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둘 다 털끝 한 올도 다치지 마요
“신선이 되는 순서가 정확히 어떻게 됩니까?”
이흔의 질문에 우희가 반색했다. 드디어 황야의 늑대가 말 듣는 시늉을 하는구나 싶었다.
옳지, 옳지. 내 사랑을 받으려면 나를 힘들게 해선 안 되지.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인간일 동안에는 사부님 밑에서 수련을 해요. 수련을 하면서 점점 나이가 들겠죠. 그러다가 자연사를 하면 하루 뒤에 결과가 판가름 나요.”
이흔에게 이것을 알려 줄 수 있어서 어찌나 기쁜지 모르겠다. 우희의 목소리가 저절로 흐뭇해졌다.
“선계에 드는 것에 성공한다면 붉은 알갱이인 홍진을 뱉으면서 혼백이 떨어져 나와 신선으로서의 새 육신으로 들어가고요. 실패하면…… 그냥 그렇게 죽은 거고요.”
“죽은 자만이 마군이 된다면서요. 그럼 판가름 나기 전의 하루 동안은 일종의 보류 상태인 겁니까?”
“이해가 빠르네요.”
우희가 젓가락을 맞부딪쳐 경쾌한 소리를 냈다.
“대사형의 애제자가 되겠어요.”
“나나 단왕은 신선이 되거나 마군이 되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사부들도 특출한 데다 우리가 성취를 이루는 데에 실패할 리는 없으니까.”
지금 진이흔이 자기랑 이겸을 한 뭉텅이로 묶으면서 ‘우리’라고 했어?
우희는 귀를 의심했다. 이흔이 빈정거릴 때 쓰는 ‘우리 아우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방금 말한 ‘우리’는 원뜻 그대로 같은 편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식탁 아래에서 발끝으로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러다가 옆자리의 이겸을 힐끔 보았다. 곧은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도 급하게 먹는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접시 비워지는 속도가 느렸다.
이겸이 좋아하는 게 요리를 집어다가 접시에 올려 주자 그는 바로 그것부터 먹었다. 순간 우희는 황제 진이락을 욕할 수가 없어졌다.
‘뻔뻔한 놈. 기분 나쁠 리가 없지. 네놈이 황후라면 정신 놓는 걸 알긴 아는데 그거랑 별개로 다른 미인과 있는 순간이 불쾌했을 리 없어.’
이것이 권력자라면 응당 짊어져야 하는 심란함인가. 우희는 이겸의 깨끗한 손가락을 쳐다보며 술렁이는 속내를 달랬다.
“문제는 황후마마입니다.”
우희가 이겸을 챙기는 모습을 놓쳤을 리 없는 건너편의 이흔이 스윽, 새로운 화제를 들이밀었다.
“황후께선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시죠. 이번 사통죄 사건에서 무죄를 증명하고 풀려난다고 해도 황후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내 시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황후의 집착은 계속될 거예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화제 선정임을 인정하는 바였다. 우희는 이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좋은 수가 있겠냐고 묻자 이흔에게서 나온 대답이 이랬다.
“차라리 나 혼자 욕심을 품어 사건을 꾸몄음을 인정하고 장형 스무 대를 받을까 합니다.”
잠깐, 뭐라고?
“황후와 금 귀비 둘 다 내게 이를 갈고 있을 테죠. 금 귀비는 종인원장에게 일러 형벌 집행에 자비를 두지 말라고 할 것이고, 황후 또한 이 흐름에 올라탈 겁니다. 진이흔은 가혹한 형벌을 받은 후 약해진 몸으로 자객 손에 죽는 겁니다.”
죽는다고?
“단왕비께선 범왕부 저택의 버려진 연못 꼴을 아시지요.”
“당신이 사향원으로 몰래 이동하는 동안, 거기에 가짜 시체를 띄우자고요? 썩은 물에 불어서 형체가 좀 훼손된 시체를 당신인 척하자고?”
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놓고는 식사 자리에서 흉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내서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인 데다 애당초 틀려먹은 발상이었다. 우희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제발 그만.”
