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달거리를 하는 내내 그녀는 약차와 단 음식을 달고 살았다. 통증 자체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기분까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피가 비치는 양이 극도로 적었지만 불쾌감은 여전했다.
나디아는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을 설탕과 크림이 가득 들어간 파이를 홀로 다 먹어 치우곤 온실에 앉아 나이 든 고양이처럼 햇볕을 쬐며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곳곳에 심어진 화려하고 이국적인 꽃들이 달큼한 향기를 사방에 뿌려 댔다. 온실 내부는 조금 덥다 싶을 만한 온도라 이마에 습하게 땀이 배어났지만 그럼에도 드문드문 오한이 드는지라 그녀에게는 딱 좋았다. 평소대로의 주기라면 모레쯤 이 불편함도 끝날 것이다.
자그마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잔일 거라 여긴 나디아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지금까지처럼 그저 숨만 들이쉬고 내쉬었다. 반쯤 잠이 들려던 차에 뺨에 와 닿는 남자의 손길이 있었다. 그녀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에드윈…?”
손이 멈칫했다. 뒤늦게 정신이 든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카우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아실!”
나디아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쉴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해 놓았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 아담한 온실은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몇몇 하녀와, 남편인 에드윈뿐. 아무리 제국에서 알아주는 기사단 소속의 기사라 하여도 이리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기사가 주군의 아내와 단둘이 만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가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누구의 제지도 없었는지, 혹은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았는지 생각하면 눈앞이 아뜩했다. 그의 뻔뻔함이 놀라웠다.
나디아는 담요가 방어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으로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여기 오면 안 돼.”
그가 달려들기라도 할까 봐 한껏 신경을 곤두세운 나디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지 않겠다면 그녀가 떠나면 되는 문제였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요량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왜 왔는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무언가 용건이 있어서 왔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을 뿐이었다.
과거의 감정이 어떻든 모험을 감수하기엔 그녀는 너무 겁이 많았다.
“나디아.”
“부르지 마!”
비명 같은 목소리가 온실에 메아리쳤다. 어떻게든 의연하고자 다잡았던 마음이 고작 그 한마디에 위태로워졌다. 나디아는 계단 앞에 멈춰 선 채로 망설이다 겨우 돌아서 아실을 마주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아무것도 하지 마. 날 좀 내버려 둬.”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양손을 모아 쥐고 빌듯이 말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나디아는 모험과 스릴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요란스러운 스캔들도 딱 질색이었다.
그녀는 두 남자를 저울질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저 요 며칠간처럼, 아무런 불안도, 스릴도 없이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딱 좋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하녀 한 명이 무언가 더 필요한 게 없냐 물으려 문을 열기만 해도 끝장이었다. 나디아는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횡설수설하며 말을 덧붙였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우리 관계는 언제든지 끝날 수 있는 거였으니까, 당신이 이렇게까지 화낼 이유는…!”
필사적으로 그가 다가오지 못하게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아실은 고작 몇 걸음 만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애원하듯이 모아 쥐었던 손을 낚아챈 그가 험악한 얼굴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끝을 정해? 내가 말했지. 난 끝내지 않았다고.”
나디아가 충격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으로 벌벌 떨며 분노와 격정 같은 감정이 뒤범벅된 아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에겐 그렇게 쉽게 끊어 낼 만큼 가벼운 불장난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어. 알아들어? 나는 아니었다고!”
아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나디아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그의 말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 가슴이 아팠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했다. 나디아는 팔을 교차시켜 제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 위로 고개를 묻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아실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한 동시에 너무도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때처럼.
나디아는 한심한 자신을 위해 변명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어. 너무 늦었어. 끝내기 싫어도 이미 끝난 걸 어떡해. 그러니 듣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용건을 끝내지 못했을 테니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그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두려워서. 억세게 팔을 붙잡던 손길과 냉랭한 얼굴이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마님?”
노크 소리와 함께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하녀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디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니?”
“영주님께서 찾으셔요.”
