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부인과 두 남자-3화 (3/115)

3.

몇 번인가 비슷한 만남이 이어졌다. 처음은 우연, 그리고 그 다음은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나디아는 그 남자와 헤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새로운 핑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감사 인사를 하려고, 또는 우연을 가장하여 거리를 서성였다.

정말로 우연인지 아니면 그도 나디아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그녀가 대책 없이 아실과 만났던 골목 근처를 서성이면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또 홀로 다니느냐며, 위험하니 자신이 호위를 맡아 주겠다고 자처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대책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실은, 그를 무서워했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나디아는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남자가 건네는 순수한 호의에 어느샌가 흠뻑 젖어 말랑말랑해지는 자신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은근하게 자리 잡았던 호감이 싹트는 것은 금방이었다.

몇 번인가 만남이 반복되면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수줍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을 아실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나디아는 소설 속에서 묘사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숨이 찼다.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고 웃는 얼굴을 보면 숨이 턱 막혔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그가 좀 더 웃을까 고민하느라 밤을 새우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나디아가 느끼는 감정이 그에게 스며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하게 거리를 두던 태도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여동생을 보기라도 하는 듯 다정하던 눈빛이 어느샌가 그녀와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나디아는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음에도 아실의 눈동자 안에 서린 따뜻함이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메말라 갈라진 땅 위로 달게 스며드는 빗줄기였다.

“좋아해.”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아실의 고백은 환희였다. 나디아는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기갈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쏟아지는 감정을 받아 마셨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부드럽게 흩뿌리는 사랑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연인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침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요 며칠간 만나지 못했었기에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만남이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철없는 아이처럼 달려갔다.

“기다렸어?”

“아니.”

남자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나디아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달려들어 목에 매달리는 그녀를 가볍게 받아 안은 아실의 팔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긴 했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나디아는 항상 조심하려 노력했다. 마음이 들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잦았지만 그럴 때면 아실이 먼저 그녀를 놓아주고는 했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운명인 것 같기도 했다.

나디아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녀가 즐겨 읽던 로맨스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 구해 주는 기사님. 실제로 기사는 아닐지 몰라도 충분했다. 나디아 스스로도 이것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을 떠받치는 7공작 중 하나인 잉그램 가문의 영애였다. 지금은 그녀의 아버지인 잉그램 공작이 이리저리 재고 따지느라 약혼자조차 없지만 분명 1, 2년 내로 어디든 유력자의 집안으로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을 미래였다.

만약 그녀가 정체도 확실하지 않은 남자와 만남을 지속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녀에게 들러붙을 불명예스러운 수식과 한순간에 잃어버릴 것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위, 명예는 물론이고 그녀가 원치 않아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가문의 이름을 둘러싼 비호. 그 모든 것들이 한낱 불씨처럼 언제든 사그라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불장난 같은 만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싱그러운 녹색 눈을 한 사내는 깜짝 놀랄 만큼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만큼 큰 키와 뺨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를 갖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땐 그가 옆구리에 찬 커다란 검에 한 번, 얼굴에 새겨진 흉터에 한 번 놀라 덜덜 떨기 바빴으나 지금은 알고 있었다. 무심한 척하면서도 섬세하고 다정한 그 남자의 얼굴이 얼마나 소년 같은 웃음을 짓는지, 커다랗게 굳은살과 잔상처투성이인 손이 얼마나 따뜻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는지.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인적이 드문 교외의 숲을 거닐었고 때로는 깊은 숲속의 호숫가에 앉아 반짝이는 수면 위를 헤엄치는 백조 무리를 바라보며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집에 가기 싫어.”

뜬금없이 뱉어 내는 투정에 아실은 말없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머리를 괴고 올려다보자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아실은 눈을 찡그리는 그녀의 얼굴 위로 손을 들어 차양을 만들어 주었다. 그늘이 지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곤란해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게.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녹인 설탕처럼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몇 번, 고작 몇 시간 정도. 서로 아는 것은 아실과 나디아 라는 이름 하나뿐이었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몇 가지 사실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디아는 그가 평민이라는 것과 검을 쓰는 직업이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그 사실들은 ‘아실이 용병은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아무리 수수한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달지 않아도 숨길 수 없는 게 그런 것이리라.

