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8화 (18/115)

18.

나디아는 꼬마들이 들고 다니던 구름같이 몽실몽실한 과자를 하나 사서 베키와 나눠 먹고, 사탕수수가 잔뜩 담긴 수레를 끌고 다니며 즙을 짜 주는 상인을 붙잡아 주스를 한잔 마셨다.

손가락이 온통 끈적거릴 정도로 단 과자와 미지근한 주스는 가라앉았던 기분을 띄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뒤이어 장신구가 가득 쌓인 좌판을 둘러보다 얼떨결에 집시 상인에게서 세 가지 색 끈으로 엮어 손목에 비끄러맬 수 있는 팔찌를 두 개 샀다. 왜 같은 것을 두개나 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상인은 그녀가 환불해 달라 할 것이라 여겼는지 다급하게 입을 놀렸다.

“착용한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물건입니다. 저희 부족에서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곤 하죠.”

그러고선 그 팔찌를 하고 있음으로 인해 피할 수 있었던 위험한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 언변이 어찌나 현란한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손에 팔찌 두 개를 든 채 마차로 돌아온 뒤였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선물하라고? 난감한 얼굴로 팔찌를 내려다보던 나디아는 짧은 고민에 빠졌다.

가족들에게 이 팔찌를 선물했을 때의 반응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분명히 쓰레기라 부르며 손에 쥐는 것조차 싫어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선물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친구라고 부를만한 관계에 있는 귀족 영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네들에게 선물이란 숨이 막힐 듯이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는 화려한 꽃다발이나 알이 굵고 반짝이는 보석, 그도 아니면 최신 유행을 따른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이런 물건은 모욕으로 여길 것이 분명하니 제외해야 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왜 이런 것을 샀는지 모르겠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이런 하잘것없는 물건을 누군가 선물이랍시고 건네주었다면 그녀도 똑같이 모욕당한 기분을 느꼈을 거면서.

연인. 연인이라. 남편보다도 먼저 아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누가 제 생각을 듣지는 않았을지 한심한 걱정을 하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역시 값을 돌려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많은 인파 사이에서 그 집시 상인 하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성으로 돌아가기 전, 마차는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개울가에 멈춰 섰다. 마을 외곽까지 빙 둘러 가야 있는 곳이라 인적은 드물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나디아는 맑은 소리를 내려 흘러가는 냇물을 둑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훅 불어와 그녀의 치맛자락이 휘날렸다.

그녀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경사진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급하게 뒤를 따라 내려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베키에게 사소한 부탁을 할 요량으로 돌아서며 발을 내밀었다.

“나 이거 벗겨 줄래?”

그녀의 말에 군말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자그마한 하녀 아이가 아니라 붉은 머리의 기사였다. 나디아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그녀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아실은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순식간에 샌들을 벗겼다. 그녀가 껄끄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가 일어서더니 한걸음 물러났다.

나디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여전히 그에게 발목을 잡힌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녀는 조금 서두르듯이 물가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치맛자락을 잡고 발끝을 담갔다.

물은 놀라우리만치 차가웠다. 종아리에 닿을락 말락 하는 얕은 깊이의 물을 이리저리 밟으며 첨벙거리던 나디아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 바로 옆에 있던 베키를 잡아끌었다.

“너도 들어와 보렴. 아주 시원해.”

베키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나디아가 재촉하자 못이기는 척 신발을 벗었다. 바닥에 깔린 돌이 미끄러워 넘어질지도 모른다며 팔 한쪽을 잡아 주는 베키와 함께 그녀는 기품 같은 것은 모르는 시골 소녀처럼 물장난을 쳤다.

귀족 영애라는 신분을 꼬리표처럼 달고는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게 귀부인으로 바뀌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괜찮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나 이렇게 해 보고 싶었다. 광장의 커다란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의 냄새를 맡았을 때, 큰 비가 내린 뒤 정원 잔디밭 위로 맑은 웅덩이가 생긴 것을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게 웃어 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 못지않게 들뜬 것처럼 보이는 베키가 예쁜 조약돌을 줍겠다며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던 나디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저만치서 그녀를 넋이 나간 듯 바라보던 아실과 눈이 마주쳤다.

