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99화 (99/100)

99화. 선계로 한 걸음 더

황제의 서재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다만 며칠 전의 사통죄 사건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사안인데도 관련자들이 또다시 대전이 아닌 서재에 모인 점이 특이했다.

우희는 아마도 황후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황후는 반드시 말을 해야겠는데, 그녀는 목숨을 위협받은 단왕비도 아니고 춘약 사건 공범으로 지목받은 금 귀비도 아니니 대전에 들어와 언성을 높일 명분이 없었다.

물론 황후 본인은 그 따위 규범에 얽매이지 않을 터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대신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황후의 태도를 꼬집는 이가 있을까 봐 장소를 서재로 고른 것이다.

‘참 대단한 마음씀씀이십니다.’

우희는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일부러 엇갈려 치는 박수라는 부분에 우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실은 황후를 규탄하는 소리엔 신경도 안 쓰면서 말이야. 그저 내 사람 귀에 안 좋은 말이 스치는 상황 자체가 싫다는 거잖아.’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우희는 이겸과 함께 인사를 올렸다. 오늘은 이겸이 형부에서 고초를 겪은 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날이었다. 그가 보덕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관심이 모조리 이겸에게 집중되었다.

“며칠 전에 짐이 단왕비에게서 들은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모두 폐하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짐이 뭘 하기라도 했더냐. 네 옆을 쭉 지킨 이는 단왕비가 아닌가.”

형제끼리 한 시진은 너끈히 대화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우희에게 시선을 나눠 주었다.

“올해는 아무래도 단왕비가 고생을 하는 해인가 보다.”

말도 마라. 진짜 1만 년 만에 등골 빠지도록 고생 중이니까.

우희는 이런 속내를 감추며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며칠 전 금 귀비를 보며 배운 바가 있어 벌써부터 성급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두루 살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희는 철저한 피해자를 연기해야 했다. 남편과 범왕의 악연을 모른 채 살다가 초봄의 사고가 전환점이 되어 짧은 행복을 누린 것도 잠시뿐. 남편은 형부에서 초주검이 되어 나왔고 단왕비 본인은 무도한 범왕의 눈에 들어 앞으로의 평탄한 삶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좋아, 정리 완료.

“폐하.”

다만 황후가 우희의 결백을 믿어 줄지를 자신할 수 없었다. 이흔이 사흘간의 자유를 청할 때, 우희가 자기도 나가게 해 달라고 말을 보태지 않았다면 이흔의 주장은 다소 힘을 잃었을 것이다.

거기다 또 하나. 황후의 권한으로 증거를 빼내어 정화보검을 돌려주었으나 우희는 이흔을 찌르는 데에 실패했다. 사실 황후도 우희가 이흔의 무력을 능가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기회를 보아 찌르는 경우를 노렸을 터.

한편으로는 우희의 복수심이 진짜라면 왜 자기가 예전에 준 독약을 안 쓰고 굳이 단검을 쓰려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억울한 피해자가 아니라 다 된 밥에 재 뿌린 인간처럼 보일 수 있겠는걸.’

우희는 일단 황후가 취하는 태도를 지켜보며 앞으로 할 말의 수위를 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중에 진상을 아는 이는 우희와 이겸 둘뿐이다. 진상을 알고 있으니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움은커녕 일이 잘 풀려서 마음이 푹 놓였다.

우희의 입장에선 어느 한쪽을 희생시킬 필요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게 됐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이겸은 우희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어쨌든 진이흔의 방해가 없는 수십 년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겸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희의 마음이었다.

우희가 스스로 흡족할 만한 떳떳한 결과를 얻었다는 점.

우희는 일견 언행이 시원시원하며 한 번 믿음을 준 이에겐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것을 내어 주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게다가 신선으로서의 긍지를 중히 여겼다. 아무리 이겸이라도 그 긍지를 꺾게 만드는 일에 가담했다면 우희는 이후에 이겸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되었다. 이겸은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우희의 마음을 잃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줄곧 해 온 방식대로 우희를 얻은 거다.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이와 같은 이유로 단왕 부부는 기꺼움을 감추고 불안함을 연기해야 했다.