진짜 밥 한 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
“제발 부탁이니까 몸 다치는 걸로 애정을 증명하려 하지 말아요.”
무릎을 꿇고 빌라면 우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야만 말을 듣는다면 뭔들 못할까.
“내 눈에 그건 그냥, 고행 열전이에요. 난 나를 위해 다친 걸로 감격을 느끼지 않아요. 알겠어요?”
우희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심지어 당신들은 자연사를 해야 한다고요!”
몸 좀 아끼라는 말을 왜 이렇게 못 알아먹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흔.”
우희가 이름을 불렀다.
“방금 제안은 기각이에요.”
“……하지만.”
“이겸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당신도 사람 몸을 누더기로 만들어서 돌려보냈잖아요. 참은 결과가 그 정도였다고요. 근데 황후와 귀비가 동시에 당신을 제거하려고 결심했어요. 장형 스무 대? 웃기지 마요. 다섯 대 맞기 전에 당신은 죽어요. 형틀에 묶인 순간 끝이에요.”
이겸이 넌지시 우희의 의견을 물었다. 그도 사향원까지 이동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림을 알고 있었다.
이흔은 아직 비절영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 황후가 때때로 살수를 보내긴 하지만 그게 비절영인 줄은, 더욱이 황후가 비절영의 수장인 줄은 모르고 있다.
비절영은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즉시 독을 깨물어 자결하기 때문에 이흔의 귀에 비밀조직의 실체가 들어갈 일은 없었다. 봉무국 전역에 숨어 있는 것도 모를 터다.
“어차피 인간계에서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했다면, 자백서 한 장만 남기고 튀어요.”
번거롭게 황제 앞까지 찾아가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있나. 뒤에 남는 사람들 사정 따위 봐주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사라지는 쪽이 이흔의 원래 성격에 어울렸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당신이 이겸처럼 책임져야 할 권솔이 천 명 넘게 있는 것도 아니고.”
범왕부 앞을 지키는 문지기는 금방 다른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형부든 변경이든 당신 따르는 추종 세력에게 미련도 없는 사람이 무슨…… 곤장을 스무 대나 맞아요?”
그쪽이 미련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인간인 거 빤히 아는데 괜히 하우희 눈길을 끌어 보려고 사고 치지 말라는 소리였다.
“이참에 마지막으로 경고할게요. 둘 다!”
우희가 이겸과 이흔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털끝 한 올도 다치지 마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목숨에 해로운 일은 절대 하지 마.”
만 번을 강조해도 모자랄 경고였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들은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경향이 있으므로 반드시 조건을 달아야 했다.
“약속 어기는 사람은, 다신 안 볼 거예요.”
붉은 입술이 단단히 오므라들었다.
“영원히.”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흔이었다. 우희는 자신이 사향원에 전서구를 띄울 테니 거기까지 가는 일은 걱정 말라고 말했다.
서신을 받은 태율이 도술로 문을 열어 주면, 이흔은 몇 달 고생할 필요 없이 바로 사향원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며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희는 일단 오늘 밤 단왕부에서 걸어 나가 귀가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다. 황제에게 얻어 낸 사흘의 여유가 다할 때까지는 황후가 손을 쓰지 않을 테니 최소한 모레 아침까지는 안전하다.
“당신이 사향원에 넘어가고 난 후에야 자백서가 발견돼야 해요.”
“그동안은 단왕부에 몸을 숨기고 계십시오.”
이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건녕각은 수풀이 우거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며 저 이외의 사람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형님이 며칠 머무르시기에 적합할 듯합니다. 거기 계시죠.”
건녕각이 이겸에게 어떤 장소인 줄 알기에, 그를 향한 우희의 시선에 엷은 놀라움이 깃들었다.
“이번 생엔 형님을 다시 뵙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것만이 이 상황에서 제게 유일한 위안이 되네요.”
* * *
이흔이 범왕부로 돌아갔다. 밤은 깊어 하인들이 등을 끄고 다니는 시간이 되었다.
