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10화 (10/115)

10.

“이런,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은 기사도 아니야.”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한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며 그를 비난했다. 아실은 울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다. 아무 미련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마음마저도 바스스 부스러져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매무새를 마저 다듬었다. 머리를 더듬어 보고 치맛자락에 찢어진 곳은 없는지 확인하며 동시에 그녀는 벽시계를 찾았다. 연회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대체 이 방에서 얼마나 시간을 허비한 건지.

나디아는 손등으로 뺨을 닦아 내며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녀에게는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너덜너덜한 나디아의 속옷을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제 성기에 묻은 액체를 슥슥 닦아 내고는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지춤만 추스르자 놀라울 정도로 멀끔한 모습이 된 그를 보며 나디아는 조금 억울해졌다.

그녀는 근처의 가구들을 붙잡으며 간신히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나가야 했다.

다행히 머리 모양은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 목 아래쪽으로 잔머리가 조금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토록 난리를 쳤는데 이 정도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레스도 치마 뒤쪽에 조금 주름이 진 것을 제외하면 괜찮았다. 원래 겹겹이 레이스가 늘어진 드레스라 주름이 진 것도 크게 티 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다시 치장할 시간이 없으니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화장은 어떻게 해서든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엉엉 울어 버린 탓에 엉망으로 지워져 있었다.

태어나 자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야 하는 신부가 심란함을 이기지 못해서 울어 버린 거라 생각해 주길, 그것도 아니면 끔찍한 소문을 줄줄이 달고 있는 남편을 가지게 된 것이 두려워 운 것이라 생각하길 바랄 뿐이었다.

나디아는 잔뜩 붉어진 눈가를 더듬으며 아실을 향해 최후통첩을 날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대책 없고 무모한 남자였다. 앞으로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혹여라도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만 해도 누군가에게 알릴 수조차 없게 되지 않았는가. 아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신분이건 기사도건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였다. 마치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나디아는 스스로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도 없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기 때문인지 무언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턱 걸려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디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번 일로 그에게 남아 있던 미련을 털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나디아가 알던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끔찍하고, 위험했다.

“…아실, 당신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 내가, 내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일이라면 정말….”

나디아는 말끝을 흐렸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붙이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실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얼굴을 찌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모르는 건가?”

“뭘 모른다는 거야?”

우습다는 듯이 피식 실소를 흘린 그가 창가로 다가갔다. 그가 창을 열자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수선화 향기가 섞인 바람에 방 안을 가득 채운 정사의 냄새가 옅어졌다.

“곧 알게 될 거야, 나의 나디아.”

그는 가볍게 창을 넘어 사라졌다.

***

간신히 늦지 않게 대기실에 도착했다. 그나마도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한 것을 지나가던 하녀가 부축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나디아는 그녀에게 머리를 다시 손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화장까지 고친 뒤에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눈가의 붉은 흔적이 모두 가려지지 않았지만 눈두덩이 꼴사납게 퉁퉁 부어오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시간 맞춰 엘란츠 후작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비죽이 웃었지만 나디아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와 나란히 걸을 때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아래쪽에서 아실의 정액이 흘러내렸다. 점성이 있는 액체가 허벅지에 문질러지며 질척일 때마다 그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혼자만의 착각인지 실제로 들려오는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안 좋아 보이는군.”

그가 말을 걸어올 줄 몰랐기에 나디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귓가로 살짝 고개를 숙인 에드윈의 숨에서 옅은 샴페인 향기가 났다. 나디아는 연회장의 귀족들을 의식해 입가에 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의 관심이 제게로 쏠리는 것이 지금은 달갑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바람도 소용없이 남자는 또 한 번 말을 건네 왔다.

“그 몸으로 어딜 가 있었던 거지?”

“아, 그… 산책을….”

“버틸 만했나 보지? 의외로 체력이 좋군. …에드윈이라고 불러.”

