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3화 (13/115)

13.

잠을 설치긴 했지만 낮잠을 충분히 잤던 덕인지 나디아는 이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을 먹고 잠깐의 티타임을 가진 뒤, 밀라의 안내를 받으며 성을 구경했다.

후작가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성 전체가 얼마나 넓은지 본 성을 일일이 돌아보고 난 뒤에 망루에 올라 영지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어제 저녁 식사 때의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을 짬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별관은 모두 돌아보지도 못했지만 슬슬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건물들은 나중에 둘러보기로 했다.

앞으로 시간이 많은데 서두를 필요가 있냐는 게 주 요지였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밀라는 할 일이 밀렸고, 나디아는 지친 탓이 더욱 컸다. 그들은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여름이 가까워 오는 시기에 망루에 서서 맞는 서늘한 강바람은 굉장히 상쾌했다. 나디아는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지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래로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와 높게 쌓인 둑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강과 항구에 정박한 이국의 상선들, 강을 가로지르는 도개교, 그 너머로 펼쳐진 광활하고 기름진 농경지와 목초지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변방이라기에 황량하고 척박한 황무지를 상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빈약한 상상에 대해 사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몇 년 전에 알키드와 맺은 협정 덕분에 국경이라 해도 예전만큼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기사단이 순찰을 돌곤 합니다. 가끔 양이나 염소를 노리는 산짐승이나 마물들이 나오긴 하거든요.”

밀라가 해 주는 설명을 들으며 나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밀라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영지를 훑었다. 성 뒤편으로 울창한 활엽수림이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말을 타고 남쪽으로 이틀 정도 달리면 바다가 나옵니다. 거기까지가 후작령의 남쪽 끝이죠.”

“바다?”

나디아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새삼스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았다. 놀라는 나디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은 여인은 꼭 어린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여름이 무르익으면 영주님께 별장에 가고 싶다고 말씀해 보세요. 랑카드 해변에 아름다운 저택이 있거든요.”

그녀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별장도 좋지만 해변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신 백사장이란 과연 어떤 광경일지를 상상하며 나디아는 기대를 키웠다.

망루를 내려오면서도 밀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나디아에게는 온통 흥미로운 것뿐이라 그녀의 이야기를 한 가지도 놓치지 않고 귀 담아 들으려 노력했다.

변방인 엘하임이 이리도 발전하게 된 것은 엘란츠 후작이 알키드와의 관계를 크게 개선한 덕이 가장 크고, 그 밖에 황제의 지원 덕도 있다든가, 매년 가을이면 황제가 엘하임까지 내려와 일주일가량을 머무르며 후작과 함께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황제와 후작의 사이가 각별한 것을 자랑스레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이 고종사촌 지간이라는 건 알지만 선대 황제 소생의 형제는 모두 도륙 낸 황제가 제 고종사촌을 그리도 믿고 아낀다는 것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정당한 방법으로 황위를 얻어 낸 것이 아니니 극단적으로 생각하자면 에드윈도 충분히 위험한….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 나디아는 고개를 저어 불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털어 냈다.

함부로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다는 것처럼 단호하게 머릿속에서 생각을 밀어냈다. 그것 외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은 차고 넘쳤다. 한 번 말을 섞어 보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먼 사람이었고 후작 역시 남편이라고는 하나 멀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쪽으로 가면 연병장이 나옵니다만 근처로는 가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귀부인께서 볼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런가요?”

연병장이란 말에 긴장했던 그녀는 밀라가 그리로 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눈에 띄게 안심했다. 여인은 나디아가 무서워서 그런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였다.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들이라고는 하지만 혈기왕성한 청년들이기는 매한가지라 시시때때로 저들끼리 대련을 한답시고 칼부림을 합니다. 근처에 있다가 부러진 칼 조각이라도 날아왔다가는 사달이 나기 딱 좋죠. 훈련된 기사들은 쉽게도 피하지만….”

나디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저 우연이라도 아실을 마주칠까 싶어 알아서 피할 생각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보니 세상의 위험한 것들이 너만 피해 가는 게 아닌데 너는 너무 순진하다며 스스럼없이 뺨을 꼬집던 아실이 떠올라 웃음이 새었다가 금세 표정을 굳혔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어제 에드윈이 말했던 후원이었다. 과연 그의 장담대로 아름다웠다. 연한 분홍색의 장미 덩굴이 휘감고 올라간 아치형 통로를 지나가면 숨이 막힐 듯한 장미 향기가 엄습했다.

통로를 지나치는 짧은 시간 동안 온몸에 장미 향기가 배어든 것만 같았다. 나디아는 제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희미하게 배어든 장미 향을 맡았다.

그들은 이내 수련이 가득 피어 있는 커다란 연못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아담한 다리, 그 끝에 우뚝 선 새하얀 누각을 발견했다. 나디아는 한숨과도 같은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그렇지요? 마님 것이에요.”

