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매일 저녁, 오래도록 (完)
수수한 차림의 금설약, 이제는 금빈으로 불러야 할 이가 냉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복여동생 란약이 울음을 삼키며 뒤따랐다. 두 황녀는 이모의 손을 잡은 채 조금은 겁에 질린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같이 먹고 자고 하였을 텐데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 손에 키워지게 되었다. 어른이야 사정을 다 안다 쳐도, 아이들은 마냥 안쓰럽기만 했다.
거기다 뭐랬더라. 자매를 같이 두는 것도 아니고 목비랑 상 미인에게 한 명씩 보낸다고 했지.
‘후궁에 비빈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보내도 그 둘이야.’
목비는 올여름부터 황제가 관심을 두는 이라고 들었다. 금빈을 견제할 의도로 선택했으며, 금빈과 달리 봉무국 안에 의지할 세력이 없다고 했다.
한편 상 미인은 누군가. 금빈이 본인 회임 기간 동안 성총을 붙들어 놓으라고 심은 자기 사람이다.
‘상 미인 입장에선 금빈이 두렵고 어려웠을 수 있어. 아군이라고 하기엔 자기 목줄을 틀어잡은 인물이니까.’
여기까지만 봐도 어린 자매의 앞날은 대단히 불투명했다. 눈칫밥 먹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아이들을 그런 미래로 내몰았다며 금빈을 무조건 탓하기도 어려운 게, 그녀는 나름 잘해 보려다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황제가 정한 거야. 좀 더 나은 환경을 줄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렇게 결정한 거지.’
초연한 얼굴로 걷던 금빈이 고개를 돌렸다. 예상 밖의 마주침이었던지 그녀가 조금 놀란 눈을 하였다.
금빈이 제자리에 멈춰 서자 병사와 궁인 일동이 모두 멈추게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는 금빈의 그림자도 못 밟던 이들이 어서 움직이라고 재촉을 했다.
금빈이 여동생을 불러 무언가 지시를 하는 게 보였다. 금씨 가문 막내 규수의 얼굴 위로 싫은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금란약은 언니의 지시에 따랐다. 두 황녀의 손을 잡고 우희에게로 와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간 제 언니와 저희 집안이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드러난 사실과 미처 드러나지 않은 사실까지 모두 포함해, 단왕비께 사죄드립니다.”
우희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여 그저 상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란약이 분함을 꾹 참고 말했다.
“전해 듣기로 단왕비께서는 단왕 전하의 첩실이 될 뻔한 친정 자매들을 구해 주셨다고요. 저 금란약은 마마의 가문 사람이 아니나…… 만약에, 제 아버지가 좋지 않은 혼처를…… 만약에…….”
멸시하던 상대에게 이런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익숙지 않을 터다. 심지어 어린 조카들이 옆에서 보고 있다. 란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날이 온다면 다소나마 도움을…… 구해도 될는지요.”
우희는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응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점을 먼저 물었다.
“황녀들은 각자 어디로 가나요?”
누가 목비 처소에 가고, 누가 상 미인의 손에 떨어지는지 물은 거였는데 란약이 영 다른 답을 했다.
“둘 다 황후마마께 보낼 거예요.”
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명과는 다르지만 언니가 보덕재 바닥에서 깨달았다고 했어요. 황궁에서 유일하게 황명을 거슬러도 되는 이가 누군지…….”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황후마마 설득 또한 쉽지 않을 텐데요.”
란약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또한 언니가 방도를 말해 줬습니다. 저는 꼭, 해낼 거예요.”
“오.”
우희가 멀리 서 있는 금빈을 보았다. 빨리 움직이라는 재촉에도 꼿꼿이 등을 세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빈의 시선은 여동생이 아니라 그 너머의 우희를 향한 채였다.
마군이 될 자들도 품은 자신이 후궁에서 치열하게 사는 중인 사람을 더 품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지.
우희는 금빈을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인사를 하자 그제야 금빈이 깊이 고개를 숙여 화답하였다. 여동생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냉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운 듯 가벼워 보였다.
* * *
우희는 후궁을 빠져나와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아까 보덕재에 함께 있었던 몇몇 대신들이 보였다. 이겸과 딱히 가까운 자들도 아닌데 멀리서 우희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희도 예의상 눈인사를 했다.
우스웠다. 금 귀비가 복중 황자를 잃게 만든 범인은 아직까지 단왕비로 알려져 있다.
당시 황제는 제수가 누명을 썼음을 알면서도 이를 벗겨 주지 않았다. 이겸도 처음에는 사건을 심층 조사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가 친형의 의중을 읽고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금 귀비는 당일 계획을 친부와도 공유하지 않았고, 이흔은 사향원으로 떠났으며, 황제 부부와 이겸은 과거 사건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을 터이니 단왕비는 감히 복중 황자를 살해하고도 떳떳이 돌아다니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게 인사를 하는구나.’
