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연회가 끝나기 무섭게 홀로 방으로 돌아온 나디아는 너무 지쳐 맨바닥에 엎어지더라도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드윈은 바쁘다며 그녀보다도 먼저 돌아섰다. 오늘 밤도 그와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면 그녀는 다음날 앓아누울지도 몰랐다. 그런 사실을 제외해도 이리도 참담한 기분으로 그와 추잡한 행위를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디아는 목욕 시중을 돕겠다는 하녀들을 내보낸 뒤 드레스를 벗었다. 하루 종일 그녀를 긴장하게 했던 흔적들이 새하얀 허벅지 사이에 난잡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욕조에 앉은 채로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하면 이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씻어 낼 수 있을 것처럼.
이튿날의 연회에는 황제 부처가 참석했다. 황제는 후작 부부에게 귀하고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검과 왕관을 선물한 뒤 황후와 춤을 한 곡 추고 나디아와도 한 곡 춘 뒤 돌아갔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황제와 에드윈은 고종사촌이었다. 그렇다면 황제도 변태 같은 잠자리 취향을 가지고 있을까? 하지만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물음이었다.
마치 결혼식을 하던 때처럼 에드윈은 시종일관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덕분에 마지막 연회도 무사히 끝이 났다.
이틀 후면 퀘른을 떠나야 했다. 나디아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지만 하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이었다. 에드윈은 긴 마차 여행이 힘들 거라며 푹 쉬어 두라는 말만 남기고 이틀 내내 찾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디아는 홀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이 자학적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지만.
대부분은 남편이나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한 걱정들이었다.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기대도 하지 않으니 적당히 무심하고 예의를 지키는 사이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녀의 기대를 조롱하듯이 에드윈은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남자였다.
그는 모두에게 무례하게 굴었지만, 다른 귀족들은 그를 1년에 두어 번 볼까 말까 하니 잠깐 만나는 동안의 무례를 넘기기 쉬울지 몰라도 그녀는 그와 살을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매일 연회에서 들었던 것 같이 모욕적인 말을 듣는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나디아는 차라리 그가 외도라도 하기를 바랐다. 관심 없는 상대를 괴롭힐 만큼 할일 없는 위인은 아닐 테니까. 그러면 그녀에게로 향하는 관심이 적어지겠지. 오히려 홀로 있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아실에 대한 것이었다. 곧 알게 될 거라는 둥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인 뒤 사라진 그는 여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그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처박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던 것이 기우였다는 것처럼.
퀘른을 떠나던 날, 나디아는 짙은 자주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베일이 길게 늘어진 모자를 썼다.
공작가를 떠나는 것은 조금 두렵긴 했지만, 그 감정은 단지 낯설고 새로운 곳에 대한 막연함이었지 결코 아쉬움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집에 애착이라고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문 앞으로 엘하임으로 떠나는 후작 일행의 마차와 말을 탄 기사들, 그리고 짐수레들이 멈춰 섰다. 하녀가 그녀를 부르러 왔고 나디아는 서두르지 않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인들이 모두 나와 있었고 공작 부부와 에드윈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디아는 에드윈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다 됐나?”
“네.”
하나뿐인 여동생이 출가하는 날이었지만 나이젤은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또 누군지도 모를 여자와 뒹굴다 술에 절어 뻗어 있겠지. 그녀는 관심 없는 오라비에 대한 생각을 집어치우고 부모님과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나눴다.
이대로 떠나면 됐다. 18년간 그녀를 얽매고 휘둘렀던 모든 것이 끝이었다. 또 다른 것에 얽매이게 될지언정 지금만큼은 후련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콩알만 한 희망이라도 가지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에드윈은 나디아를 가장 크고 화려한 마차 앞으로 이끌었다. 그대로 마차에 올라타려던 나디아는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아 세우자 의아해하며 멈춰 섰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
그녀의 뒤에서 일부러 기척을 내는 것처럼, 절도 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에드윈이 바라보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불타는 듯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 붉은 가시 기사단 부단장이지. 이번 여정의 호위를 담당했어. 당신이랑은 별로 상관없지만 그래도 인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쪽도 주군의 아내를 알아 둬야지.”
에드윈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순탄한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를 찾도록 해. 이 중에선 가장 실력이 좋으니까. 빨간 머리라 찾기 쉬울 거야.”
