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2화 (12/115)

12.

그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말들로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그녀가 엘란츠 후작 부인이 된 것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주군의 아내를 건드리는 짓을 할 만큼 정신이 나가지는… 나디아는 이마를 짚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모를 리가 없지. 주군의 아내였다. 게다가 헤어질 때 그녀더러 곧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몰랐더라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나디아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디아가 괜히 연병장 근처나 기사단 숙소 같은 곳을 얼쩡거리는 게 아니라면. 우연히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홀로 다닐 생각이 없으니 그가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나디아는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그녀에게 손대는 것은 주군을 무시하는 짓이었다.

기사단 부단장. 그는 젊은 편이었으니 그 이상의 자리로 올라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걸 포기할 만큼 자신이 그에게 가치 있는 존재냐 하면, 그것은… 수긍하고 싶은 동시에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대체 어쩌고 싶은 걸까. 끊어지지 않는 생각들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녀를 건져 낸 것은 수잔이었다.

“마님, 도착했어요.”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나디아는 불안의 잔여물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 문이 열리고 에드윈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붙잡았다.

나디아는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 흰 수선화와 푸른 잎 사이사이로 돋아난 오렌지 꽃의 향기가 바람을 따라 성안을 흘러 다녔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면 성벽을 타고 기어오른 등나무 덩굴에 탐스러운 보랏빛 꽃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광경이 보였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몸을 떨게 했던 불안은 어디로 갔는지 쉽게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내걸렸다. 이런 모습을 한 성을 보고도 죽상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원이 아름답네요.”

에드윈은 씩 웃었다.

“후원은 더 아름답지. 마음에 들 거야.”

나디아는 그에게 이끌려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드윈은 답지 않게 친절히 집사와 하녀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저는 바쁘다며 쌩하니 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성을 구경한다든가 하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기에 딱히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깐깐한 인상의 노집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에드윈이 사라진 곳으로 서둘러 사라졌다. 하녀장 밀라는 그의 행동이 새삼스럽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나디아의 곁으로 와서 섰다.

“성을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마차 여행이 피곤하셨을 테니 일단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님, 이쪽으로 오셔요.”

단비와도 같은 제안이었다. 나디아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길을 외워 두었다. 3층에 걸린 에드윈의 초상화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따라가면 오른쪽 벽에 내걸린 창밖으로 거대한 아사람강의 풍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방을 지나 왼쪽으로 또 한 번 꺾으면 그 끝에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마호가니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밀라는 뒤를 돌아보더니 사람 좋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나디아는 조용히 감탄했다. 대대로 후작가의 안주인이 쓰는 방이라더니 과연 대단했다. 공작가에서 그녀가 쓰던 방도 넓은 편이었지만 이 방은 그것의 배는 넓었다.

벽지는 광택이 나는 짙푸른 실크였고 남국에서 들여왔을 값비싼 양탄자가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만큼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테이블이며 사이드 테이블이며 의자 등, 가구는 모두 그 귀하다는 장미목이었다.

탁 트인 벽 한쪽을 차지한, 새하얗고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발코니에서 들어온 바람이 흰 레이스 커튼을 팔랑거리게 했다. 얼핏 보이는 난간 아래쪽으로 등나무 꽃이 매달린 것을 보며 그녀는 기뻐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이윽고 나디아는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한쪽에 있던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밀어 열자 짧은 계단 아래로 작은 화원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아담한 온실이었다. 높은 천장과 유리 벽, 이국적인 꽃들의 강렬한 향기와 중앙에 놓인 작은 분수대, 그 옆으로 긴 카우치와 티 테이블까지. 마치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선선대 후작 부인께서 화초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후작께서 선물로 만들어 주신 온실이죠.”

밀라의 설명을 들으며 나디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의젓하던 수잔의 뺨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결혼을 실감했다.

적어도 이 방, 이 성만큼은 그녀가 어릴 적이나 로맨스 소설을 보며 상상하던 것, 아니 그 이상이었다. 기분이 좋아지자 그녀를 내내 괴롭히던 걱정들이 하찮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실은 그녀의 방 근처에도 올 일이 없을 것이고, 에드윈은 적어도 여자를 두들겨 패거나, 남색을 하거나, 혹은 시체를 즐기는 취미는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모욕적인 언사는… 그저 말뿐인 거라면 언젠간 적응하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게 흥미가 떨어진다면 들을 필요도 없게 되겠지.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후작 부인이었고 명실공히 이 성의 안주인이다. 이건 쉽게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안심해도 되겠지.

