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래?”
기껏 말하게 만들어 놓고는 반응이 그래? 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그가 무슨 황당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놀라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덕에 간신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나디아의 모습 하나하나를 즐겁다는 듯이 관찰하고 있었다.
“내일 타샤를 보내 주지. 울피가 그게 나을 거라더군. …원래 마법사를 그런 일에 보내지는 않지만, 그 쓸모없는 자식이 징징거려서 말이야.”
“…알겠어요.”
“모쪼록 아들이길 바라. 가신들이 시끄럽거든.”
에드윈은 잔을 들고 일어섰다. 답지 않게 멀쩡한 말투로 연회의 시작을 알리자 하인들이 줄을 지어 음식을 날라 오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조금 긴장했다. 이런 자리에서 음식 냄새를 맡고 헛구역질을 하는 건 곤란했다.
다행히도 속이 메슥거릴 만큼 냄새가 강한 요리는 없었다. 나디아는 매우 천천히 식사했다.
버터와 허브향이 밴 스테이크와 겉면을 바삭하게 구운 감자, 향이 강하지 않고 아삭거리는 채소 샐러드, 마무리로 향기로운 체리파이 한 조각을 먹고 장미 시럽을 넣은 탄산수를 한 잔 더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끝마쳤다.
연회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고 끝도 없이 먹고 마시던 사람들은 대부분 고주망태가 된 상태로 돌아갔다. 성 지하에 있던 커다란 술통이 십수 개는 비워졌을 것이 분명했다.
밤이 깊어 방으로 돌아온 나디아는 느닷없이 치솟는 욕지기에 저녁으로 먹었던 것을 모두 게워 냈다. 기진맥진해서 늘어진 그녀를 보며 하녀들이 마법사님을 지금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어 댔지만 힘없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한번 게워 내고 나니 그래도 속이 꽤 편안해졌다. 다만 앞으로도 매번 이런 식일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이튿날, 에드윈의 말대로 타샤는 정오가 되기 전에 찾아왔다. 나디아는 가벼운 차림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으로 하녀들이 가져온 묽은 수프 냄새에 속이 뒤집혀 한바탕 난리가 났던 참이었다. 무뚝뚝한 마법사는 별다른 내색 없이 인사했다.
“축하드립니다, 귀부인.”
“고마워요.”
그 무덤덤한 반응이 외려 편안했다. 나디아는 타샤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녀들이 차와 다과를 내어 왔다. 나디아는 말린 과일이 박힌 쿠키 두어 개를 식사 대신으로 먹었다.
어디까지나 예의상이라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 둔 마법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듯이 나디아의 동의를 구했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디아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인의 바짝 마른 손이 조심스럽게 배 위로 다가왔다.
그녀의 배 위를 느린 속도로 훑는 타샤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사의 시니컬한 태도와 다르게 빛은 부드러운 온기를 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샤는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나디아는 물론이고 주변에 서 있는 하녀들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법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를 주목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들의 긴장은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6주에서 7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나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가 고개를 젓자 마법사는 그저 눈썹을 한번 추켜올리기만 했다. 6, 7주라니 그렇게나 됐을 리가 없는데. 약 7주 전이면 그녀의 결혼식 때였다. 그때면… 나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매달리듯이 수잔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며, 몇 주 전에 달거리가 왔는데요. 그렇지?”
“네, 맞아요. 제가 모셨는걸요.”
나디아는 내심 안심했다. 마법사의 태도가 너무나 확고해서 그녀는 아주 잠시나마 제 경험이 상상이었나 의심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유독 양이 적거나, 기간이 짧지는 않았습니까?”
마법사는 수잔을 보며 질문했다. 그러자 기억을 떠올리는 듯이 머뭇거리던 수잔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그게… 그랬던 것도 같은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임신 초기에 피가 비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잘 아시네요. 임산부를….”
“…니다. 그러니….”
나디아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잔이 상기된 얼굴로 타샤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고 있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타샤에게 달려들어 누구 아이인지도 알아낼 수 있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가 제 생각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디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타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몇 가지 주의점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위험한 시기는 어느 정도 넘긴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은 주의가 필요하니, 활동량을 좀 줄이시고, 술은 물론이고 약 종류도 함부로 드시지 마세요.”