이런 곳을 가질 수 있다니 후작 부인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음담패설 정도는 참아 보자.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디아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대리석 누각의 난간을 매만지며 내일이나 모레쯤 이곳에서 식사를 하거나 티타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대할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친하게 지내던 귀족들은 모두 수도에 있을 테니 불가능했다. 하지만 혼자여도 경치를 즐기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키 작은 꽃밭을 지나 나디아의 키를 훌쩍 넘는 관목으로 만들어진 미로에 다다랐다. 발돋움을 하여 그 너머를 보려다 실패한 그녀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밀라를 붙잡았다.

“들어갔다가 길을 잃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오래도록 헤맬 만한 규모가 아니니 걱정 마셔요.”

귀여운 걱정을 다 한다는 듯 바라보던 여인은 나디아의 얼굴에서 걱정이 떠나지 않자 결국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디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밀라의 뒤를 순순히 따랐다. 풀 냄새가 진해졌다. 밀라는 거침없이 미로 안으로 들어가더니 우거진 관목 아래의 기둥 옆에 놓인 종을 가리켰다.

“정 나올 길을 못 찾으시겠거든 종을 흔드세요. 하인들이 듣고 모시러 나올 거예요.”

여인의 말처럼 미로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순식간에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밀라는 공손히 인사를 한 뒤에 일을 하러 갔고 나디아는 방으로 올라와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소화를 시킬 겸, 성을 둘러볼 겸 산책을 하러 가기 위해 일어났던 나디아는 묘한 위화감에 얼굴을 굳혔다. 아침부터 묘하게 허리가 뻐근하다 싶더니만, 아랫배가 뜨끔한 감각과 함께 다리 사이가 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수잔, 속옷을 새로 가져다줄래?”

“예, 아가씨!”

눈치 빠른 하녀가 잽싸게 움직였다. 두껍게 천을 덧댄 속옷으로 갈아입으며 나디아는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지금이었구나. 마차 여행 중이었다면 더욱 끔찍했을 텐데 지금이라 다행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덜컹이는 마차에서 통증을 참았을 것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졌다.

수잔이 가져다준 진통 효과가 있는 차를 홀짝이던 그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기분에 언짢아졌다.

나디아는 산책을 가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꾸물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몸살과 비슷하게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아가씨, 창을 닫을까요?”

“응, …마님이라고 불러야지.”

“죄송해요, 마님.”

수잔이 발코니의 창을 닫으며 야무진 손길로 커튼을 쳤다. 순식간에 방이 어둑해졌다.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약효가 돌 거예요. 저녁 식사 시간에 깨워드릴게요.”

그녀는 대답 대신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수잔이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를 끝으로 슬그머니 수마가 찾아왔다.

나디아는 꿈을 꾸었다.

익숙한 손끝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더니 아랫배를 문질렀다. 느낌이 이상해 고개를 숙이니 그녀의 배가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누군가가 입 맞춰 온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입술 사이로 거침없이 혀가 밀려 들어왔다. 나디아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떨리는 손을 들어 배를 매만졌다.

이게 대체….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등 뒤로 단단한 가슴팍이 달라붙었다. 뒤에서부터 그녀를 껴안은 남자가 부드럽게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드레스 앞자락이 흠뻑 젖어 들어 축축해졌다.

나디아는 깜짝 놀라 물러서려 했지만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구 아이일까?”

뒤에 선 남자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드윈의 목소리였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 나는….

앞에 선 남자가 입술을 떼어 내는가 싶더니 조금 거친 손길로 그녀의 드레스 앞자락을 끌어 내렸다.

평소보다 커진 가슴이 드러나자 그가 고개를 숙여 가슴 끝을 입에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파묻자 새빨간 머리카락이 가슴팍에 흩어졌다.

아실이 그녀의 유두를 빨아들였다. 빨려 나가는 감각과 함께 그가 무언가를 꿀꺽이며 삼키고 있었다. 달금한 젖내가 너무도 선명했다. 가슴을 주무르는 에드윈의 손가락 사이로 흰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나디아는 소스라치며 두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지만 누구도 떨쳐 낼 수 없었다.

“내 아이야?”

“내 아이야?”

번쩍 눈을 떴다. 수잔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디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렸는지 등줄기가 축축했다.

“괜찮으세요, 마님?”

“…괜찮아.”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납작한 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달거리를 반기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껏 그 문제에 대해 생각조차 못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월경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으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왜 떠올리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일 정말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루하루 부풀어 가는 배를 보면서 누구의 아이일지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니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야, 지나간 일이어서.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 이제 괜찮을 거다.

나디아는 수잔의 도움을 받아 씻고 저녁으로 푹 끓인 양고기 스튜와 배 속에 라임을 넣고 구운 메추라기, 포도주에 찐 대하와 건포도를 넣은 밀 빵, 세 종류의 치즈와 절인 올리브, 말린 대추야자와 무화과 술을 먹었다.

그리고 수잔과 함께 가벼운 산책을 한 후 방으로 돌아와 다시 약차를 마신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꿈이 없는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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