에드윈이 그녀에게 샴페인 잔을 건네며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 나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가 건네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든 잘 숨긴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판단에 의문이 들었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남편이 무언가 눈치챌까 봐 두려운 것은 물론이고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다른 귀족들 앞에 나서야 한다니,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이게 꿈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 그녀의 결혼식 다음 날 벌어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디아는 다리를 바짝 붙인 채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무언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끔찍한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귀족들의 대화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지는 않는지, 망상인 게 분명한데도 모두가 저를 손가락질하며 결혼 축하 연회에 뻔뻔스레 다른 남자의 것을 품고 온 희대의 탕녀라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바로 몇 10여 분 전에 벌어졌던 일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숨기려 들며 골치 아픈 일을 끌고 온 그녀에게 온갖 폭언을 퍼부을 것이고, 에드윈에게 알린다면 이혼당하겠지. 그리고 그녀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묵살된 채로 결혼식 다음 날 기사와 통정한 간 큰 귀부인에 대한 소문이 귀족 사회를 휩쓸 것이다.

쉬쉬하며 모두 더한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느냐고 따져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발뺌하면 그만이었고 물 위로 올라온 먹잇감을 더욱 가열하게 물어뜯는 것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들겠지.

그다음에는 가문의 수치가 되어 어딘가 수도원 같은 곳에 처박혀 남은 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녀가 할 선택은 침묵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히 흘러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을 바랄 수밖에….

춤곡이 시작되자 연회의 주인공을 위해 홀의 중앙이 비워졌다. 에드윈은 다정한 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모두 비운 뒤 나디아에게 주었던 잔을 다시 빼앗아 근처를 지나가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긴장한 얼굴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팔다리는 누군가 관절을 뺐다 끼운 것처럼 나른했고, 당장 어디든 쓰러져 잠들고만 싶었는데 이 몸으로 춤을 춰야 했다. 에드윈은 능숙하게 그녀를 홀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런 연회에 잘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춤을 잘 췄다. 나디아는 그의 리드에 이끌려 스텝을 밟으면서 천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좋게만 생각 할 수는 없었다. 잔잔한 곡조에 맞춰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곡이 중반부를 넘어가고 나디아가 가볍게 헐떡이기 시작할 무렵,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당긴 에드윈이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산책을 두 시간씩 하지?”

나디아의 스텝이 당황으로 꼬이기 시작하자 에드윈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려 제 발등 위에 올렸다. 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고였다. 그녀는 잠이 번쩍 깨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른 놈과 뒹굴고 온 건 아니겠지? 정액 냄새가 나는데.”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드레스 안으로 아실의 정액이 무릎 근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나디아는 단칼에 부정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는 춤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피하며 이 주제가 조용히 넘어가기만을 바랐다.

“그럼 내 건가?”

그가 즐거운 기색으로 쉴 새 없이 추잡한 말을 귓가로 흘려 대고 있었다.

“그래, 지난 새벽에 즐거웠지? 사생아 걱정하지 않고 맘껏 싸지를 수 있는 상대라는 건 좋군. 어때, 지금 흘러내리고 있나?”

나디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난밤 얼핏 느꼈던 변태인 것 같다는 생각에 확신을 더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작게 속삭인다고 하지만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단둘이 있는 자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렇게 기품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녀로서는 조금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처녀라는 게 믿기지 않더군. 나중에 집안이 폭삭 망해도 엉덩이만 잘 흔들면 일으켜 세울 수 있겠어. 칭찬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모욕감에 눈물마저 고였다. 그게 무슨 칭찬이란 말인가. 그녀는 있는 힘껏 에드윈을 노려보았다. 남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따귀라도 후려쳤을 것이다.

그녀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구두의 뾰족한 굽으로 있는 힘껏 그의 발을 찍어 눌렀다. 그가 작게 아이쿠,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다지 아파하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에 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연회 내내 에드윈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나디아의 기분을 살펴서라기보다는 그저 흥미가 식은 듯했다.

나디아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시간을 죽이는 동안 에드윈에게는 수많은 귀족들이 접근해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그 옆에 서 있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품종 좋은 애완동물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딱히 자리를 벗어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귀족들의 말을 무시했지만 누구도 대놓고 화내지 못했다. 다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웃음으로 위장하며 떠나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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