우희의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권력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아닌 말로 금빈이 유산을 한 지 고작 몇 달이 됐다고 변변한 가재도구 하나 없는 냉궁에 보낸단 말인가. 몇 달은 무슨. 황궁 연회 열린 때가 늦여름이니까 이제 겨우 두 달째였다.
게다가 조만간 겨울이 닥쳐올 터다. 여유로운 이들에게 겨울은 소복이 쌓이는 눈과 화롯가에 둘러앉아 나누는 잡담, 긴긴 겨울밤에 어울리는 야식처럼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다가오겠지만 사정 어려운 이들에겐 다르다. 그 어느 계절보다 혹독한 것이 겨울이다.
‘하지만 금빈은 살아남을 거야.’
우희는 알 수 있었다. 보덕재 바닥에 말없이 꿇어앉아 있던 게 생의 의지를 포기해서인 줄 알았으나 이는 우희의 착각이었다.
아까 냉궁으로 향하던 모습이 어디 패배자의 것이던가. 그녀는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본 다음 실패를 깨닫고, 과감히 경로 수정에 들어간 인물이었다. 냉궁에 유폐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는 이들이 왕왕 있다고는 하나 그게 금빈은 아닐 것이다.
‘매미라도 잡아먹으면서 3년을 버틸 테지. 금빈은 매미를 먹을 때조차 목련꽃처럼 우아할 것 같아.’
금빈은 이번 생에 끝내 황후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이가 목표라면 아마 가능할 터다.
저 멀리 이겸이 보였다. 그는 언제부터 조정에 복귀할 거냐는 인사를 숨 쉴 때마다 받으며 우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멀리서 봐도 자태가 남달랐다. 저 사내가 바로 봉무제일미요, 이 하우희의 배필이로다. 1만 년을 집요하게 환생하여 결국 운명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걸출한 이라.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었다.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때 이겸이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어느덧 흐르고 흘러 황궁 문을 닫을 때가 가까웠고, 서쪽 하늘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천지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는 가운데 이겸과 우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희는 이겸을 향해 걸었다. 둘 사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입가가 움찔거렸다. 이겸은 어느 순간부터 인사를 받지 않고 우희가 걸어오는 방향만 쳐다보았다. 관리들은 의아해하다가 이겸의 시선을 따라간 다음,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점점 우희의 걸음이 빨라졌다. 나중엔 거의 뛰다시피 달려가 두 팔을 뻗고 이겸에게 안겼다.
우희가 비로소 환히 웃었다.
“황후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이겸이 물었다.
“음……. 저한테 비절영을 호위로 붙여 주시겠대요.”
“누굴 보낼지 알려 달라고 청하셨습니까?”
“당연하죠.”
우희가 뻐기듯 한 표정을 지었다. 이겸이 우희의 뺨을 다정히 쓸었다.
“요 며칠 사이 많은 일이 있었죠.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이만 집에 갈까요?”
집으로 가자는 말이 이보다 반갑게 들릴 수 없었다. 몇 시진 전에 바로 그 집에서 나왔다가 돌아가는 건데도 그랬다. 아마 하나의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라 이처럼 홀가분할 터다.
우희가 마차에 올랐다.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창을 열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창 너머로 들어왔다.
이겸의 품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보고 있는데, 그가 문득 우희의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꽃물이 벌써 이만큼이나 밀려났군요.”
그의 말에 우희도 제 손톱을 내려다봤다. 갑자기 왜 꽃물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우희는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꽃물이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민가의 속설을 이내 떠올렸다.
별생각 없이 반응하지 않기를 잘했지. 하마터면 ‘영양보충이 원활하니까요. 손톱이 쑥쑥, 발톱도 쑥쑥.’ 같은 소리나 지껄일 뻔했다.
아름답고 감상적인 남자를 데리고 살려면 자잘한 배려가 필요한 법이었다.
“만일 제가 신선이었으면 도술로 당장 첫눈이 내리도록 할 텐데.”
우희는 손톱 끝에 간당간당 남아 있는 꽃물을 응시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아까까지 자신이 보고 있던 풍경이 떠올랐다. 우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만 전 아직 신선의 몸이 아니니까—.”
우희가 이겸에게서 몸을 뗐다. 창턱에 팔을 걸친 뒤, 손을 창밖으로 내뻗었다. 이겸이 본능적으로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참으로 그다운 반응이었다. 우희는 다른 마차가 지나가지 않는다고 상대를 안심시켰다.
