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두 마리의 붕새
“심소천, 선자님을 뵈옵니다.”
소천이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저번에는 소천이 예를 올리면 올리는 대로 별생각 없이 받았는데, 이제는 계속 하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여덟째에게 한 당부와 같은 맥락이었다.
“소천 선자께선 잘 지내셨는지?”
“예……?”
“뭘 그리 놀라느냐. 넌 이제 극락정의 당당한 주인이거늘 인간 왕비를 볼 때마다 무릎을 꿇을 것이냐?”
“하오나.”
“일어나렴.”
우희가 웃는 얼굴로 소천을 일으켜 세웠다.
“게다가 우리가 몸이 바뀐 사실은 아직 선계에 비밀이니라. 한참 더 비밀을 지켜야 해. 내가 이번 생이 끝나서 선계에 들 때까지 말이다. 우희 선자가 1만 년 동안 얼마나 오만하고 고고하게 살아왔는데 자꾸 인간에게 극상의 예를 갖추면 어쩌니.”
“아…….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만하고 고고한 연기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요…….”
우희에게서 밝은 웃음이 터졌다.
“그럼 적당히 하려무나. 뭐, 그간 너와 마주치는 신선들은 하우희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 보다 하겠지.”
우희는 소천의 단전에 손을 올렸다. 단전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린 다음 정신을 집중하자 빈틈 하나 없이 차 있는 도력이 느껴졌다.
도술의 도 자도 모르는 아이가 이만큼의 성과를 내려면 어지간한 노고로는 불가능했을 터다. 아무리 10제자가 옆에서 도왔다고 해도 말이다. 우희가 소천에게서 손을 거뒀다.
“수고가 많았다. 근데 여덟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이제 이 몸은 네 것이니 마음 편히 가져도 됨을 알았을 텐데.”
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월아 네월아 여유롭게 채워 가지 그랬느냐. 너무 애쓰진 않았을까 그게 걱정이구나.”
“다른 분들도 선자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답니다.”
소천이 문득 덧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홀가분함이 지나쳐서 금세 흩어질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우희는 이 점이 참으로 신기했다. 올해 초만 해도 우희 자신이 쓰던 몸이었다. 그전에는 저 몸으로 1만 년을 살았다.
몸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분위기가 이렇게나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는가 보다. 지금의 소천은 1만 년을 살아온 우희보다도 인간계와 연이 없는 이처럼 보였다.
“이제야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소천이 큰 결심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잠시나마 선자님의 삶을 욕심내었어요. 그와 동시에 원망했습니다. 원망의 대상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어요. 아마 운명을 관장하는 분이 있다면 그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희는 슬며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제님, 듣고 계시는지요. 오랜만에 극락정에서 의견이 올라가니 귓구멍을 열고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우희 생각에 맹아는 지금 천궁에서 편히 자고 있을 것 같았다. 적시적소에 인재등용을 하고 난 자가 으레 그러듯, 간만에 두 발 뻗고 단잠을 자리라.
“선자님과 저는 용모가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삶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지요. 인간 심소천이 원한 바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제 벗들이 읽는 서책을 읽고 싶었어요. 우스운 걸 보면 웃고, 울고 싶을 땐 울기를 바랐답니다.”
심소천 정도의 절세가인은 당연히 시선의 감옥에 갇혀서 일평생을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힘겨운 티를 내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가문사람들에게서 호통이 날아왔을 터다.
그나마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덕에 곱게 지내다가 혼인할 수 있지. 백정의 딸로 태어났는데 그 얼굴이면 필시 기루에 팔려갔을 터라고. 그러니 지금 처지에 감사할 줄 알라고.
“네가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쥐었는지 아느냐……. 단왕 전하께서 혼담을 넣으셨을 때 들은 말입니다. 저는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는데, 방 안의 어르신들이 모두 웃고 계셨어요.”
소천이 한 번 더 반복해 말했다.
“다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환히 웃으셨어요.”
정작 가문의 딸인 소천에게는 좋은 일이 있어도 소리 내어 웃지 말라고 교육을 시켜 놓고서.