우희는 사향원에 보낼 서신을 완성했다. 붓을 내려놓고 여태 쓴 것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태율 진선께 인간 진이흔을 맡기오니, 세상의 안녕에 이바지할 기회를 얻음에 마땅히 기뻐하시리라 믿사오며.”
우희가 읽기를 멈췄다.
“문장이 너무 긴가?”
하지만 고민은 잠시뿐이었다.
“문장이 길어야 막 혼란스럽겠지? 이게 진짜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 분간이 어렵겠지?”
그렇다면 이 서신은 아주 잘 쓴 글이다. 미래의 신하에게 보내는 공문인 동시에 추천서인데, 대사형을 깊이 의지하는 막내 사매의 진심까지 들어 있지 않나. 우희는 자화자찬하였다.
“사향원의 명성에 걸맞은 결과를 기대합니다.”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한 글자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 우희는 만족해하며 왼쪽 여백에 이름을 적었다. 이제 하우희 이름 앞에 ‘봉무국 단왕부’가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사부님, 다 하셨습니까? 저 여덟째입니다.”
“아, 놀래라.”
우희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난 제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 녀석은 사부 없는 극락정에서 희희낙락하다 보니 그새 예의를 잊어먹었느냐? 작은 소리부터 인기척을 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긴 하오나.”
여덟째가 혼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부님께서 워낙 집중을 하고 계신 데다 사부님의 글이 또 대단히 명문인지라 귀를 씻을 겸 듣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크게 부라렸던 우희의 눈이 이번엔 가늘게 좁혀들었다.
“입만 살았구나.”
“죄송합니다.”
“예의는 갖다 버렸고.”
여덟째가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소천이 밑에서 아주 살판이 난 게지. 수행은 느려졌지만 기쁨이 넘치니, 네 얼굴에 도는 광채만 봐도 알겠다.”
우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데 갑자기 어인 일이냐?”
“저희가 깎아먹었던 사부님의 도력을 온전히 채워 넣었습니다. 심 낭자께서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십니다. 다만…….”
여덟째가 말끝을 흐렸다. 우희는 제자가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을 대신 하였다.
“소천이는 봉무국 땅엔 발도 딛기 싫은 거구나.”
“죄송합니다.”
“여덟째야.”
우희가 제자를 나직이 불렀다.
“그건 네가 죄송해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우희는 제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네가 극락정으로 돌아가기 전에 네 사조께서 친히 설명해 주셨지. 이제 극락정의 주인은 하우희가 아니라 심소천이라고. 한데 너는 어찌하여 극락정 주인을 대신해 사부에게 사과하는 것이냐?”
“그것은.”
“이제 네 소속과 네 사부는 별개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섣불리 소천을 대신해 몸을 낮추지 마라.”
사과를 올리는 상대가 설령 사부라 할지라도. 우희는 담담한 얼굴로 선을 그었다.
“소천이는 인간계가 끔찍해서 극락정 땔감이라도 패겠다던 아이인데…… 어찌 고작 인사를 받겠답시고 이곳으로 넘어오라고 할까.”
여덟째가 자기 생각이 짧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제자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됐다. 기왕 왔으니 너는 서신을 사향원으로 보내렴. 대사형의 새 제자 될 사람은 일각 후의 종적을 장담할 수 없는 인간이니 직접 와서 잡아가시라 그래.”
“예, 알겠습니다.”
“가자꾸나.”
여덟째가 얼른 사부에게 길을 틔워 주었다. 우희는 긴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안개 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대로 가려다가 멈춘 까닭은 지금 처소에 있을 이겸이 생각나서였다.
“잠깐만.”
우희는 다시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새 종이를 끌어다가 이겸 앞으로 글을 남겼다.
【관산, 친구, 인사.】
이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봐도 괜찮도록 단어만 나열했다. 그다음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아침은 집에서 먹을게요.】
붓을 내렸다. 우희는 제자에게 일러 쪽지가 이겸의 손에 바로 나타나도록 했다. 이겸의 처소는 사향원보다 훨씬 가까우므로 도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아도 되었다.
“됐습니다.”
“그래, 이제 진짜 가자.”
우희는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