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20화 (20/115)

20.

그녀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 눌린 자국조차 없는 것을 보면 에드윈은 여기 눕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디아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고 나른했다. 얇은 이불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며 나신이 드러났다. 다리 사이에서 미지근한 액체가 줄줄 새는 것을 느끼면서 나디아는 침대 위에 늘어진 줄을 잡아당겼다.

이젠 그다지 부끄럽게 여겨지지도 않는 감각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리고 하녀 두엇이 들어와 인사했다.

“마님, 목욕하시겠어요?”

“…응.”

목소리가 반쯤 쉬어 있었다. 나디아는 이불을 몸에 둘둘 감은 채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후들거렸다. 발코니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나디아는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한 뒤 늦은 아침을 먹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운 산책을 나선 그녀는 후원의 연못가를 거닐다 이제는 충분히 익숙해져 헤매지 않아도 되는 관목 미로 안으로 들어섰다. 풀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녀는 이 미로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이것을 무서워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곳이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미로의 한가운데에는 해를 가리기 위한 가제보(Gazebo)가 있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그녀가 미로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걸 안 에드윈이 어느 날, 별일 아닌 것처럼 선물이니 확인해 보라 했던 것이었다.

에드윈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그저 욕구를 풀기 위해 곁에 두는 고급 창녀처럼 대하기 일쑤면서 때로는 사려 깊고 다정한 남편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천하의 개자식처럼 굴었다.

무심한 것 같다가 또 어느 때는 관대하기도 했고 충격적인 진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나디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았자 그녀는 그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다른 생각에 잠겼던 탓일까,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허리를 낚아채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간 나디아는 누군가의 가슴팍에 어깨를 부딪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하였으나 그보다 먼저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저를 낚아챈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입을 막았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키가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실!”

비명과도 같은 부름이었다. 아실이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세우며 쉿, 하고 속삭였다. 나디아는 아직도 올랑올랑하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숨도 쉬지 못한 채 질문을 쏟아 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진정해.”

두어 번 어깨가 크게 들썩인 이후에야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디아는 뒤늦게 제가 아직도 아실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아실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나디아는 방어적인 태도로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하고 가 줬으면 좋겠어.”

아실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한걸음은 그녀의 것의 두 배는 되어서 떨어졌던 거리가 금세 다시 가까워졌다.

“나는 정말 당신을 모르겠어. 나를 얼마나 뒤흔들고 싶은 건지….”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손을 잡아오는 아실의 손목에는 어제 그녀가 떠넘기다시피 몰래 주었던 끈 팔찌가 걸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정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심장이 시끄럽게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부끄러웠다.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했던 갈팡질팡하는 속내가 모두 읽힌 것 같았다.

“왜 내게 팔찌를 줬어? 수도의 귀부인들처럼 정부로 삼고 싶기라도 한 건가?”

“뭐라고?”

조급한 어조로 속삭여 오는 목소리에 긴장한 탓인지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나디아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면 뭔데?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네 입으로 말해 봐. 내가 어쩌길 바라? 정말 내버려두길 원한다면 왜 내게 팔찌를 줬어?”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그 행동에 대해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디아는 바짝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굴렸다.

내가 멍청했지. 그딴 짓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가슴속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한심한 자신을 드러낸 기분이었다.

나디아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손목에 감겨 있는 팔찌로 손을 뻗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다만 그의 손목에 걸려 있는 색색의 팔찌를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눈치챈 듯, 아실은 손을 뒤로 물렸다.

“나 수도로 떠나.”

“…뭐?”

나디아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실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눈만큼은 감추지 못한 감정들로 일렁거렸다.

“잠깐 다녀오는 거야.”

떠난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 너무도 창피했다.

“…그동안, 결정해. 정말 내가 네 인생에서 사라져 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희망을 주지 마.”

“무슨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되물었지만, 사실 나디아는 뼈아픈 배신과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끔찍한 관계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인정하기도 전에 아실은 그녀보다도 먼저 알아챘던 것이 분명했다. 나디아는 그런 자신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 서러워졌다.

