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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24화 (24/115)

24.

그리 길지 않았던 키스가 끝나고 에드윈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둥둥 울릴 만큼 커다랬다.

“방에 가 있어. 외부인이 많으니까, 혼자 다니지 마.”

나디아는 여전히 발그레한 뺨을 한 채로 인형처럼 고개를 끄떡였다.

“괜히 돌아다니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도 말고.”

에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마법사들과 있었던 일이 어느새 그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대답하는 그녀에게 칭찬이라도 하듯이 동그란 이마 위로 입술을 찍어 누른 에드윈이 미련 없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나디아는 멍하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남편 같기도 한데….

고약한 말버릇만 사라진다면 완전히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쓸데없이 가지를 뻗어 가려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뒤로 수잔이 따라붙었다. 최근 나디아가 유독 피곤해했던 것을 알고 있는 하녀가 걱정의 말을 쏟아냈다.

“마님,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낮잠이라도 주무시겠어요? 아니면 가볍게 먹을 만한 걸 가져올까요? 점심도 못 드셨잖아요.”

나디아는 수잔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먹을 걸 좀 가져다줘. 고마워.”

수잔이 확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쏜살같이 뛰어 내려갔다.

나디아는 가볍게 식사를 한 뒤에 저녁까지 쭉 쉬자고 마음먹었다.

최근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피곤해서 길게 활동하는 것이 힘들었다. 수도에서와 다르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힘들었고, 왜인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 가는 듯해서 위기감이 느껴졌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탓에 변화를 모른 척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선 나디아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창밖을 내다보려 했던 그녀는 뒤늦게 발코니 난간을 뛰어넘는 침입자의 움직임을 목격했다.

나디아가 놀라서 뻣뻣하게 굳은 사이, 난간 반대편에 걸쳐 둔 다리를 끌어 올린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나디아.”

“아실!”

나디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슬금슬금 찾아왔던 잠기운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서둘러 방문으로 다가가 걸쇠를 걸어 문을 잠갔다. 잠시 그대로 멈춰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침입자를 노려보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무슨 짓이야? 자꾸 이렇게 몰래 찾아오면 안 돼. 태도를 똑바로 하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 대체 여기는 어떻게 올라온 거야?”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충분히 조심했으니 걱정 마.”

두통이 이는 것 같아서 나디아는 이마를 짚었다.

충분히 조심하기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낸 적이 없는 이상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려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한낮에 그녀의 방으로 찾아올 줄은.

언제든지 에드윈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그녀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왜 마중 나오지 않았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야?”

이도 저도 아닌 관계라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저뿐인지, 그는 지나치게 대담하게 굴었다.

그렇겠지. 아실은 생각해 본 적도 없겠지. 부정을 저지르다 들킨 귀부인이 어떻게 될지.

수도에서는 남녀 상관없이 정부를 두고 바깥으로 나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당연시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재판 따위가 열릴 일도 없었겠지.

그리고 에드윈은 세상에서 제일 방탕한 것처럼 굴면서도 때로는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굴어서, 만일 그가 알아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최악을 상상하며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다고 했잖아. 빨리 하고 끝내.”

최대한 냉정을 가장하던 나디아는 아실의 팔목에 여전히 매달려 있는 끈 팔찌를 발견했다.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가 이내 그것을 빼앗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낚아채려 뻗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챈 아실이 나디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나는, 들어야겠어. 물론, 짐작한 건 있지만…. 그게 사실인지 확실히 해 둬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

나디아는 귀가 쫑긋 서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짐작했다는 건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지금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친우와 시시덕거리며 내뱉던 그 말을.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물기가 고이는 것이 꼴사나워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네가 귀족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좀 놀았어?”

얌전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느꼈던, 어두운 바닥으로 끝없이,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다시 마음을 잠식하려 들었다.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심연이었다.

순식간에 울음이 북받쳤다. 참으려 노력한 것도 소용없게 나디아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주먹을 쥐었다. 도무지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처럼.

그녀는 겁쟁이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끝을 맺어야 이 남자가 지금처럼 불쑥불쑥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신이 한 말이니, 당신이 잘 알겠지.”

차갑고 이성적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그까짓 것 내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남은 것이라고는 자존심 하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간신히 쥐어짠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울음으로 젖어 있었다. 수치스러웠다. 아직도 그때의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드러낼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에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내게도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울어 버리면 그게 거짓말인 걸 들켜 버리잖아….

“잠깐, 나디아. 무슨 뜻이야, 그게?”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속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속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아실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냉랭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뜨거운 체온과 함께 빠르게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전해져 왔다. 가슴속에 격랑이 일며 깊이 침전해 있던 원망마저 밀려 올라왔다.

그녀는 치받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아 보려 입술을 깨물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토해 냈다. 나디아는 제 손을 붙잡은 뜨거운 손을 있는 힘을 다해 뿌리쳤다.

“내가 머저리로 보여? 수작 부리지 마! 두 번씩이나 속을 만큼 멍청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아.”

나디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은 멎었지만 감정은 멎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힘든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이대로 아실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 뒤, 괴짜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얌전히 살고 싶었다.

“나디아.”

“멋대로 이름 부르지 마! 건방지게! 나는 당신이 모셔야 할 사람이야.”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그때처럼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좁히려 드는 남자에게 진작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어야 했다.

아실의 미간에 금이 가는 것을 외면하며 나디아는 팔짱을 끼고 물러섰다. 마치 조금의 틈도 너에게 내어 줄 수 없다는 것처럼.

몇 번인가 망설이던 아실이 결연한 얼굴을 했을 때였다.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나디아의 어깨가 한 뼘은 튀어 올랐다. 그제야 수잔이 먹을 것을 챙겨 오겠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걸 새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나디아는 당황해서 허둥거리다가 급하게 아실의 가슴팍을 밀었다.

“가! 나가!”

그녀는 그를 발코니의 문 뒤로 밀어 넣고 젖은 뺨을 서둘러 닦았다. 그리고 걸어 잠갔던 문의 걸쇠를 걷어 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수잔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오며 머쓱하게 웃었다. 트레이 위로 생선 스튜와 큼직한 스테이크, 흰 빵, 몇 가지 치즈와 햄, 버터, 장미 시럽을 넣어 옅은 분홍빛을 띠게 된 탄산수 등이 놓여 있었다.

“주방이 연회 준비로 바빠서 조금 늦었어요. 죄송해요, 마님.”

“아, 아니야. 거기 두렴.”

수잔이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날랐다. 음식을 보자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허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스튜에 듬뿍 들어간 향신료의 매콤한 향기와 생선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속이 뒤틀렸다.

“우욱….”

분주하게 움직이던 수잔의 손놀림이 딱 멎었다. 다른 의미로 위장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나디아는 당황스러워하며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음식 냄새를 맡을 때마다 속이 뒤집히고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마, 마님, 괜찮으세요…?”

그녀는 수잔에게 음식을 다시 내어 가라고 간신히 손짓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잔이 당황한 얼굴로 접시들을 도로 트레이 위로 옮기다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화색을 띠었다.

“혹시 아이가 들어선 것 아녀요? 어머, 어머, 이럴 때가! 마님, 치료사를 불러올게요!”

수잔이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더니 트레이를 밀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코를 틀어막았다.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매던 눈이 발코니 바깥에서 얼어붙은 아실의 시선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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