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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22화 (22/115)

22.

무더위는 점점 더 기승을 부렸다. 수도와는 차원이 다른 더위였다. 근처에 강이 있어서인지 습도가 높고 더운 공기는 피부에 착 달라붙어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밀라는 2주 정도만 더 지나면 우기가 와서 더위도 한풀 꺾일 거라며 나디아를 달랬다.

우기라….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간, 본격적으로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아사람 강변의 둑을 보수를 한다느니 더 높게 쌓는 것이 좋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비가 내내 내리는 시기라는 건 나디아의 궁금증을 자극했지만, 앞으로 2주나 더 이 무더위를 견뎌야 한다는 것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수도와 다른 날씨에 쉬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거나 차가운 물을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지냈다. 그마저도 몸을 차게 하면 좋지 않다며 잠시로 만족해야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불볕더위는 뜨거운 열기를 견디는 것만 힘든 게 아니었다. 더위에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식욕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입 안이 까끌까끌하고 무엇을 먹어도 쓰게 느껴지는 탓에 기름진 음식은 도무지 넘어가지가 않았다. 상큼한 맛이 나는 과일 몇 조각을 먹거나 얼음을 띄운 과실 차만 들이켜는 것으로 버티기를 며칠간 반복하자 나디아는 눈에 띄게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더위가 수그러들지 않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짜증이 늘고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그녀는 한낮이 되어서야 기운 없고 나른한 몸으로 피곤에 못 이겨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하녀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내 옆에 붙어서 부채질을 해 주거나 차가운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었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그들이 성의 안주인을 걱정하는 소리가 에드윈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그는 어느 늦은 오후에 그녀의 방으로 마법사를 한 명 보내 주었다.

마법사라기에 막연하게 하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노인을 상상했던 나디아는 서른이 될까 말까 해 보이는 젊은 여인의 방문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여인은 덥지도 않은지 감색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차림으로 나타나 공손한 인사를 건네 왔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귀부인. 타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나디아는 지나치게 관찰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로브 아래로 늘어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고 드러난 손등은 창백했다.

꽤 내향적인 성격인지 그 잠깐의 시선마저도 불편한 기색이기에 나디아는 티끌만큼 남아 있던 배려심을 발휘해 호기심을 한 겹 접었다.

타샤는 품 안에서 투명한 푸른색 보석이 박힌 펜던트 하나를 꺼내더니 나디아에게 건네주었다. 여인이 건네는 것을 받아 들자마자 엄청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시원함이 퍼져 나갔다. 정말이지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타샤는 안심한 기색으로 몸에 지니고 있기만 하면 시원해질 거라는 단순한 사용 방법을 알려 주었다. 대단히 거창한 마법이 아닌 이런 마도구 하나로도 그동안의 괴로움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타샤는 작동이 되지 않으면 마력이 떨어진 것이니 다른 마법사가 아니라 저에게 가져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나디아가 무어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인사를 하고는 나가 버렸다.

낯가림이 심한 건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냉랭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너무 신기해서 어려운 성격만 아니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성에 머물고 있으니 알은체하며 말을 걸어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디아는 손에 쥐고 있던 펜던트를 냉큼 목에 걸었다. 여름 동안은 이걸 내내 건 채로 지내면 될 모양이었다.

사흘쯤 지나자 식욕도 평소대로 돌아왔다. 잠도 그럭저럭 잘 수 있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나른한 것은 여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머리만 댔다 하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피곤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시달리던 사이에 몸이 많이 허약해졌나 싶었다. 그녀는 온종일 먹거나 자고, 잠에서 깨면 또 먹거나 다시 자는 일을 반복했다.

게으른 여주인이라며 아랫것들이 흉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도 이내 한낮의 오수와 함께 스러져 갔다.

수도로 떠났던 아실은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에서야 돌아왔다.

나디아는 마중 나가지 않았다. 혹여 에드윈에게 꼬투리 잡힐 만한 일이 또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성의 안주인이 한낱 기사인 아실을 챙긴다는 게 과해 보이긴 했다.

