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25화 (25/115)

25.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다. 수잔이 말했던 아이라는 말만 자꾸 귓가에 메아리쳤다. 나디아는 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채 아실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마구 밀었다. 그와 더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가라고 했잖아. 얼른, 가, 가 버려…!”

충격을 받기는 아실도 마찬가지인 듯하였다. 나디아는 채 빠져나가지 못한 음식 냄새를 맡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혼란으로 가득한 눈을 한 채 몇 번이고 나디아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녀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난간을 넘었다.

벽의 돌출부를 밟으며 아주 가볍게 바닥까지 내려간 그를 확인한 뒤 나디아는 방 한가운데로 돌아와 초조하게 서성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방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수잔과 밀라 그리고 낯선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나디아는 마치 사신이라도 맞이한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반대로 하녀가 홀로 지레짐작을 했을 뿐 확실하지도 않음에도 그들의 얼굴은 경사가 따로 없다는 듯이 환하기만 해서….

“축하드려요, 마님!”

수잔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애써 침착하려는 기색이던 밀라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녀를 나무랐다.

“아직 확실한 게 아니잖니. 진정하거라.”

신중하게 굴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디아는 임신이 맞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디아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치료사 울피는 임신은 맞지만 얼마나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며 머쓱해했다.

그녀는 지난 달거리 이후 얼마나 지났는지를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그러면 최소 2주에서 3주 정도려나? 이렇게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던가?

나디아가 임신과 출산에 대해 아는 것은 월경이 멈춘다는 것과 배가 부푼다는 것 그리고 약 10개월이 지나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 정도였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를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제가 임산부를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요….”

울피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디아는 조금 실망했지만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기사들의 상처를 돌보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밀라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은 수잔에게로 돌아갔다. 가장 가까이서 나디아의 시중을 드는 것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다 느낀 적이 있느냐, 그게 언제냐 같은 질문을 듣자 수잔은 조금 머쓱한 듯이 제 옷자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최근에 유독 피곤해하시기는 했는데, 더위를 타느라 그러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나디아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울피는 지난 월경이 언제쯤이었는지나 에드윈과의 잠자리를 가진 시기 따위를 돌려 물었지만, 나디아의 얼굴 위로 불편해하는 기색이 떠오르자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불편하신 거 이해합니다. 저보다는 오히려 그 마법사님이 더 도움이 되겠어요. 타샤 님이요. 몇 번인가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대단하시더군요. 약초에 상당히 박식하셔서.”

“마법사들은 바쁘지 않나요?”

수잔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나디아는 그녀가 그리 묻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며 가며 스쳐 지나는 마법사들은 항상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누가 불러도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저들끼리 학문적 토론이랍시고 밤을 새워 떠들어 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구실이라는 곳에서는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거나 재료로 쓰이는 온갖 마수의 사체가 나뒹군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들이 어떤 전력의 보탬이 되는지 전장에 나갈 일이 없는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했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비하지만 꺼림칙함이 더 큰 괴짜 집단에 불과했다. 바쁘지 않겠느냐고 묻는 질문은 내심 마법사가 껄끄럽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한 것을 시시콜콜 털어놓는 것보다는 같은 성별이 심리적 장벽이 낮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나디아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게다가 타샤라면 그나마 익숙한 이름이 아니던가. 엘란츠 성에 거주하는 마법사들 중에 여자는 그녀뿐이라는 듯했다. 밀라는 여차하면 마을에서 산파 경험이 많은 여인이라도 찾아보려 했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후작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고작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성안의 모두가 알게 된 것 같았다.

인사 몇 번을 나눠 본 것이 전부인 기사들은 물론이고 마주치는 하인들까지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정도면 아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낮에 마주쳤던 그는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지만 더 들을 가치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바람맞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 겨우 그딴 걸 납득시켜 줄 생각은 없었다.

에드윈도 알게 되었겠지. 그래도 남편이고, 좋은 소식이니 제 입으로 직접 전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이리도 소문이 파다해서야 굳이 제 입으로 다시 한번 말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그래도 자기 자식이니 기뻐하지 않을까 하다가, 생각해 보면 그가 기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기뻐할 줄 알기는 할까?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웃는 얼굴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린, 비웃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표정뿐이었다.

