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디아는 차를 뱉을 뻔했다. 간신히 품위를 지킨 그녀는 제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나리오가 지나치다가, 나디아는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놀리지 마세요.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
“당연히 선대 황제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그렇지만!”
혼란스러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기분이었다. 그가 정말로 황제의 사생아라면 어째서 엘란츠 후작이 되었단 말인가? 아버지가 선대 황제라면 그의 어머니는 또 누구란 말인가?
에드윈은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디아의 넋 나간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그녀를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진짜인 것 같다가도 빙글빙글 웃고 있는 에드윈의 얼굴을 보면 모두 거짓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으로 입에 담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내용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군.”
“구, 궁금하지 않아요!”
나디아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현명한 대답이야.”
드디어 떠나려는 모양이라며 나디아는 반색했다. 에드윈은 구겨진 옷자락을 털고 매무새를 다듬더니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 위에 입 맞춘 뒤 눈을 찡긋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남편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유쾌함을 가장했지만 그는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굴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나디아는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안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구경도 좀 하고 그래. 기사를 붙여 줄 테니까.”
그가 다정한 체 굴 때마다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몇 번이고 속아 넘어갈 뻔했던 달짝지근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 절로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알았어요.”
나디아는 얌전히 대답했다.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에드윈이 남기고 간 몇 마디 말을 근거로 자꾸만 인과 관계를 따져 보려는 자신을 말리며 나디아는 그 말들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알아 두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와 에드윈 사이에 대해 궁금해했던 것조차 후회스러워졌다.
그런 사실을 그저 그녀의 놀라는 반응 하나 보겠다고 언급한 그의 사고방식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하는 터무니없는 행동에 놀라지 말자고 매번 새로 하는 다짐은 매번 깨졌다.
선황의 사생아라니. 들려오는 추잡한 소문 중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아니, 있었던가? 주의를 기울여 기억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듣고도 잊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선황이라면 어머니는 누구라는 이야기인지. 에드윈의 어머니인 엘란츠 후작 부인, 아델라 황녀는 선황의 동생이었다. 결혼 당시 후작의 나이가 예순이 가까웠으니 후계를 보기 어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게 황제의 사생아를 양자로 받아들일 이유가 될까?
그녀 혼자 아무리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선황과 전대 엘란츠 후작은 죽었고, 아델라 황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요양을 떠났다. 에드윈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더 물어볼 배짱은 없었다. 나디아는 궁금증을 덮기로 마음먹었다.
성안에만 있지 말고 외출도 하라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 며칠 후 에드윈은 마차를 준비했다며 외출을 종용했다.
“나랑 있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
그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웃음을 흘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떠나 버렸다. 나디아는 얼떨떨해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가볍게 풀어헤친 그녀는 수잔 대신 엘하임 토박이라는 하녀 한 명과 함께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성문 앞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웠기에 떨떠름한 낯을 하긴 했지만 내심 반가운 제안이었다. 수도와 다른 건물들도 신기했고 다른 디자인의 옷 외에도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건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샘솟았다.
또한 기회만 된다면 강가에 가 보고 싶었다. 아사람강은 굉장히 큰 강이었기 때문에 수심이 깊어 물놀이를 즐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지만 큰 강이니만큼 아사람으로 물줄기가 이어지는 작은 샛강도 많았다. 시내에 가까운 얕은 물에 발을 담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나디아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것을 감추려 천천히 걸었다. 저만치 평범해 보이는 마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붉은 머리의 기사를 본 순간 그녀의 걸음이 뚝 멎었다.
“마님?”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하녀가 의아해하며 불렀다. 나디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걸었다. 나이든 마부가 공손하게 하는 인사를 받아 주자 뒤이어 아실이 냉락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린 하녀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나디아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귀부인,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해요, 쿠르쉬드 경.”