‘만일 내가 저들 중에 한 명이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로울 수 없었을 테지.’

이겸은 이래서 우희가 위중한 상황에서도 종종 강 건너 불구경하는 태도를 취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정보의 양이 다른 이는 태도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우희가 태연하다 못해 현실에서 좀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 이래서였다.

‘그리고 이젠 나도 남들 눈엔 우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뵈겠군.’

지금 보덕재를 가득 메운 이들은 마군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상상은 전란으로 나라가 망하는 정도일 터다. 한데 봉무국은 선황 때부터 2대에 걸쳐 안정적인 치세를 누리고 있으니 이조차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선황께선 말년에 불법(佛法)에 심취하더니 아들인 단왕은 젊어서부터 뜬금없이 도술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겠어.’

어느 순간 눈앞의 풍경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대신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유리하게 끌고 갈지 고민 중인 황제, 당장 범왕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이웃나라에도 협조 요청을 보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황후, 말없이 무릎 꿇고 있지만 속내는 누구보다 시끄러울 금 귀비, 각자의 이득을 앞세우고 있는 신하들.

분명 이겸은 그들과 한 공간에 있는데도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형과 형수에 대한 이겸의 감정은 각별하건만, 이들조차 조금은 관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희는 인간에게 환생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수십 년이 지나 진이락과 오은이 죽고 나면 이들은 각자 전생의 기억을 잊은 채 환생할 것이다.

현생에 지독히 얽혔던 두 사람이 다음 생에도 만나게 되는 편이 좋을까? 만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들은 또 사랑에 빠질까? 아니라면 어떤 이를 짝으로 만날 것이며 어떤 삶을 살아갈까?

‘생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니 죽음이 이별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신선이 된 진이겸은 다시 환생한 진이락을 만났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이겸은 우희의 속삭임에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다고, 딴생각에 빠져 못 들었는데 한 번 더 말해 줄 수 있겠냐고 묻자 우희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다녀왔군요.”

“……예?”

“당신도 슬슬 시작되는 거예요.”

우희가 조그만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경계를 넘어가는 거랍니다.”

이겸이 다소 놀란 눈으로 우희를 쳐다볼 차례였다.

“말하지 않았는데 어찌 아셨습니까?”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에 우희는 표정을 단속했지만 입가가 살짝 움직이는 데까지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잠깐 잊으신 것 같은데 제가 1만 년 선배거든요.”

단왕 부부와 비교하면 저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정예병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는 가운데 황제에게 화살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이 단 한 발이라도 온 황궁이 뒤집힐 일이긴 하다.

황궁경비대장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게 당연했다. 귀신이 쐈든 사람이 쐈든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쐈건 화살은 날아들었고, 황제의 손등에 상처가 났다. 당장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화살을 쏜 자가 범왕이라면 속히 도성 문을 닫아야 할 것이며, 범왕의 사주를 받은 자라면 황궁 내의 배신자가 누군지 밝혀내야 합니다.”

“범왕은 이미 도성을 빠져나갔을 걸세. 그러니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야.”

황후가 확신 어린 투로 말했다.

“지금은 사주받은 자를 찾는 것보다 그쪽이 중하네. 적장의 목을 베면 추가적인 지시도 내려오지 않을 텐데, 어찌하여 경은 잔챙이 잡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가?”

우희가 조용히 눈을 굴렸다. 비유 봐라. 잔챙이란다. 적장의 목을 벤단다. 딴다는 표현 대신 벤다는 표현을 쓴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과연 장군도 아닌 황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에 웅성대는 자들이 있었다. 개중에 용감한 자가 나서서 확신의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청했다.

“범왕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범왕부에 있었습니다. 신첩이 증인을 확보하였나이다.”

이윽고 낯익은 자가 보덕재로 들어와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끔뻑끔뻑 졸곤 하던 범왕부의 문지기였다. 미천한 신분이 감히 황제를 배알하니 긴장으로 손이 떨리고도 남을 터다.

‘근데 안 떠네.’

우희가 문지기를 아래위로 꼼꼼히 훑었다. 주의 깊게 살피자 그도 단왕 부부와 같은 처지임을 알 수 있었다.