하지만 나디아는 타샤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내용은 하녀들이 기억할 테지. 그녀는 지금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슴속에 온통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해서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에드윈 앞에서 당당하게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혀를 콱 깨물고 싶어졌다가, 그는 아실과의 관계를 모를 것이라는 사실에 당도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언제 돌아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초조하게 손끝을 매만지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방 안을 서성이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 보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산달이 가까워 온 듯이 배가 부른 그녀를 끌어안으며 누구의 아이냐고 묻던 두 남자가 나오는. 그때에는 그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악몽이라고 생각하곤 털어 버렸는데, 악몽이 현실이 되어 버리자 눈앞이 아찔했다.
나디아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야말로 묻고 싶었다,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가 놓인 복잡한 상황 때문인지, 임신으로 인한 영향 때문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발코니 난간에 매달려 맘껏 소리를 지르고 싶다가,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마구 때리고 싶다가, 아예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가, 종내에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졌다.
멋대로 치솟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방 안에서 홀로 훌쩍거리다가 하녀들에게 들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네들은 임신하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그녀를 다독이는 걸 보니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디아는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어 가며 간신히 참았다.
홀로 방 안에 있자니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싫었던 나디아는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바깥은 비가 줄줄 쏟아지고 땅은 온통 진흙투성이였지만 테라스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볼 뿐이라 해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빗물이 들이쳐 색이 진해진 돌바닥을 밟으며 회랑을 걷던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빗소리 사이로 격앙된 대화가 들렸다. 커다란 돌기둥 뒤로 에드윈과 그가 불러들였던 남부의 귀족 세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디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이런 시기에 귀족들을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에드윈에게 귀족들을 왜 불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퉁명스럽게 네가 그런 것을 알아 무얼 할 것이냐 물어 올까 봐 묻지 못했었다.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말투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고는 하지만 타박하는 말이 무안한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든 물어보라고는 했다지만 뭐든 대답해 주겠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한껏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탓에 집중해야만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제가 들어서 안 될 만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뒤늦게 위기감이 들었지만 지금 돌아가면 들킬 것이 분명했기에 그저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협정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알키드 놈들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고요. 그놈들이 산적이네, 도적이네, 하며 국경 근처를 깔짝이는 걸 모르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엘하임을 지킬 병력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우리 쪽 전력이 뒤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용병을 고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각하?”
대화의 앞뒤를 모르기에 정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군사 문제에 관한 부분인 듯했다. 나디아로서는 정말 알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이야기였으나 가지고 있던 호기심은 해소되었다. 그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부름에 응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다음은 회의실로 가서 하지. 나는 잠깐….”
어딘가로 이동하는 여럿의 발소리가 들리고 나디아도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깨가 차게 식어 있었다. 그래서 나디아는 어깨 위로 뜨거운 손이 닿아 왔을 때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쳐든 그녀와 마주친 것은 딱딱하게 굳은 보라색 눈동자였다.
“웬 쥐새낀가 했더니, 당신이었군. 하긴 쥐새끼가 이리 허술할 리가 없지.”
“나, 나는 그냥 산책을 하던 중이었어요.”
“그래 보여.”
에드윈은 별 감흥 없다는 듯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의 시선이 무감각하게 그녀를 훑어 내렸다.
“아무 데나 함부로 기웃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방으로 돌아가. 몸이 차.”
“…알았어요.”
그의 말에 따라 방으로 돌아온 나디아는 얇은 숄을 하나 꺼내 어깨 위로 둘렀다.
오후에는 비가 잠깐 그치더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더위에 늘어져 있을 때에는 꼴도 보기 싫던 햇빛이 이리도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나디아는 발코니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햇빛을 쬐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하늘은 다시 새카만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마냥 어둡기만 해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으나, 그동안 아무도 그녀를 깨우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성문 앞에서 순찰을 끝낸 기사 무리가 부슬비에 젖은 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쳐 보이는 말들이 진흙탕을 철벅이며 느리게 걸었다.
나디아는 그들 사이에 혹여나 눈에 띄는 붉은 머리가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자신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