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약조의 무게
단왕부 전체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단왕부 사람들은 이제껏 수많은 연회를 치렀고 그중엔 갑작스레 잡힌 모임도 많았다. 하지만 왕부 문이 열린 이래 오늘 저녁 손님만큼 살 떨리게 하는 자가 없었다.
범왕 진이흔이 단왕부의 문턱을 넘었다.
잠입이 아니라 정식 초대였다.
단왕비는 상차림에 신경 쓸 필요 없이 평소대로 내오되 양만 3인분으로 맞추라고 지시했다.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으나 주방 하인들의 마음은 또 달랐다.
주인의 숙적이 처음으로 단왕부의 상을 받는 것이다. 하인들은 왕비의 지시를 지나치게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왕부의 위용을 보이고자 오후 시간을 통째로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가짓수는 평소대로인데 재료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저녁상이 완성됐다.
식사 자리는 이겸의 처소에 준비되었다. 차리는 일이 끝나자 하인들은 시중들 이 하나 남기지 않고 처소를 빠져나갔다.
‘이건 뭐…… 주인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수 년 만에 집에 돌아온 날 받을 만한 상인걸.’
우희는 하인들이 차리고 간 저녁상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 현이 이흔의 도착을 알렸다. 모시라는 답이 떨어지자 출입문이 열렸다.
“범왕 전하, 잘 오셨어요.”
우희가 일어나 그를 맞았다. 이흔의 뒤로 문이 닫혔다. 이흔이 우희에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주렴 너머에서 이겸이 나타났다.
두 사람 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에 우희가 손뼉을 쳤다. 중재자 노릇은 하우희에게 정말 맞지 않았다. 차라리 검 들게 해 줄 테니 두 남자랑 겨루라고 하는 쪽이 속 편하겠다.
“자, 여러분. 인사 안 할 거면 서로 그만 노려보고 자리에 앉아요.”
우희가 이겸의 팔을 잡고 눌러 앉혔다. 이흔은 상흔 하나 없는 이겸의 얼굴과 손등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뭐든 사라지게 하는 게 선계의 특징인가 보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아서 주인이 권하기도 전에 식사를 시작했다. 자기 앞에 있는 요리를 접시에 덜더니 서슴없이 입에 넣었다. 이흔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부귀영화가 좋긴 좋아.”
“입에 맞아요?”
“맛있습니다.”
“그럼 예의상으로라도 우리도 많이 들라고 권하지 그래요? 물론 단왕부에서 차린 음식이니까 우리가 권유를 받는 게 이상하긴 한데.”
우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응?”
“일찍이 교육 담당 태감도 손놓은 예의범절을 단왕비께서 잡으려고 하시네요. 감격스럽습니다.”
이흔이 젓가락 끝으로 이겸을 가리켰다. 그 상태 그대로 끝만 까닥거려 보였다.
“아우님, 많이 드시게.”
이겸은 둥근 식탁 너머의 인간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음식을 더는 용도의 긴 젓가락을 집었다. 우희의 접시를 가져가더니 거기에 요리를 정갈히 담았다. 그릇에 탕까지 떠서 우희의 앞에다 놓아 주었다.
이겸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쉰 것 같은데 겉으로는 크게 티가 안 났다. 우희는 고맙다며 생긋 웃었다. 이겸은 따로 반응하지 않고 자기 접시를 채웠다.
“범왕 전하.”
“이흔.”
이흔이 숟가락으로 탕을 저으며 호칭을 정정했다.
“앞으로는 쭉 그렇게 불러 줬으면 좋겠습니다.”
후, 불더니 탕을 한 모금 삼켰다.
“서신엔 간략하게 써 놓았지만 어쨌든 사정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 진이흔이 꽤 중요한 인물 같던데 말입니다.”
그가 우희를 보며 말했다.
“그런 자의 소소한 부탁쯤은 들어줄 수 있는 거겠죠?”
나한텐 소소한데 인간들에겐 안 소소한 문제더라고. 단둘이 있을 때면 모를까, 이겸이 빤히 옆에 있는 자리에서 잘도 이러는구나.
우희는 식탁 너머로 젓가락을 날릴까 고민했다. 하긴 어제 황제가 황후한테 하던 것만 봐도 그렇다. 아무래도 봉무국 황실엔 고질병이 전해지는 모양이다. 남 속 뒤집어 놓는 데 일인자들만 모아 놨다.
“저걸 보세요.”
이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지위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겸은 이복형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형님께 중임을 맡기다니요.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왕비께선 자꾸 기대를 거시는데 제 생각엔 아무래도 힘들지 싶습니다.”
순간 이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역시 남 속 뒤집기에 일인자인 사람을 들쑤시는 데엔 동족만 한 존재가 없었다.
“마군이란 게 죽어야 될 수 있다면서요.”
이흔이 바로 치고 나왔다. 얼핏 우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도 실은 이겸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단왕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냥 지금 자결하겠습니다. 수십 년 기다릴 필요 있나요. 지금 바로 내가 마군인지 아닌지 보자고.”
“형님께선 섣부른 소리를 삼가세요. 제가 그렇게 둘 것 같습니까?”
“내가 스스로 죽는 것도 막겠다는 뜻이냐? 단왕은 반길 줄 알았건만.”
어찌나 둘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는지 도무지 우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우희는 몇 번이나 입을 뻥긋거리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참을까? 아니. 참을 일이 따로 있지.
“얘들아.”
결국에 우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너흰 정말 뭐가 문제니……?”
호화로운 밥상을 앞에 두고 칼을 가는 자가 둘이나 있으니 입에 들어가는 게 음식인지 돌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렇잖아도 심각하게 고뇌하는 횟수가 늘어난 요즘이었다. 최소한 피를 덜 보면서 어떻게든 잘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다. 우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아무리 유능하다지만 말이다. 세상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 나 혼자 애쓰고 있는 것 같으면 화가 나…….”