처음부터 서로 끌렸지만, 그들이 이런 관계로 발전하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실은 귀족 영애에게 이런 만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말했잖아, 조심해야 한다고.”

“몰라서 매번 당신을 만나러 오는 게 아니야.”

“그래도….”

걱정으로 그늘진 얼굴을 한 남자가 챙이 넓은 그녀의 모자를 조금 더 기울여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키가 훌쩍 큰 아실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기 힘들어졌지만 그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디아는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아실은 몇 번인가 그녀에게 만남을 지속하는 것을 그만두자고 말한 적도 있었다. 감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을 쥐어짜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매달린 것은 나디아였다. 그녀는 제 안의 어디에 그런 대담함이 숨어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용병이라는 거칠고 품위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을 것 같은 직업을 가진 자와 상종할 일은 평생 절대로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세상에 ‘절대로’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는 평민이었지만 지나치게 굽실거리지도 않았고 상스럽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녀를 품평하듯 훑어보지 않았다. 나디아는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와 있으면 ‘잉그램’이 아니라 그저 사랑에 빠진 나디아로 있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무채색 세상에 오직 그만 빛났다. 내일이 기다려졌다. 그의 넓은 품에 폭 안겨 있다 보면 ‘이게 사랑받는다는 거구나.’, ‘이렇게 포근하고 행복한 감정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구나.’ 하고 깨닫게 되어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나디아는 그를 사랑함으로 인해 자신의 결핍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미래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는 관계없는 결말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나디아는 공작가의 하나뿐인 여식이었고 그 말은 즉, 잉그램 공작가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결혼 사업에 쓰일 재산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나디아가 어릴 때 하지 않았던 행동들, 떼를 쓰고 울고 바닥을 뒹군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질 위인들도 아니었다.

신분 차이가 나는 결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디아를 바라보며 그리 좋으면 정부로 두면 되지 않느냐는 소리나 할 테지.

같이 도망이라도 가야 할까. 생각으로만 끝날 말을 중얼거리며 나디아는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는 짙은 보라색 베일을 꺼내 썼다.

다른 나라, 다른 대륙. 누구도 그들을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녀가 가진 보석들을 모두 처분하면 꽤나 큰 금액일 테니 힘들게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게 안 되더라도, 그는 검을 쓰니 사냥을 하고 나디아는 수를 놓는 솜씨가 제법 좋으니 입에 풀칠은 할 수 있겠지. 실행할 수 없는 상상은 그녀를 잠시나마 즐겁게 했다.

“혼자 갈 테니까 따라 나오지 마.”

하녀들을 물리며 그녀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 대신 삯 마차를 붙잡아 탔다.

아무리 귀족 사회에서 기혼자가 정부를 두는 것이 흠이 아닌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회에서 당연히 용인되는 개념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수도에서만 행해지는 기형적인 일이었고 하물며 미혼자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그것도 여성에겐 더욱 가혹하기 짝이 없어서 똑같이 바람을 피웠어도 여자에 대한 처벌이 훨씬 더 무거웠다. 혹여 누군가에게 이 관계를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귀족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딱 좋았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수수한 옷차림을 한 아가씨를 눈여겨볼 이는 없었다. 하지만 미리 조심해 두는 것이 좋았다. 나디아는 이 관계 자체가 충분히 경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 또 다른 경솔함을 더할 생각 역시 없었다.

태연하게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 그녀는 따라붙는 사람도 없는데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면서 걸음을 꼬았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신중해졌다.

만나기로 했던 잡화점 뒷골목까지 한 번만 더 꺾으면 되는 지점에 이르러서 나디아는 덜컥 멈춰 섰다. 작지만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벽에 몸을 붙인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고 벽 너머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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