“그런데 이런 삶도 있었다는 거예요. 극락정 2층 건물에 가득한 서책을 마주하자 가슴이 두근댔어요. 제자분들은 제게 무엇이든 읽어도 좋다고 하셨지요. 남의 몸을 쓰고 있다는 자각도 못한 채, 눈이 벌게지도록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맹아와 10제자는 우희가 자비롭다고 했지만 소천으로서는 모르는 이의 관대함에만 기댈 수가 없었다.
“사실은 모든 게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음을 듣고서야,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염치가 없지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을 만한 생각을 또 심각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우희는 소천을 달랬다. 괜찮다는 말을 거듭 듣고 나자 비로소 소천이 얼굴을 폈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천의 말에 우희가 웃었다.
“말하고 싶은 것에 이어 보여 주고 싶은 것이라. 네가 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씩 늘어나니 기쁘구나. 그래, 무엇이냐?”
“먼저 종이가 필요합니다.”
소천이 자리 옮기기를 청했다. 손으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니 정자에 책상과 지필묵을 갖다놓았다. 우희는 선선히 그러마고 몸을 돌렸다. 우희가 소천보다 앞서 세 걸음을 옮겼을 찰나였다.
아무 예고도 하지 않고 우희가 소천의 단전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선자님을 앞세운 채 걷고 있던 소천이 순간적으로 몸을 둥글게 휘어 주먹을 피했다.
주먹을 피하자 이번엔 왼쪽에서 손날치기가 날아왔다. 주먹이든 손날이든 상당한 내공이 실려 있기에 그대로 맞으면 최소한 시커먼 피멍이 들 터였다.
소천은 손날이 날아오는 방향을 따라 몸을 뒤로 젖혔다. 등줄기를 활처럼 휜 상태로 한 바퀴를 다 돌기 전에 우희의 발이 오금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것까지 마냥 피할 순 없었다. 소천은 우희의 손날을 강하게 밀어내며 그 반동으로 우희의 발을 차 냈다. 동작을 마무리하는 자세가 대단히 어설펐지만, 기습공격을 멈춘 우희의 표정은 극락정 폭포 위에 뜬 무지개보다도 밝고 환했다.
“네 어찌 내 공격을 막았느냐?”
전혀 기대가 없었던 부분이라 더욱 기뻤다. 소천이 쑥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막다니요. 부끄럽습니다. 선자님께서 많이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기습이었지 않느냐.”
우희가 기쁘게 반박했다. 이에 소천은 10제자의 처소 방향을 일별했다가 대답했다.
“실은 일랑께서 귀띔해 주셨답니다. 선자님은 도력이 모두 채워졌음을 확인하고 나면 반드시 기습공격을 하실 거라고요.”
“그래?”
우희도 제자들의 처소를 향해 눈을 흘겼다.
“저 녀석들이 입을 털었단 말이지?”
흐음, 하며 흘겨보지만 애초에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다. 우희가 정자로 가자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몇 걸음 옮긴 순간, 또다시 상체를 틀어 눈 깜짝할 새 주먹을 열 번이나 날렸다. 열 번 중에 여섯 번은 피하고 두 번은 막고 두 번은 받아쳐 낸 소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알려 주셨어요.”
“내가 제자들과 너무 오래 같이 살았구나.”
소천은 공격을 막은 손이 얼얼한지 긴소매 안쪽으로 손을 주물렀다. 우희가 손을 내어 보라고 했다. 소천이 주저하다가 우희의 말을 따랐다.
“네 몸은 10만 년 치 이상의 도력이 든 몸이니라. 하나 몸 주인에 따라 힘을 운용하는 범위가 달라지지.”
우희가 소천의 손을 가만가만 살폈다. 혹시라도 손톱에 긁히거나 관절이 삐끗한 곳은 없는지 보기 위함이었다.
“너는 서책을 좋아하니 고서(古書)를 탐독하는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알아가 보거라.”
“……끝내 1할도 꺼내 보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보이다니.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우희가 소천의 표현을 짚었다. 소천의 눈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우희 자신이었다.
“내가 보지 않으려 든다면 그간의 네 성과는 없는 것이 되잖느냐. 모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거부할 터이냐?”
