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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과 두 남자-8화 (8/115)

8.

벽에 등을 부딪혀 깜짝 놀란 나디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이런 대담한 짓을 저지른 자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녹색 눈이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나디아의 두 배는 될법한 덩치의 사내가 그녀를 팔 안에 가둔 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두렵기는커녕 화만 났다.

나디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똑같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화를 참고 있다는 듯 이를 악문 그의 턱 근육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목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이 목을 울리는 소리에 가깝게 들렸다. 나디아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지? 놀 만큼 놀지 못한 채 끝나서 불만이기라도 한 건지. 비딱하게 꼬인 심사가 그의 모든 행동을 좋은 눈길로 볼 수 없게 했다.

“그런 식?”

“이렇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은근슬쩍 다시 자신과 엮이려 드는 것이 황당했다. 그때 제가 어떤 생각을 하며 돌아섰는지, 어떤 마음으로 눈물을 참았는지, 어떤 새벽을 보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니, 모르니까 이럴 수 있는 거겠지. 어차피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절대로 그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아픈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나디아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그녀를 멋대로 가지고 놀던 상종 못 할 남자로 전락해 있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한들 그녀는 바로 어제 결혼을 했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지 않았던가. 이 사내와 함께 있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날 세울 거 없어.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시기가 생각보다 빠르긴 했지만….”

“당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무심코 반문했던 나디아는 아차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휘둘리지 말자고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제 양옆을 가로막은 팔을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비켜. 당신이랑 더는 할 이야기 없어.”

그에게서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은 모두 나디아를 무섭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힘주어 아실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힘으로 그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끝났어.”

아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디아는 볼썽사납게 울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눈에 바짝 힘을 줬다. 억지로 추켜올린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애써 말을 끝맺었다.

“놀 만큼 놀았잖아?”

얼굴 옆으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펄쩍 뛸 만큼 놀랐지만 귓가에 울리는 요란한 타격음보다도 그녀를 노려보는 아실의 눈빛이 더 무서웠다. 뒤늦게 그와 자신의 체격차이를 인식한 그녀는 제 어깨가 떨리기 시작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화가 났다. 정말 잘못한 게 누군데. 그토록 그녀를 기만해 놓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지는 못할망정 위협하다니.

이 자리에서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그녀뿐일 거라고 나디아는 확신했다. 이런 저급한 위협에 겁먹을 필요 없다. 레이디를 위협하다니, 그에게 기사도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떨리는 손을 감추며 그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넌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는 끝내지 않았어.”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 난 어제 결혼했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의 거칠고 뜨거운 손이 나디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방금 전의 위협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마치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부서지는 것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 간극에 멈칫한 사이 그가 손끝으로 나디아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나디아는 자신이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애써 부정했다. 그리고 그가 말을 잇고….

“중요한 건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거지.”

입술이 달려들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지 오래인지라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밀어내던 손목이 붙잡힌 것은 물론이고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 피해 보려던 움직임도 뒷덜미를 감싸는 손의 힘에 가볍게 막혀 버렸다.

지금껏 그와 만나 오면서 했던 접촉이라 할 만한 것은 가벼운 입맞춤이 전부였다. 의아할 정도로 요구하지 않는 그런 모습조차 저를 아껴주려 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실은 너무도 낯설었다. 그의 눈빛, 말투, 행동 그 모든 것들이 그녀가 알던 아실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서러웠다.

입을 꾹 닫은 채 버티자 그의 손이 턱을 붙잡았다. 아주 조금만 힘을 준 것이 분명했는데도 통증에 입이 벌어졌다. 뭉클한 혀가 입 안 가득 들어오자 함께 밀려온 복잡한 상념에 눈물이 찔끔 났다.

명백하게 성적인 함의를 담은 손길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다 목덜미를 쓰다듬어 왔다. 나디아는 간지러움과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에 몸을 떨며 이 순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매달렸다.

체격 차를 생각해도 힘으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몸부림을 친다고 해도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드레스가 구겨진다면, 당장 복도에 나갔다가 누굴 마주친들 이상한 상상을 부추기기에 딱 좋은 몰골이 될 것이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테고 그렇게 된다면….