“이겸, 이것 봐요. 내 손톱이 어떤 색으로 보여요?”
우희가 그를 일깨웠다. 이에 이겸이 창 너머의 손톱을 보았다. 찬연히 깔린 노을 아래 모든 것이 주홍색이었다.
“이겸?”
우희가 으쓱거리는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꽃물 색이네요.”
“그렇죠?”
우희가 다시 이겸의 품에 푹 안겼다. 든든한 품에 안긴 채로 창턱에 손을 올려놓고는 말했다.
“마른 가을하늘에 눈이 내리게 할 순 없지만요. 그보다 오래 가는 방법을 알아요. 앞으로 저녁노을이 질 때마다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내 손톱 색은 매일매일이 꽃물일 테니.”
우희가 이겸을 올려다봤다.
“가끔 불안한 눈으로 내 손톱을 쳐다볼 필요 없어요.”
“…….”
“그냥 매일 내 곁에 있어요.”
차오르는 먹먹함에 이름조차 감히 부르지 못한다. 이겸은 그저 우희를 응시하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간질였다.
재잘거리는 우희의 말소리. 때때로 동조하는 이겸의 음성. 그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웃음.
생생세세(生生世世),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귀갓길은 노을보다 따사로웠다.
* * *
“상제님, 감축드립니다.”
백발성성한 노선관이 손녀 연배로 보이는 맹아를 향해 술잔을 들었다. 오늘만큼은 맹아도 순백색 면류관을 내려놓고 맘 편히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무릇 축하주란 아끼고 아끼던 술을 따야 하는 것이라. 이미 천궁 창고에서 제일 좋은 술을 동이째 가져오라 일러두었다.
“자네도 수고가 많았어. 이제야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지 않겠나.”
“물론 하우희가 천선이 되기까지 최소 십 수만 년이 남긴 했습니다만…….”
맹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노선관은 얼른 뒷말을 이어 붙였다.
“십 수만 년쯤이야 눈 깜짝할 새 흐를 테지요. 허허허!”
“술맛 떨어지게 말이야.”
“허허! 허허허허허!”
“자네는 참…… 그 화술이 문제야. 내 우희와 함께하면서 느낀 건데 말로써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예, 예, 그러실 테지요. 아무렴요.”
노선관이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맹아가 혀를 차며 술잔을 비웠다.
“혀에 착 감기는구나!”
맹아는 선동의 시중을 사양하고 친히 잔을 채웠다. 극락정에서 몸종 노릇을 하며 깨달았다. 어떤 일은 남이 해 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손을 쓰는 게 빠르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이 노구(老軀)도 하우희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상제님께서 그이를 아끼시는 까닭을 알 듯합니다.”
노선관은 은연중에 자신의 연로함을 강조하며 운을 띄웠다.
“진이겸과 진이흔 둘에게 준 약조만 해도 말입니다.”
“그렇지.”
맹아가 생각났다는 양 무릎을 쳤다.
“하우희는 전생에 정혼을 하고도 진이겸을 떠났기에 앞으로는 영원히 그의 곁에서 돕겠다는 약속을 한 게 아닙니까.”
맹아가 노선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또 진이흔은 어떻고요. 전생에 하우희는 진이겸의 양모가 부린 술수 때문에 진이흔의 정비가 되었지요. 옆에 있는 동안 그를 속이고 밀정 노릇을 하였으니, 앞으로는 영원히 진이흔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거고요.”
“우리가 붉은 실을 잘라서 그 모든 일의 발생을 막았네만, 두 작자의 마음속에는 원념으로 심어졌을 수도 있어.”
맹아가 감탄의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희는 거기까지 내다본 게지. 원념의 근원을 막은 것이야.”
노선관이 손뼉으로 동조했다. 하우희의 일처리 실력은 증명이 된 것 같으니 빨리 좀 천궁에 올라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인수인계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예, 예, 무슨 놈의 인수인계를 십 수 만년씩이나…….”
맹아가 주안상 너머로 눈을 찌릿 흘겼다. 노선관은 특유의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며 도술로 우희의 모습을 허공에다 크게 띄웠다. 상제의 주의를 돌릴 목적이었다.
과연 총애하는 인물의 얼굴이 허공 가득 떠오르자 맹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상제님, 한 잔 더 하시지요.”
“좋지! 자네도 맘껏 드시게.”
태초부터 맡아 온 직무를 이제 그만 남에게 좀 떠넘기고 싶은 두 천선은 날이 저물고, 달과 별이 하늘을 수놓고, 또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만 년 뒤, 최연소 천선으로 상제 대리에 임명되는 하우희의 활약으로 마군의 탄생은 한동안 미뤄졌다는 후문이다.
『극락신선』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