임신 소식을 전하고도 그런 얼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보면 괜스레 한숨이 나왔다. 아직도 마음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대를 모두 버리지는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한데 손님들로 가득한 저녁 연회에서 술안주처럼 입에 오르내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콱 막힌 듯이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한껏 차려입고 내려간 연회장에서 마주친 남부 귀족들이 입을 모아 축하 인사를 전해 왔다. 나디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때 그녀의 생각에 응하려는 것처럼 등 뒤에서 에드윈이 나타나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마치 과시하듯이 나디아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향했다. 그 태도가 어찌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지 나디아는 저도 모르게 휩쓸려 갔다.

함부로 끼어드는 식의 몰상식한 태도는 이미 유명한지 귀족들은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평소 에드윈의 행실이 어떤지 알 만했다.

“멍청하게 그걸 다 받아 주고 있으면 어떡해?”

웬일로 아무 말도 없나 했더니, 갑작스러운 비난이 쏟아졌다.

나디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까 하다가 울컥 올라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받아쳤다.

“그러면 무시하란 말이에요? 당신이 하는 것처럼?”

“나처럼 하면 안 되지. 나는 원래 이런 놈이잖아.”

씩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뻔뻔스러운 말을 지껄여 댔다.

“대체 수도에서는 어떻게 지냈던 거야? 엉덩이 흔드는 법 말고는 다 잊어버린 건가?”

말문이 막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감히 너 따위가 내게 말대꾸를 하냐는 듯이 그녀의 코끝을 살며시 두드린 손끝이 떨어져 나가고 더한 말이 돌아왔다.

나디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늘 있는 일이니 새삼스럽게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는 입으로는 연신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주제에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의자를 빼 주는 등 신사적으로 행동했다.

처음에는 이 괴리감에 당황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적응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결혼 연회 때, 귀족들을 상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은 저 상스러운 말투 때문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결혼식 연회 때 말이에요.”

“음?”

“귀족들이 말 거는 걸 모조리 무시했던 거.”

“그게 왜?”

“일부러 그런 거예요?”

궁금한 건 모두 물어보라고 했으니까. 나디아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습관적으로 황금빛 벌꿀주가 가득 든 은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잔을 입에 대기도 전에 에드윈이 술잔을 가로챘다.

그제야 나디아는 아차 하며 입가를 가렸다. 그녀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몰랐던 때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제는 술과 거리를 둬야만 했다.

에드윈이 지나가던 하인을 손짓으로 불러 세우더니 탄산수에 장미 시럽을 넣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즐겨 마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의 귀에 들어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몸에 일어나는 일까지도. 순간적으로 아실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를 만날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한 기사단의 단장을 맡을 정도면 실력이 출중할 테니, 누군가 있었다면 바로 알아챘겠지.

“황명이야.”

아실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녀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나디아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오르자 에드윈이 손가락을 제 입술 위에 눌렀다.

“입도 벙끗하지 말라고.”

“폐하께서요?”

그럴 리가. 무의식중에 그럴 리가 있느냐며 부정을 했지만 뒤늦게 그의 평소 말투를 떠올려 보자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날 때부터 이 모양이었다는 둥, 황제 폐하 앞에서도 이따위로 말했다는 둥. 그때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겪다 보니 에드윈은 정말로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까지 가리지 않는 미친놈이어서 완전히 농담이라고는….

“농담인 줄 알았어?”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그를 보려다가 때맞춰 하인이 가져온 음료를 받아 들었다. 은은한 장미향이 올라오는 탄산수는 달콤하고 시원했다. 다행히도 장미향에 입덧이 올라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이요?”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밝은 금발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잔에 든 벌꿀주와 똑같은 색이었다. 나디아는 쓰잘머리 없는 감상을 한쪽으로 밀어 치우면서 여상하게 대꾸했다.

모르는 척했지만 눈치챈 바는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듣고 싶어 할 말이 뭐가 더 있겠는가? 임신 소식을 제 입으로 전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하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식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귀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제 입으로 한 번 더 듣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는 30대에 접어들었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아무리 늦어도 20대 중반쯤에 결혼을 하는 것과 비교하면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셈이었다. 그만큼 후계가 급하니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겠지. 나디아는 한숨이 절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꼭 들어야겠어요?”

“응.”

“나 임신했어요.”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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