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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23화 (23/115)

23.

기나긴 복도의 한 중간에 여봐란듯이 열려 있는 문이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너 같은 게 마법사랍시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격이 떨어진다고…!”

“각하께서도 무슨 생각이신지, 근본도 모르는 년을….”

열린 문틈으로 불빛과 함께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와장창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마법사? 나디아는 서둘러 문 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로브를 걸친 남자 셋이 등을 보인 채 방 안의 물건들을 함부로 내던지고, 짓밟으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각종 말린 약초와 걸쭉한 액체가 들어찬 유리병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몇 개는 깨져서 내용물이 흘러나와 온통 엉망이었다.

분을 못 이긴 듯이 씩씩거리던 사내가 벽 한쪽에 늘어져 있던 낡은 책에 손을 대자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드리지 말아요!”

나디아는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남자들이 위협적으로 둘러싼 공간 한가운데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가늘게 떨면서 간신히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주황빛 불빛 아래에서도 눈에 띌 만큼 창백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세 사람이 한 명을 핍박하는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디아가 굳이 그 상황 속에 비집고 들어간 것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녀는 성의 안주인이었고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란에 참견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슨 소란이죠?”

네 사람의 시선이 한 번에 내리꽂혔다. 어깨가 조금 떨렸지만 나디아는 그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넘기며 아수라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녀를 알아본 남자 마법사들의 얼굴 위로 낭패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나디아는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는 타샤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는 제 목소리가 위엄 있게 들리길 바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이냐고 물었어요.”

“마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럼 신경 쓰이지 않게 했어야죠.”

가장 키가 큰 남자가 한걸음 앞에 나서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디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가 말해 보겠어요?”

“제가 말씀드리지요.”

가장 키가 작은 남자가 나섰다. 헝클어진 짧은 금발 머리를 가진 그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타샤를 쏘아보더니 제 이름이 세반이라 밝히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장 키가 큰 남자 마법사 코브의 연구실에 불이 났는데 침구나 책들은 멀쩡하고 그의 연구 자료를 기록해 둔 양피지 더미와 귀중한 시약 및 마법 재료만 홀라당 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범인으로 타샤를 지목했고, 그만큼 섬세하게 화염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많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타샤는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다. 그들 사이에 설명하지 않은 깊은 골이 있음은 굳이 듣지 않아도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디아는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는 고민하는 체하며 시간을 조금 끌었다가 물었다.

“코브 님은 피해자이니 그렇다 치고, 두 분은 왜 여기까지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두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모든 행동이 정당한 추궁이라 생각했겠지만 타샤를 향한 적대감과 경멸이 충분히 느껴졌다.

여자라서, 혹은 집시 핏줄이라서, 또는 그녀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디아의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사내 셋이서 한 여자를 둘러싸고 겁박하다니, 썩 보기 좋지는 않군요.”

“겁박이라뇨. 말씀이 심하십니다.”

코브가 발끈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타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마법사에게 빚을 져 두면 언제 어느 때고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오랜 격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은 몰랐지만.

에드윈의 명령이기는 했지만 효과 좋은 펜던트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조금쯤은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팔이 안으로 굽은 셈이었다.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평소에 싫어하던 사람이라고 하여 우르르 몰려와 방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비겁하기는 마찬가지이니 딱히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제 있었던 일인가요, 그 화재?”

“정오입니다. 식사를 하고 돌아왔더니 말씀드렸던 그 꼴이 나 있었죠.”

“타샤 님이 그랬다는 목격자가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

나디아는 안타깝다는 듯이 눈썹을 모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타샤는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겠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물러나 있었다. 세 남자를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에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해서 조금 우스웠다.

“그야 그렇겠죠. 타샤 님은 저와 있었으니까요.”

“예?”

“제가 같이 오찬을 들자고 했어요. 이… 펜던트의 원리가 너무 궁금해서요.”