“저기.”
“우희.”
“화가 난다고.”
우희의 계획대로라면 이 남자들과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해야 했다. 자신이 무사히 천선이 되어 천궁에 드는 그날까지 두 형제가 여전히 지지고 볶고 으르렁댄다면 참으로 곤란했다.
“지금이 1만 년 전이야? 전생이랑 똑같이 살 것이야? 그런 흐릿한 정신머리로, 응? 이 하우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어?”
듣는 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질문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너희를 신선으로 만들기에 성공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마군이 도래할 테고, 난 그때 상제님 옆에서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단 말이지.
도대체 옥황상제도 두렵게 하는 마군은 얼마나 강할지! 그놈을 상대하려면 또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할지! 그것만 생각하면 골이 지끈거리는데.
우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대업을 앞둔 정인에게 협조하지는 못할망정 서로 이를 드러내면 어떡하자는 거냐고.’
하늘에서도 이러면 나란히 냉궁으로 보내는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는 천상계가 아니네? 아직 푹 찔리면 꽥 죽는 인간의 몸이네? 더욱 뒷골이 당겼다.
만일 10제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굴이 흙빛이 되어 인간 남자들을 무릎 꿇리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단 꿇으라고. 상황이 잘 이해 안 돼도 납작 엎드리고 나서 생각하라고. 본래 성질이 그다지 아름다우신 분은 아니라고 속삭일 터다.
“잘해 보자고요…….”
우희는 한쪽 손으로 주먹을 지그시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한편 관자놀이에서 손을 뗐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말랐다. 차로 목을 축이고는 형제를 번갈아 봤더니 둘 다 우희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남자들이 모두 눈을 깜빡이고 있기에 우희도 얼른 눈을 깜빡였다. 그들보다 더 예쁘고 빠르게 팔락거렸다.
“아, 맞다. 사향원에 가신다고요.”
전혀 맞지 않지만 우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제 두 사람도 슬슬 이런 상황에 적응해야지.
“이흔.”
우희가 이제 만족했냐는 투로 이흔의 이름을 불러 줬다. 목소리는 나긋한데 어쩐지 어금니를 물고 발음하는 느낌이다. 이겸이 다소 동요했으나 직전에 반말로 위협당한 영향인지 반응이 비교적 점잖았다.
“수련을 하기엔 사향원보다 적합한 곳이 없어요. 내 대사형 태율 진선은 비슷하게 선계에 든 다른 신선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승급한 분이에요.”
거기다가, 하고 말을 이었다.
“대사형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겸을 은근히…… 골리려 드니까. 그 점에서 당신과 되게 합이 맞을지 몰라요.”
우희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흔은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사안에 관한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자기 말고도 이겸을 탐탁지 않아 하는 자가 있다니까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그게 우희의 대사형이라니 더 기분이 산뜻한 것이고.
“하나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문제아를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원에 보내 버리는 모양샌데요.”
분명 눈에 띄게 솔깃해했으면서 괜히 한발 빼는 시늉을 했다. 하여튼 심술은 타고났다. 이흔이 턱짓으로 이겸을 가리켰다.
“단왕이 가라 그러죠. 훌륭한 사부님 아래 배울 기회를 아우님께 양보해 드려야겠습니다.”
“어, 그건 안돼요.”
우희가 말했다.
“이번 생은 이겸에게만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이겸 외에 다른 측실은 보지 않기로 했어요.”
이흔의 눈매가 즉시 사나워졌다. 그와 동시에 우희 가까이 앉아 있는 이겸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미안하지만 한번 한 약속은 바꿀 수 없어요. 그리고 이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요.”
“그럼 이번 생에 나는 그대를 가질 수가 없나?”
“네.”
우희가 힘주어 대답했다.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점이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못 박아야 한다.
“한번 뱉은 말을 바꾸면 다음에 하는 말의 무게가 달라져요. 내가 아무리 요녀니 요선이니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 왔어도 책임감을 중히 여기는 사부님 아래 배운 신선이거늘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어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한 말투에 이흔이 반박하려던 행동을 멈췄다. 선황처럼 이겸을 편애해서가 아님을 깨달은 거다.
우희에겐 선약이 있고, 그것을 지키려 할 뿐이었다. 이는 우희의 떳떳함과 직결된 것이기에 누군가가 헤집으려 든다면 그는 우희와 뜻을 함께할 수 없었다.
이흔이 깨달았다면 됐다. 비로소 이 말을 해 줄 수 있다.
“이흔,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 둘게요. 나 하우희는 결코 진이흔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어찌 들으면 영원한 진실의 약속이다. 마냥 좋게만 들린다.
“비록 당신이 원하는 게 달콤한 거짓말이어도 당신을 속이지 않을게요.”
그러나 이겸은 알 터다. 그는 우희가 쉽게 영원을 입에 담지 않으며, 분위기에 휩쓸려서라도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말을 해 주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모르는 시간의 무게를 아는 우희는 스스로가 지킬 수 있는 것만을 말했다.
이겸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을 겪든지 그의 옆에서 돕겠다는 약속을, 이흔에게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은 각자가 원하는 바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자신이 받은 약속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당장은 깊이 와닿지 않기도 했다. 인간은 보통 연정을 품으면 혼인을 하고 백년해로를 입에 담는 게 당연하기에, 그 외의 형태를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겸과 이흔은 깨달았다. 우희가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킬 각오임을.
게다가 각자가 받은 약속 사항이 서로 다르다는 점 또한 묘한 자극이 되었다. 상대에겐 없는 게 내게 있다는 흡족함. 그리고 내게 없는 게 그에게는 있다는 불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