나디아는 손등에 입 맞추려는 그를 피해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하녀와 아실이 올라탔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아실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을 섞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고개를 돌려 작은 창문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실이 앞쪽 벽을 두드리자 마차가 덜컹이며 출발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불편한 침묵을 깨고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호, 혹시 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마님?”
“네 이름이 뭐지?”
나디아는 주근깨가 흩어진 발그레한 뺨을 보며 물었다. 어린 하녀는 불안한 듯이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베키예요, 마님.”
“베키, 네가 소개해 줘야지.”
싱긋 웃자 금세 활달해진 소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냥 어려 보인다 생각했는데 그녀는 제법 괜찮은 안내역이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시끌시끌한 시장 앞에서 내렸다. 부두와 인접한 시장은 인파가 많아 혼잡했다.
규모에 놀란 것도 잠시, 온갖 냄새가 달려들었다. 불을 지피는지 어디선가 풍겨 오는 매캐한 연기 냄새와 낯설기 짝이 없는 향신료들이 풍겨 대는 코를 톡 쏘는 듯이 강렬한 냄새, 정육점에서 풍겨 오는 희미한 피비린내와 바람이 불어올 때면 강에서 올라온 상쾌한 물 냄새와 골목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진한 향유의 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식욕을 자극하는 구수한 고기 냄새가 났다.
식사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 가며 주위를 구경했다. 차락차락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히는 색색의 구슬을 꿴 목걸이와 귀걸이 따위를 늘어놓고 파는 가판대를 지나치고 화려하고 반복적인 무늬가 빽빽하게 수놓여진 옷감을 파는 가게 역시 지나쳤다.
박제된 사슴 머리통이 걸려 있는 가게에는 덩치 큰 사내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로 달려드는 파리를 쫓아내고 있었다. 그 옆의 생선 가게에서는 팔딱이는 생선의 머리를 쳐 내는 나이든 여인 앞을 지저분한 고양이들이 시끄럽게 야옹거리며 맴돌았다.
그녀가 고양이들을 들여다보느라 혼을 빼놓고 있던 참이었다. 누군가의 팔이 나디아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그녀의 입술을 타고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바로 뒤쪽으로 듣도 보도 못한 모양새의 과일이 산처럼 쌓인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깜짝 놀란 탓인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들려오는 심장소리가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결에 짚은 탄탄한 가슴팍에서 그녀의 것과 비슷한 속도로 쿵쾅거리는 요란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녀는 안정감까지 느껴지는 품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위험했습니다, 귀부인.”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마워요, 하고 속삭인 뒤 그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밀려나는 대신 마치 놓아주기 싫은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옆에서 베키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디아는 이 단 한 번의 포옹, 아니 포옹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접촉으로 제가 다정했던 아실을 잊지 못했다는 사실만 새삼스레 깨닫게 되어 비참해졌다.
들떴던 기분이 거짓말 같았다. 제게 그리도 심한 짓을 했던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디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봐도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으면 했다. 성안에서 다른 기사들을 마주쳤을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기를 바랐다.
이 복잡한 감정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사랑? 그리움? 죄책감? 비참함? 불안? 결코 한 가지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그를 마주칠 일이 영영 없었더라면 정리하기 더욱 쉬웠을 텐데. 이 야속한 남자는 잊을 만하면 그녀의 앞에 나타나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그날 이후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다신 나오지 말라고 윽박질러 두었던,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만 요동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아실에게만큼은 매달리고 싶지 않았건만, 고약한 성미를 지닌 남편에게 데여 홀로 울 때마다 따뜻했던 품이 그리워졌다.
그 욕망은 나디아를 자꾸만 한심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황궁의 외진 방에서 겪었던 일을 되새기며 그를 비난할라치면 어딘가에서 아실을 두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답을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길 잃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춰 선….
나디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장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뒤에서 아실과 베키가 쫓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든 좋으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던 탓에 그녀는 여기저기 널린 물건들을 구경하고 누구든 멈춰 세우지 못해 안달인 상인들의 호객 행위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