나디아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몸이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 남자는 어째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마치 어찌할 수 없이 위험한 무언가를 맞닥뜨린 듯한, 혹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 머물러 있던 그 표정이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을 때 나디아도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성의 뒤편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물 속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한기가 들었다.

그녀는 벗어 두었던 샌들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베키가 첨벙이며 뭍으로 올라가고 나디아도 소녀의 뒤를 따르려 했을 때 갑작스럽게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는 아실의 품 안에 있었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성큼성큼 둑을 거슬러 올라갔고 그 뒤로 베키가 나디아의 샌들을 든 채로 허둥지둥 따라 올라왔다.

아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이 작게 오르내렸다.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이라는 듯이.

그녀는 뒤따르는 베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실의 옷깃 안쪽에 끈 팔찌를 끼웠다. 누군가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는, 아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제 옷깃을 파고드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실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아주 오래도록 그녀에게 머물렀다. 나디아는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그의 딱딱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졌음을 느꼈다.

그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낀 것도 잠시, 방으로 돌아오자 그 감정은 서서히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나디아는 돌아오는 내내 주먹 안에 꽉 쥐고 있었던 끈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짝인 것처럼 똑같이 생긴 장신구를 나눠 가진 꼴이라니.

무슨 생각으로 그리 대담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제발 내버려 두라고 애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방 안을 서성이며 스스로를 윽박질렀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나디아는 한참을 망설이다 팔찌를 화장대의 맨 아래 서랍에 집어넣었다. 아실에게 준 팔찌와 똑같은 것을 당당하게 하고 다닐 배짱은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제 감정에만 취해 있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문이 들었다. 아실은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그의 애매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헛된 희망을 품게 된 그녀의 꼴을 보라. 그저 좀 노는 것이라며 비웃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졌다.

그의 놀이는 끝나지 않은 것일까? 주군의 아내와 불장난이라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고 싶어서? 아실이 그런 사람이었던가? 그저 수작일 뿐이라면 강가에서 마주했던 그 얼굴은 뭐였을까?

나디아는 그에 대해 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한때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오늘따라 스스로의 행동이 자제가 되질 않았다. 나디아는 초조해하며 방 안을 거닐던 것을 그만두고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아실에게 달려가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날 온실을 찾아와 하려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느냐고. 내가 겁쟁이라서 피해 버렸던 그때, 피하지 않았더라면 무슨 말을 하려 했느냐고.

그러나 그녀가 손잡이를 당기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나디아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에드윈이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그녀를 훑어보더니 예의 그 다정한 체하는 미소를 띄웠다. 나디아는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다.

“어디 가려고?”

“네? 아뇨, 아뇨. 별거 아니에요.”

그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이 이성적으로 돌아갔다.

이 시간에 아실을 어떻게 만나겠다는 것인지. 기사단 숙소로 찾아가기라도 하려 했나? 그러다 누군가의 눈에 뜨여 에드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대체 뭐라고 변명을 했을지.

늦은 시간에 홀로 외간 남자를 찾아간 것을 무어라 변명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실의 거처는 알지도 못했다.

나디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기라도 하고 싶었다. 얼마나 한심한지. 차라리 에드윈이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인사랍시고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더니 반대 쪽 뺨을 핥고는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나디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드윈은 마치 제 방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더니 나디아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이 음식을 들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외출은 어땠지? 즐거웠나?”

“네,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는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남은 하인이 따라 준 와인을 마시며 대꾸했다. 음식 냄새를 맡자 잊고 있던 허기가 찾아왔다. 에드윈은 나디아의 앞에 있던 잔에 그녀가 좋아하는 사과주를 따라 주었다.

그녀는 그가 다정한 태도를 취할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변덕으로 가득한 그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 바짝 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왔어. 부디 당신이 식사 전이길 바라.”

뒤늦은 통보나 다름없었지만 마침 그녀도 배가 고팠던 탓에 굳이 토 달지 않았다. 나디아는 달짝지근한 사과주로 입술을 축이고 음식을 접시에 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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