러져 갔다. 그는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곤 하지 않았던가.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에드윈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손을 휘둘러 하녀들을 모두 내쫓았다. 타샤도 그의 손짓을 따라 나가려 했지만 에드윈이 만류하며 나디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이마 위로는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왜 그러지? 악마라도 본 얼굴인데.”
“아, 아뇨. 그냥… 문소리에 놀라서.”
그가 흠,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이내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이 다리를 꼬고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기댔다. 에드윈은 태연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으며 하던 일 마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 모습으로 보아 적어도 무언가 눈치채고 그녀를 추궁하러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진정이 되자 나디아는 그가 무얼 하러 온 건지 궁금해졌지만 물어보아도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쿠키를 세 개쯤 집어 먹던 그는 목이 막히는지 나디아가 들고 있던 과실차도 빼앗아 마셨다. 나디아는 찻잔을 빼앗겨 비어 버린 손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다가 얌전히 무릎 위로 내렸다. 그녀가 한껏 어색해하며 타샤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려던 차에 에드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가 손끝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핥았다. 품위 없는 행동이었지만 추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섹스해도 문제없나?”
“뭐라고요?”
나디아의 얼굴이 당황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타샤를 향해 질문을 한 것 같았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남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그가 하는 짓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디아는 타샤를 보기가 부끄러워서 눈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각하, 시기상으로 괜찮은지를 물어보신 거라면.”
타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마법사의 시선이 잠시 제게 닿는 것을 느낀 나디아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마법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가능은 합니다만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알았어. 끝났으면 나가.”
“에드윈!”
그 축객령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한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에 나디아의 얼굴은 그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명령에 충실하게도 지체 없이 나가 버렸고 에드윈은 그 뒤를 따르는가 싶더니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걸었다.
나디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목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끼익, 하는 소리가 나자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나디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가 저의 부정을 알아채고 추궁하러 온 게 아닌 것은 다행인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질문 이후에 바로 모두를 쫓아내면 당연히 그 짓을 하려 한다 여길 것이 아닌가?
그 마법사는 입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으니 후작 부부가 그 짓을 하러 들어갔다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심히 민망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몰라서 물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요?”
“너랑 내가 떡치는 사이인 거 이 성에서 모르는 놈이 없는데 뭐 어때?”
그가 수치를 모르는 남자라는 걸 이런 식으로 재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더 따지는 대신 그의 신경을 돌리려 어색하게 웃으면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대화를 시도했다.
“소, 손님들은 언제 가신대요?”
“빗줄기가 좀 약해지면 갈 거야. 우기도 곧 끝날 테고.”
에드윈이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우기가 끝나면… 어때요?”
“어떻긴 뭘 어때? 가을 초입까지 한참 또 더워. 펜던트나 잃어버리지 마.”
그가 네 수작질은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금세 입술이 맞붙었다. 그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복숭아 맛이 났다. 조금 전 마셨던 차 때문임이 분명했다.
나디아는 눈가를 붉힌 채로 그의 가슴을 조금 밀어냈다. 자꾸만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밀라가, 읍, 음, 라, 랑카드 해변에, 하웁, 당신 별, 장이 있다고….”
“흐음… 시간이 날지 모르겠지만, 정 안 되면 당신만이라도 보내 주지. 이제 됐나?”
집중해. 속삭임을 끝으로 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강하게 두피가 당겨지는 느낌이 제법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