나디아는 보란 듯이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푸른빛으로 빛나는 보석에 와 박혔다. 타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왜 그녀가 제 편을 드는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는지 남자들을 향해 당당한 얼굴로 ‘들었죠?’ 하고 쏘아붙였다. 나디아는 이 눈치 빠른 여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모쪼록 범인을 잡을 수 있길 바라요.”

부드러운 축객령과 함께 나디아는 그들이 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며 나서는 세 남자들의 뒤로 타샤가 청구서를 보내겠다며 소리쳤다.

방을 빠져나간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디아는 두꺼운 나무 문을 닫았다. 마법사가 아주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귀부인. 무슨 속셈이신지는 모르겠지만요.”

공손하게 숙여진 머리와는 다르게 건방지게 느껴질 만한 말투였지만 나디아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우아하게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나 보죠?”

“저 새끼,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여자인 제 실력이 자기들보다 뛰어난 게 아니꼬운 거죠.”

그녀의 말투는 신랄했다.

“불은 제가 지른 게 맞아요.”

저녁을 먹었다는 말을 하듯이 여상한 어조로 이어진 뒷말은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디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누명인 줄 알았더니.

“열심히 잡아떼던 중이지만요.”

“그렇군요.”

나디아는 시선을 내려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약초는 흘러나온 액체들에 젖어 엉망이 되었고, 깨진 유리 조각과 도자기들이 어지러웠다. 타샤의 시선 역시 아래로 향하더니 이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물건들이 무엇이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타샤의 표정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또 올까요?”

“그렇겠지만,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나디아는 더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청소는 해야 할 테니 하녀를 보내 줄게요.”

“감사합니다, 귀부인.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나디아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챘다. 마법사인 이상 그녀도 오랜 격언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그들은 은원을 쉽게 잊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훗날 그녀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폭풍이라도 밀려오는지 천둥 번개 소리가 요란했다.

궂은 날씨에도 성은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에드윈이 남부의 귀족들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의논할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따분하게 회의만 하다 돌려보낼 순 없었기에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요란뻑적지근한 연회가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나디아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홀과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연회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살펴야 했다. 그러고는 방으로 돌아와 치장을 한 뒤 홀로 내려와 에드윈과 나란히 선 채 속속 들어오는 귀족들을 맞이했다.

홀에 깔려 있던 값비싼 양탄자가 빗물과 흙탕물로 젖어 들었다. 거센 비바람을 뚫고 온 자들은 모두 홀딱 젖어있었지만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나디아는 그들이 투덜거리지 않는 것에 놀라워했다. 귀족들이란 제 옷자락에 물 한 방울만 튀어도 난리법석을 떠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에드윈의 통솔력이 대단하다고 보아야 하나.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았소. 하인들이 방으로 안내해 줄 테니 푹 쉬고, 저녁에는 연회를 준비했으니 참석해 주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각하.”

그들은 차례로 나디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한 뒤 하인들의 안내를 따라 준비된 방으로 향했다. 마구간지기들은 지친 말들을 토닥이며 축사로 데려가고, 호위를 위해 따라온 기사들이 복작거렸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에드윈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이끌었다.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진 나디아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대화라는 것을 제대로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주로 에드윈이 말하면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신음하거나 울면 됐으니까.

“그리 긴장할 것 없어. 당신은 그저 내 옆에 앉아서 웃고 있기만 하면 되니까.”

“알겠어요.”

에드윈의 손끝이 부드럽게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스르르 움직여 그녀의 턱을 밀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입을 맞춰 왔다. 말랑한 입술이 몇 번이나 가볍게 맞붙으며 쪽, 쪽, 버드 키스를 퍼부었다.

주위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았기에 나디아는 뺨을 살짝 붉혔다. 왜 답지 않게 달콤한 짓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밀어내고 싶을 만큼 싫은 건 아니었다.

반복되는 짧은 입맞춤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입술을 강하게 누르던 혀가 밀려 들어왔다. 민망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묘한 흥분에 눈가가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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