순식간에 무력감에 휩쓸린 나디아는 몸에 힘을 풀었다. 이 순간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참으면…. 아실은 그저 갑자기 장난감을 빼앗겨 울컥한 것뿐일 테니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물러날 것이다. 그녀가 지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겠다고 관대하게 말하면 그는 수긍하고 떠나겠지.

그도 현실을 알 테니 분명 그럴 거야. 고작 기사 한 명이 후작을 상대로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괜찮을 거야. 나디아는 나흘 후 남편과 함께 엘하임으로 떠날 예정이니 다시는 아실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혀를 거세게 빨리며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바로 조금 전에 들었던 놓아주지 않겠다는 말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애쓰면서.

“으응….”

아실은 나디아의 손목을 놓아준 뒤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몸이 밀착하며 허리가 꺾였다. 빈틈없이 맞물렸던 입술이 슬쩍슬쩍 떨어질 때마다 질척이며 혀가 얽히는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하기 어렵게 섞여 들었다.

그의 손끝이 섬세한 악기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나디아의 등허리를 스쳐 가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디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무감각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또 한 번 나디아가 간신히 신음을 삼켰을 때, 문득 그의 손이 목덜미로 조금 더 파고들고 아릿한 통증이 찾아오더니 움직임이 멎었다.

선명하게 잇자국이 남은 부분을 손끝으로 꾸욱 누르던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그의 혀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나디아는 헐떡이며 얼굴을 붉혔다.

숨을 고르며 그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손에 끼고 있던 실크 장갑이 벗겨져 나갔다. 그녀는 당황하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하지만 이미 손목을 칭칭 감고 있는 푸른 멍 자국을 들킨 후였다.

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난밤의 흔적을 들킨 것이 수치스러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남자구나. 네 남편.”

나디아는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뛰쳐나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방 한구석에 놓인 거울을 보며 제 꼴이 멀쩡한지 확인하기 전에는 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표정을 굳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져서 그게 얼마나 위엄 있어 보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적당히….”

“정말 후회되는군.”

나디아의 말을 끊은 아실은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칠게 나디아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뭐, 뭐 하려는… 꺄악!”

치마가 훌렁, 들려 올라갔다. 깜짝 놀라 몸부림치는 나디아의 허벅지를 강하게 잡은 아실이 이런 대담한 짓을 저지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이 드레스 다 찢어발기기 전에.”

정말 그렇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겁을 집어먹은 나디아는 손으로 벽을 짚은 채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 남자가 정말 아실이라고? 그의 손이 골반을 끌어당겨 엉덩이를 내밀게 만들고는 속옷마저 끌어 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저 현실을 부정했다.

눈물을 참으려 애쓴 것도 소용없이 타인의 눈앞에 치부를 훤히 드러냈다는 사실이 끔찍해 뺨이 흠뻑 젖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그의 손가락이 지난밤 정사의 여파로 부어오른 음부를 매만졌다. 나디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을 내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문을 쳐다봤다. 그가 들어오면서 잠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이런 꼴을 들키기라도 했다가는….

“다리 벌려.”

그가 나디아의 맨 엉덩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마치 창부를 다루는 듯한 말투며 행동이 지나치게 모욕적이었다.

“…싫어.”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는지 그가 하하 웃었다.

“싫어?”

“앗!”

허벅지에 걸려 있던 속옷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디아는 엉엉 울며 다리를 조금 벌렸다.

다리 사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고 느껴질 만큼 한참을 관찰당하던 그녀는 이 상황은 물론이고, 혹시나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디아는 여전히 아실이 왜 그녀에게 화가 났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가 대화를 원하고 그녀가 거부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대화를 원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이, 이제 그만해….”

그가 조금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음순을 벌리며 그 안쪽의 여린 살을 만지기 시작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실의 손이 닿은 순간 나디아는 제 그곳이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실이 그 모습을 모두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부끄러워 딱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갈라진 틈을 핥아 오는 혀를 느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런… 미쳤어, 당신 제정신이… 앗!”

나디아가 경악의 말을 뱉을수록 아실의 행동은 대담해져 갔다. 그녀는 파티에 입고 가야 할 드레스를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도 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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