일주일이 가깝도록 얼굴 한 번 못 봤는데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나디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군말 않고 그가 있다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남편을 생각하면 긴장이 되는 것은 여전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굳이 하녀를 달고 오진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문 앞에 선 채로 두어 번 노크했다. 들어와, 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디아는 의아함과 약한 두려움을 품은 채 문을 열었다. 선객이 있었다.
“가 봐도 좋네.”
마침 이야기가 끝난 참인지 에드윈이 적당히 손을 휘저었다. 기사단 문양이 새겨진 붉은 서코트를 걸친 중년의 기사가 나디아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더니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절그럭거리며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멀어지자 에드윈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안경을 벗었다. 피곤한 듯 눈두덩을 문지르는 그를 보며 나디아는 조용히 기다렸다.
바쁘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에드윈은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 밑이 어둡고 전체적으로 살이 빠진 탓에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머리는 단정했고, 주름 하나 지지 않은 깔끔한 옷을 입고 있어도 피로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나디아는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던 탓에 초조해졌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굳이 시간을 내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아실이 찾아왔던 것이 벌써 그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 건 아닌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 댔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는 몇 번이고 먼저 말을 걸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그 짓을 세 번쯤 했을 때가 되어서야 에드윈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때, 좀 지낼 만한가?”
“네, 좋아요. 정원도 아름답고 방도 마음에 들고….”
긴장한 탓에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주절거렸다. 그가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잘됐군. 그래도 혹시 무언가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마음대로 해도 좋아.”
나디아는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자신을 훑어 내리는 게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이기만 했다. 고작 이런 이야기를 하려 부른 걸까?
“이리 와.”
그녀는 슬쩍 눈을 굴렸다가 에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말려 올라간 분홍빛 입술 끝이 나디아를 유혹했다. 이 방 안에 있는 건 그와 그녀뿐이었으니 그녀를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나디아는 쭈뼛거리며 거대한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아한 마호가니 책상 가장자리에 박힌 금장을 노려보는데 그가 다시 웃었다.
“더 가까이.”
의아해하며 두어 걸음 더 다가갔지만 그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숭 떠는 건가? 여기까지야.”
에드윈은 제 무릎 위를 탁탁 쳤다. 나디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떻게 무릎 위까지 오라는 것인지. 그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자 결국 그는 손을 뻗어 나디아의 손목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그녀는 순식간에 에드윈의 품 안에 엎어진 모양으로 안겼다. 그의 손이 나디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무릎위로 앉게 하며 자연스럽게 드레스 앞을 여민 끈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떨며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짙은 보랏빛 눈이 짓궂게 반짝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입술이 닿는 감각이 찾아오지 않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관찰이라도 했는지 코앞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대로 입맞춤당할 거라 생각했다. 코끝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온 그가 집요하리만치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입 맞춰 봐.”
숨결이 닿고,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가장 도톰한 부분이 간지럽게 스쳤다. 나디아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살포시 눈을 감고 그에게 입 맞췄다.
너무도 가까웠던 탓에 그저 조금 고개를 내민 것만으로 입술이 맞붙었다. 결국 이런 용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나 그윽한 목소리 때문인지 이 순간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그가 약하게 윗입술을 빨았다. 얇은 피부가 빨릴 때마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약한 신음 소리가 목에서 울렸다. 어쩌면 허리께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 탓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끈을 다 풀어헤쳤는지 앞이 허전하다 싶더라니 손이 파고들어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슨 신호를 받은 것처럼 배 속에 열기가 고여 들었다.
그의 손이 가슴을 주무르다 뾰족하게 선 유두를 꼬집으며 양 가슴을 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통증과 함께 서서히 달아오르던 몸에 전율이 일었다.
“흣…!”
나디아가 움찔하며 튀어 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입 안으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입 안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에드윈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그의 혀가 입천장의 연한 부분을 핥다가 곧 나디아의 혀를 강하게 비볐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주는 감각을 마냥 받아들이기만 했다. 점점 숨이 찼다. 나디아가 벅차하는 것을 알아챈 에드윈은 잠시 입술을 떼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여 그의 손장난에 잔뜩 민감해진 유두를 입에 물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여기서 일을 치를 셈인가? 잠시 흠칫했지만 그가 유두를 깨물자 이내 쾌감에 지워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