우희가 소천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행히 다친 덴 없구나.”
둘은 극락정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이르렀다. 한데 책상 위의 물건들 상태가 하나같이 기이했다. 연적에는 물이 없고, 먹은 포장 종이를 벗기지도 않았으며, 벼루와 붓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소천이 글씨라도 쓸 줄 알았던 우희는 지필묵을 바로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의아해했다.
‘이걸 준비한 이는 분명 내 제자들일 텐데. 이 녀석들이 시시한 장난을 친 건지, 아니면 정말 어디가 망가진 건지 헷갈리네.’
그때 소천이 도력을 끌어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오른손은 곧게 뻗어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나머지 손가락은 모은다. 왼손은 같은 자세를 취하되 앞으로 향하지 않고 오른팔 안쪽에 혈을 찍듯이 댄다.
‘뭔가 있구나.’
우희는 제일 기본적인 자세로 집중하는 소천을 지켜보았다. 운용하는 도력의 양이 많지 않다보니 눈에 보이는 변화도 미미했다.
그러나 미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절벽 아래 선경의 다채로운 빛깔이 반딧불처럼 소천의 손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붉은 단풍에서 한 점, 샛노란 은행잎에서 한 점, 사철 푸른 송백에서도 한 점 날아오고, 바위, 흙, 때마침 도토리를 물고 뛰어가던 다람쥐의 꼬리에서도 빛깔 하나가 날아왔다.
그렇게 곧게 뻗었던 오른팔을 접어 종이 위를 가로지르니, 먹물이 없는데도 먹처럼 검은 글자가 흰 종이 위에 나타났다.
“저는 기대에 찬 눈길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한데 선자님께선 제게 아무 기대도 걸지 않으시니, 희한하게도 힘껏 노력하여 놀라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우희는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자를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종종 사물에서 색을 따와 옷을 물들이곤 했지만 1만 년간 단 한 번도 이것으로 글자를 쓸 생각은 못하였다.
“모든 색을 더하면 검은빛이 되지…….”
종이꽃. 종이인형. 둘 다 소천을 묘사하던 단어였다. 백짓장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죽지 못해 살아가던 소천.
그랬던 이가 눈이 벌게지도록 글을 읽고, 서책에 파묻혀 자고, 종이 위에 자신의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보니 어째선지 우희의 가슴이 다 먹먹해졌다. 우희는 괜히 헛기침으로 목소릴 가다듬었다. 소천이 쓴 네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붕정만리(鵬程萬里).”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는 크기가 수천 리에 달하며 한 번의 날갯짓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다고 한다. 갈 길이 요원함을 뜻하는 동시에 9만 리처럼 창창한 미래를 의미하기도 하니 실로 호쾌한 기상의 글자였다.
“선자님께서 옥황상제의 눈에 드시어 귀한 자리를 약속받으시니 이는 소천의 기쁨입니다.”
소천은 자기도 우희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더는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고마운 이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희는 붕새가 자신을 뜻하는 거냐고 물었다. 소천이 그렇다고 답했다.
“내가 처음에 이 글자를 접했을 때 왼쪽의 붕(朋)이 크다는 뜻의 범(凡)이라고 배웠느니라. 한데 붕의 원래 뜻은 벗이지 않느냐.”
그래서 사부 옥진에게 되물었더니 그녀는 대답 대신 뜻 모를 미소만 머금었다.
“소천이 너는 날 두고 붕새라 하였으나, 내 눈엔 네 앞날 역시 나와 달라 뵈지 않아.”
우희가 소천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라면 더 멀리 갈 수 있지. 이후 내가 날아가는 그 옆에 네가 있다면 참 기쁘겠어.”
상제는 우희의 본래 몸으로는 진선 이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훌륭한 몸이지만 한계가 뚜렷하다고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겸과 이흔도 천선들의 예상대로 살지 않았다. 우희는 소천의 뺨을 다정히 쓸어 주었다.
“그것이 하우희가 네게 거는 첫…… 기대구나.”
동시에 심소천을 기쁘게 만든 첫 기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