씻기 위해 들어간 욕실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인들이 물을 떠 나를 필요 없이 욕조 가장자리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잘은 모르지만 마법이라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일이었지만 호기심을 불태우기엔 너무도 피곤했다.

수잔이 밀라에게서 엘란츠성의 각종 마법 장비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이 나디아는 다른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몸을 씻었다. 모두 낯선 이들이었지만 능숙해서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동안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던 그녀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밀라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잠자리를 살핀 뒤 저녁 식사 전에 오겠다며 문을 닫고 돌아갔다. 홀로 남은 나디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이 까무룩 잠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수잔이 들어와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눈꺼풀이 딱 붙은 것처럼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나디아는 비틀거리며 힘들게 일어나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밖은 슬슬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인들이 돌아다니며 복도에 내걸린 램프에 불을 붙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탓에 나디아는 조금 긴장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긴 테이블 상석에는 가벼운 차림의 에드윈이 홀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옆에 앉자 하인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나디아도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한동안 조용히 식사를 하며 음식을 씹거나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식사를 하는 틈틈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탓인지도 몰랐다. 나디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그와 밤을 보내야 하는 걸까. 자연스럽게 그날 밤이 떠올랐다. 두렵고도 조금쯤은 기대하게 되는…. 그녀는 제가 한 생각에 흠칫 놀랐다.

기대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런 지나치게 음란하고 정숙하지 못한 행위에 기대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사랑. 뒤이어 떠오르는 것은 아실과의 관계였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사랑한다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었다. 그리고 그건 실수였다. 아니, 아실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강제성이 다분한 관계였다.

정말? 정말 그랬을까? 나디아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거절해도 듣지 않았잖아. 소리를 질렀어야 했나? 아니면 그 젊은 시종에게 도움을 청했어야 했나? 어떤 남자가 내 치마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고?

절대 안 돼. 그녀는 피해자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무 잘못 없어. 나디아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벌꿀주를 한 모금 머금었을 때 에드윈이 그녀를 불렀다.

“부인.”

그녀는 순간 술잔을 엎을 뻔했다.

“아쉽겠지만 한동안 혼자 자도록 해.”

피처럼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나디아와 시선을 맞추며 웃는 그의 입술이 붉게 젖어 있었다.

“오래 영지를 비워둬서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러니….”

에드윈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긴장했다.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 그는 묘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금세 나디아의 곁까지 다가온 남자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목덜미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디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귓가에 입술이 닿았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말을 기다리는 나디아의 기대를 배반한 입술이 그대로 추락했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는다 느낀 것도 잠시, 따끔 하는 통증이 잇따랐다.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가 제풀에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나디아가 당황한 낯으로 구석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하인들을 곁눈질하는 동안 에드윈은 그녀의 목을 쪽쪽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빨고 지분거리더니 이내 다시 귓가로 입술을 붙였다.

흠칫 소름이 돋았던 나디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야릇한 분위기에 배 속이 뜨거워졌다. 살그머니 어깨 위에 올라간 손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깊게 파인 드레스 앞으로 파고든 손이 희롱하듯 맨 가슴을 주물러 댔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곳에서 행해지는 그의 대담한 행동에 나디아는 눈만 댕그랗게 뜬 채로 굳어 버렸다.

나디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행동을 참아 내는 동안 그는 양껏 가슴을 주무르고 곤두선 젖꼭지를 꼬집고 귓불을 씹어 댔다.

그녀의 다리 사이가 흠뻑 젖어 들 만큼 희롱하던 남자는 나디아가 참지 못하고 매달리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뗐다. 그러고는 늦은 속삭임을 그녀의 귓가에 흘려 넣었다.

“보지가 허전해도 참아.”

달아올랐던 피부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열기가 식었다. 나디아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에드윈이 매번 이딴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천성인 걸까? 아니면 그녀더러 수치심에 바들바들 떨라는 의도인 걸까?

그는 매번 그녀를 싸구려 창부를 대하듯 했다. 어쩌면 제가 그런 빌미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아실과 있었던 일을 들킨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녀를 엉덩이 가벼운 여자 취급하는 건지.

그저 가정일 뿐이었는데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그가 알았다면 그저 말뿐인 조롱으로 끝날 리가 없다. 그 정도 되는 지위의 남자가 무엇이 아쉬워서 부정을 저지른 아내를 안고 가겠는가?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디아는 식사를 끝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의 모습에 들떴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불안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것들을 다독이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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