“왜… 왜 가는 건데?”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짠 탓에 목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잖아. 한심한 물음이었다. 어떻게든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던 얄팍한 속내도 있었다.

“기사단장 임명식이 있어. 내가 기사단 단장을 맡게 됐거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실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무언가를 뱉어 내려던 아실이 마지못해 삼키듯 말을 멈추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나디아는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잠시 지나간 말에 생각을 기울이는 사이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쳐 버렸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맞춰도 될까?”

허락을 구하는 말이었다. 나디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어째서 입맞춤을 허락받는 말로 흘러왔는지. 그녀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이번엔 들어주려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아실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런 말을 내뱉은 제 혀를 깨물고 싶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님!”

멀찍이서 수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나디아가 화들짝 놀랐다. 아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하인들은 이 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곳도 아니었지만.

나디아는 아실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를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미로를 빠져나오던 그녀의 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뒤를 돌아본 나디아의 시야에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 얼굴을 한번 쓸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나왔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아실은 수행 기사 몇몇과 함께 길을 떠났다.

에드윈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이 성 앞에서 가볍게 그를 배웅했다. 나디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실이 두어 번 수행을 맡은 적이 있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그것 외의 접점은 없기도 했고,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기에 굳이 후작 부인까지 배웅을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디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드윈의 옆에 섰다.

은빛 갑주 위로 가시덩굴이 얽힌 검 문장이 새겨져 있는 붉은색 서코트를 걸친 아실은 눈부실 만큼 늠름하고 멋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와 있던 어린 하녀들이 저들끼리 그를 곁눈질하며 얼굴을 붉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안주인 역할을 한다는 말은 정당했지만 그녀는 내심 심란해하는 중이었다.

미로 속에서 아실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의 우유부단함을 꼬집는 듯한 그 말들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 말들을 되뇌이다 보면 솜털이 쭈뼛 설 만큼 부끄러웠다가, 자기가 뭐라고 제게 냉랭하게 구는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에드윈의 변덕을 닮아 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하던 아실의 시선이 나디아에게 제법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모른 척 피한 채로 혹여나 에드윈이 수상쩍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마음 졸이며 좌불안석해야 했다. 잠이나 더 잘 것을 왜 이 자리에 나왔나, 하고 후회마저 생겼다.

다행히 별다른 일 없이 아실이 성을 떠나고 배웅을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홀 안으로 들어온 에드윈은 나디아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기며 남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엉덩이를 더듬어 댔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기사 몇몇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더 자는 게 어때?”

“자, 잠은 충분히 잤어요.”

나디아는 슬금슬금 가슴을 주무르려 드는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애쓰며 대답했다.

“그럼 대신 다른 걸 할까?”

그가 귓속으로 혀를 쑤셔 넣었다. 순식간에 귓속이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이곳이 홀 한가운데라는 사실은 그의 안중에도 없는 듯하였다. 나디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뒤로 빼며 그를 밀어냈다.

“남들이 보잖아요!”

“안 보면 상관없어?”

에드윈은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필사적으로 그들을 모른 척하고 있는 기사와 하인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꺼져!”

수행하던 사람들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넓은 홀 안에 에드윈과 나디아 둘만 남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만한 짓거리에 나디아가 기함하는 것을 보고 에드윈은 외려 즐겁다는 듯이 낄낄댔다.

“여긴 뭐 하러 나온 거지?”

에드윈이 나디아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계단 난간에 앉히고는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그 사이로 허리를 끼워 넣었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던 것을 그만두고 서둘러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난간 폭이 좁은 탓에 그가 그녀의 허리 뒤로 두른 손을 떼어 내면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불안해하든 말든 에드윈의 손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옆으로 트인 치마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저는 이 성의 안주인으로서….”

“쿠르쉬드, 그 천한 놈이랑 개처럼 붙어먹었어?”

나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장이 바닥에 패대기쳐진 기분이었다. 그의 천박한 말투 때문이기도 했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언가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어제 후원에서? 그가 바짝 굳어 버린 제 반응을 말투 때문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며 나디아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요하게 나디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엔 미심쩍다는 기색이 선명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사람답지 않게 음탕한 짓거리를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