그녀는 그저 발코니의 커튼 뒤에 반쯤 숨은 채 당당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오르는 아실의 모습을 훔쳐보았을 뿐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마주할 수 없어 도망쳤던 과거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문득, 그가 태도를 확실히 하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 무엇도 제대로 정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짙은 후회에 잠겼다. 아실이 단념할 마음을 먹은 것처럼 대할 때 그녀도 어른스럽게 받아들이고 멀어졌어야 옳았다. 그에게 끈 팔찌를 건네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냉담한 태도에 서운함을 느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가 붙잡고, 그가 끝내려는 듯하면 그녀가 붙잡는 꼴이 되어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것은 명백하게도 나디아였다.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는데. 마치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날 뒷골목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에게 작별을 고하는 게 옳았다. 그랬다면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더라도, 그는 그대로 삶을 살고 그녀는 그녀대로 괴짜 남편의 비위를 맞춰 가며 살았겠지.

감정이 널을 뛰었다. 아실이 왜 자신에게 집착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출신이 한미하다 해도 그는 이제 한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작위와 영토가 생긴 데다 젊고 준수하기까지 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가문의 혼처가 줄을 설 텐데, 굳이 다른 남자의, 그것도 주군의 아내가 된 여자에게 매달릴 이유는 없을 텐데.

지독히도 비이성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이성으로 통제가 가능하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을 일도 없었겠지. 단념은 빠르기만 했다.

***

아실이 귀환한 바로 다음 날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기의 시작이었다.

후원의 잔디밭 위로 물웅덩이가 생기고 연못은 물론 강물도 불어났다. 높게 쌓은 둑 덕분에 피해는 없었지만 야외 활동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정원사가 공들여 가꾼 정원을 돌아다니며 꽃향기를 즐기던 산책은 성안을 돌아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느린 걸음으로 성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그녀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마법사들의 흔적이었다.

언제든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욕실의 수도꼭지와 기름이 필요하지 않은 램프 같은 사소한 것부터 나디아의 방 옆에 있는 온실을 유지하는 마법과 엘란츠 성을 휘감고 도는 방어 마법까지, 그들의 흔적은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성안에 가득했다.

마법사들은 넓은 식당이든 복도 한구석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서넛씩 모였다 하면 초췌한 낯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써 가며 토론에 열을 올리기 일쑤였다.

마법사들을 우연히 마주치면 낯익은 얼굴이 있는지 살피곤 했지만, 그 틈에 타샤가 없더라도 굳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법사에게 가진 것은 약간의 호기심 정도였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아주 귀한 존재였다. 황궁은 물론 잉그램 공작의 영지에도 마법사가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탑에 틀어박혀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할 연구에 몰두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기가 아닌 이상 쉬이 목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수도의 잉그램 저택에서 자란 나디아가 그들을 만날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동화책에서 떠들어 대는 단편적인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마주하게 된 신비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때는 마법사를 얼마나 많이 거느리고 있는지가 곧 영주들의 힘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로 여겨지는 요즘 같은 때, 마법사를 많이 데리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충성심보다 능력을 인정해 주고 자신들의 학구열을 충족시키는 데에 드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에게 기사와 같은 충성심을 기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영주와 마법사의 관계는 일종의 거래였다.

좋은 조건을 골라 갈 수 있으니만큼 더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진 권력자에게 마법사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이제 와서는 부의 과시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변경이라면 투자한 만큼 쓸모를 뽑아내기에 충분했다.

엘란츠 후작은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부유한 인물이었고, 변경을 수호하는 가문인 만큼 마법사를 적극적으로 고용했다.

남자들 사이에 끼어들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기에 그나마 안면이 있고 동성인 타샤를 만나는 요행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다녔다.

소란을 마주하게 된 것은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밖은 어김없이 쏟아지는 비로 온통 축축했고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해 늦은 저녁처럼 캄캄했다.

환하게 밝혀져 있는 램프 불빛을 따라 특별한 목적 없이 걷던 나디아는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다. 그제야 그녀는 평소 걸음 할 일이 없었던 북쪽 별관 인근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일에 굳이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들 사이에 희미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고요! 터무니없는….”

“…마! 누가 천한….”

드문드문 들리던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혹시나 성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나디아는 걸음을 서둘렀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감히 누가 후작 부인에게 해를 끼칠까 하는 안일함으로 이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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