연기 중인 것이다.

‘하긴 범왕부엔 말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아서 어제저녁엔 우리가 마차를 보내 줄 정도였지. 그런 곳에 문지기가 붙어 있는 것도 이상해.’

비절영은 어디에나 침투해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희는 추후에 곽현을 수련시켜서 비절영을 감시하는 그림자로 키워 볼까 궁리를 하였다.

이겸에겐 익숙하고 우희에겐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누가 나와서 한참 떠들면 다른 인간이 나와서 반박을 하는 식이었다.

사내들이 실컷 떠들 동안 서재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금 귀비에겐 입을 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친부 금 대인도 조정 중신으로서 열심히 의견을 내세웠으나, 그중에 딸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하여 이 시간부로 범왕 진이흔의 지위를 박탈하고 봉무국 전역에 수배령을 내리며 체포 과정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수준의 상처를 입더라도 그 상처 입힌 자의 죄를 면한다.”

후궁에 놓은 바둑돌이긴 하나 장장 10여 년이나 성총을 독차지했던 금 귀비. 황제가 그녀에게 눈길을 준 것은 명을 내릴 때의 일순간에 불과했다.

“즉시 빈(嬪)으로 강등하고 냉궁에 보내 참회케 하라. 단 그간의 노고를 보아 3년의 제한을 두겠으며, 두 황녀는 목비와 상 미인에게 보내 키우게 할 것이다.”

이에 금설약은 자기변호 한 마디 없이 황제에게 절을 하였다.

* * *

보덕재를 나서는데 황후가 우희를 불러 세웠다. 처소에서 둘만 따로 보자고 했다. 마침 이겸을 찾는 무리도 있어 단왕 부부는 나중에 마차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하였다.

“자네에게 비절영을 호위로 붙여 주겠네.”

“네?”

우희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가 얼른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황후가 만약 동서의 무고함을 믿는다면 지금 이 모습이 순진한 토끼처럼 보일 것이다. 어차피 그게 목적이다.

우희가 비절영 호위를 가지고 하는 생각은 ‘곱상한 녀석으로 주시면 좋겠다.’ 이 정도이므로.

“수하가 말해 줬네. 자네는 범왕을 어떻게든 개심시켜 보려 했다지. 자네에게 품은 감정을 역이용해서 죽이지 않은 까닭도 그 때문이고.”

“예에…….”

“자네도 이겸과 비슷한 구석이 있군. 마음이 물러.”

걱정과 달리 황후는 우희를 믿는 눈치였다. 그냥 믿는 정도도 아니고 오늘 이대로 얘를 보냈다가 귀갓길에 납치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는 수준이었다.

그것 참 다행이긴 한데.

‘제가 이겸과 비슷하다고요? 아뇨. 그보다는 황후마마를 닮은 듯한데요. 한번 내 사람은 끝까지 내 사람인 부분에서 말이죠.’

차이점이 있다면 두 팔 가득 넉넉히 품는 우희에 비해 황후가 자기 사람으로 여기는 이는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할 만큼 적다는 점이겠다. 그리고 한번 적으로 여긴 놈은 끝까지 적이라는 점도 다르다.

“이제까지 범왕이 집착하는 상대는 이겸이었지. 한데 그게 자네에게로 옮겨 간 것 같은데 본궁이 어찌 손 놓고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비절영까지는 좀…… 과하지 않을까요? 왕비 지키는 임무를 맡기엔 너무 바쁘신 분들이 아닐지.”

“영주의 명이라면 지옥 불구덩이에서라도 따라야지.”

이미 결정 내리고 나서 묻는 거네. 그럼 왜 물어요. 내가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우희는 적당한 선에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까 범왕부 문지기 같은 녀석 말고 최대한 잘생긴 자로 보내 달라는 부탁이 혓바닥 끝에서 맴돌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았다. 다만 파견할 때 누가 오는지 귀띔이라도 해 달라고 말했다.

“얼굴을 확실히 익혀 두고 싶어서요.”

“……자네도 내심 걱정이 되는 게지. 알았네.”

“감사합니다. 하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후궁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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