“붉은 가시… 기사단이요?”
“그래, 설마 모르나?”
아뇨. 나디아는 멍하게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붉은 가시 기사단.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 집단이었다. 그리고 후작은 그중 두 기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기사단 부단장. 그녀는 그를 모르던 시절에 했던 용병이라는 추측이 얼마나 우스운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렸고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나디아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양손을 모아 잡았다. 아실의 시선이 나디아의 두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아실 쿠르쉬드입니다, 귀부인.”
나디아는 그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긴장으로 차게 식은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녀의 손등 위로 가볍게 입 맞추었다. 아실 쿠르쉬드. 이제서야 알게 된 그의 온전한 이름이었다.
“나디아… 엘란츠예요. 잘 부탁해요. 쿠르쉬드 경.”
베일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요를 들킬까 두려웠다. 나디아는 조금 서두른다 싶을 만큼 다급하게 마차에 올랐다. 그녀를 따라가기로 한 하녀 수잔이 뒤이어 오르고 그녀가 탄 마차의 문을 손수 닫아 준 에드윈은 행렬의 가장 앞으로 가 말에 올랐다.
마차 문을 닫을 때까지 아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느꼈던 나디아는 고개를 돌리며 모자를 기울여 그의 시선으로부터 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앞으로의 생활이 평탄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나디아는 두려웠다. 아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수도를 떠나면 그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전혀 아니었다. 앞으로 평생을, 혹은 수십여 년을 그와 한 곳에서 살며 마음을 졸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아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맞은편에 앉은 수잔이 태연한 척하면서도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채 창밖을 흘끔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나디아는 모자를 벗었다. 푹신하고 안락한 의자에 몸이 파묻히도록 앉은 그녀는 멍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마차 주위를 호위하는 기사단 사이로 은빛 갑옷을 두르고 그 위로 머리색과 같은 붉은 서코트를 걸친 아실의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의 붉은 고수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반짝이는 녹색 눈이 드러났다. 홀린 듯 그의 모습을 좇던 나디아는 어느새 그도 자신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커튼을 쳤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비웃었다. 미련은 다 털어 냈다더니 뭘 하는 거야? 정신 차려.
***
에드윈의 장담대로 마차 여행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마차의 내부는 푹신푹신해서 앉으면 몸이 푹 파묻히는 카우치와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 간이침대까지 있었지만 수도를 벗어나고도 사흘쯤 지나자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듯이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더 울퉁불퉁해졌고 중간중간 들러 휴식을 취하고 밤을 보냈던 도시는 마을로, 더 작은 마을로, 그러곤 민가로 변했다. 그들은 아주 늦은 밤에 행렬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으며 이른 아침에 길을 떠났다.
에드윈의 말처럼 마물이나 도적떼 한 번 만나지 않은 순탄한 여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디아는 몸이며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상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될 것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에드윈은 식사 시간마다 차를 한 잔씩 보냈는데 그것만 마시면 잠이 쏟아졌다. 남편은 좋아하기 어려운 남자였지만 그 배려만큼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평균 열흘이 걸리는 여정은 보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후작령으로 들어오고부터는 도로 사정이 나아졌다는 점이었다. 잘 닦인 도로 덕에 마차가 흔들리는 것도 줄었고 그러자 훨씬 버틸 만해졌다.
나디아는 마차 창밖으로 멀찍이 보이는 엘란츠성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성은 화려하다기보다는 어떤 풍파에도 맞설 수 있을 것처럼 강인해 보였다. 그녀가 이제부터 평생을 살아갈 곳이었다.
오밀조밀한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이어지는 마을을 지나 외성 벽에 이르자 영주의 귀환을 알리는 코펠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여정의 끝이 보이자 맥이 탁 풀렸다. 두 번 다시 이런 여정은 겪고 싶지 않았다. 새삼스레 힘든 기색도 없이 말을 타고 쫓아오는 기사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녀는 수잔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가볍게 단장을 했다. 이제 그 성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첫 만남부터 흩트려진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성으로 이어지는 큰 대로를 지나는 동안 영주민들이 나와 그들을 반기는지 환호 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커튼을 열었다가 가까운 곳에서 말을 몰던 아실을 발견하고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다시 닫았다. 저도 모르게 들떴던 마음이 식으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