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91화 (91/100)

91화. 묵인

이흔이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소신을 풀어 주신다면 사흘 안에 무죄를 증명하겠습니다.”

다들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우희가 보기엔 그중에서도 황후의 심기가 제일 불편해 보였다.

이흔을 종인원에 가둬 두면 살수를 보내든 독을 쓰든 처리하기가 더 용이할 터다. 그런데 우희를 빼내고 이흔만 가둬 놓는 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현장을 발각당한 죄인을 풀어 주다니 어불성설이옵니다.”

종인원장이 강하게 나왔다.

“폐하께선 부디 엄정한 판단을 내리시어 황실의 위상을 떨어뜨린 죄인들을 속히 벌하소서.”

“본왕이 3년을 기다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사흘이잖나.”

이흔이 종인원장을 모로 보며 말했다.

“종인원장이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왕이 사통죄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줄행랑치는 게 걱정인 건지, 아니면…… 황실의 위상을 떨어뜨린 진범을 잡아올까 봐 걱정인 것인지.”

“폐하, 이미 수십 명의 증인을 확보했사옵니다.”

“춘약 때문입니다.”

이흔이 단언했다.

“소신은 근래 안 좋은 일을 겪은 귀비의 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귀비는 폐하의 사람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폐하의 눈 밖에 난 소신이 귀비의 청을 물렸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요. 그래서 나갔는데, 술에 춘약을 탔더군요.”

금 귀비가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황제가 손을 들어 막았다.

“범왕은 이번 일이 귀비의 짓이라고 여기느냐?”

대답 잘해라. 제발 대답 좀 잘해 봐. 이 순간만은 성질머리 죽이고.

우희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럴 리가요. 귀비도 이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이흔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감히 이런 함정을 파서 황실을 농락한 범인을 잡아야지요. 만약 소신이 사흘 내로 증거나 증인, 혹은 진범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때 이흔의 시선이 황후에게로 넘어갔다.

“소신의 목을 베십시오.”

야.

“윤허해 주시죠.”

황후가 즉시 남편에게 말했다.

저기요. 올케도 그걸 바로 물지 말고요.

우희는 나라꼴 한번 잘 돌아간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종인원장이 나서서 이흔의 주장을 잠재우려 했다. 만약 범왕과 단왕비가 정말로 함정에 빠진 거라고 해도 일단 종인원에 수감된 이상 조사는 그들 몫이 아니라고 했다.

조사관을 임명하여 절차에 맞게 진행해야 할 일을 당사자가 직접 해결하게 한다니 이럴 수는 없다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어느 하나 틀린 데 없는 의견이었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 적법절차의 개념을 나 몰라라 하는 자가 둘이나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를 자극시키다니. 우희는 이흔의 무모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본인을 제거하고 싶어 안달 난 상대에게 자신의 목을 칠 훌륭한 명분을 옥쟁반에다 바쳤다.

‘저것 좀 봐. 황후의 안광이 범상치 않아. 종인원장이 무슨 소릴 해도 황후가 칼같이 쳐 내고 있잖아.’

우희는 대화가 진행되는 양상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황후와 이흔이 뜻을 같이하자 이들보다 무서운 조합이 없었다.

이쯤 되니까 오히려 금 귀비와 종인원장이 선량한 무리처럼 보였다. 그들은 줄곧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 즉석에서 결성된 반대파는 목적 달성을 위해 이웃나라 사례까지 끌고 왔다.

숙질은 예상치 못한 연합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당황한 게 어디 금 귀비와 종인원장뿐일까. 우희조차 현재 상황이 얼떨떨했다.

‘그건 그거고. 나도 때를 놓치지 말고 얼른 이기는 편에 올라타야겠다.’

기왕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헛소리를 지껄일 것 같으면 우희도 괜히 점잔 뺄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우희는 겹친 양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황제에게 절을 하였다.

“제가 범왕에게 복수심을 품긴 하였으나 사통의 누명을 벗는 것은 또 별개의 사항입니다. 저도 나가겠습니다. 사흘간 협조하여 증거를 잡고자 하니 폐하께선 부디 청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다음 아주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나갈 때 단검도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소중한 유품이거든요.”

양심이 조금 따끔한 것을 참고, 얼굴 한 번 못 본 시어머니까지 팔았다. 듣다 못한 황제가 한 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황후가 남편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희의 청을 거절하면 오늘 밤 비절영을 황제의 침소로 보낼 작정인 것 같았다. 우희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결국 황제는 우희를 향하려던 질문의 화살을 이흔에게 돌렸다.

“범왕, 짐이 다시 묻겠다.”

“하문하십시오.”

“정녕 단왕비에 대해 일말의 감정도 없느냐? 지금 네 한 마디에, 단왕비의 목을 걸어도 좋겠는가.”

왜 가만히 있는 남의 목을 거는데.

우희는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사실 우희였으면 순간의 속임수에 불과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입에 담진 못할 것 같았다. 시어머니의 유품 운운한 데까지가 양심의 한계였다.

그러나 범왕 진이흔은 난놈이었고, 조금 전만 해도 감옥 창살을 붙잡은 채 입술만 답삭이던 자는 흔쾌히 황제에게 절을 하였다.

“없습니다. 모든 오해는 춘약 한 방울 때문입니다.”

이흔의 대답을 끝으로 보덕재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모두가 말없이 황제의 입을 주시했다.

황후는 이흔을 죽이고 싶어 하지만, 황제는 그녀와 뜻이 다르다. 이흔은 변경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다. 황제에겐 이흔이 엇나가는 데에 따른 위험보다 그의 쓸모가 더 컸다.

그렇기에 고작 자유로운 사흘의 대가로 황후에게 칼자루를 넘겨주기가 내키지 않을 것이다. 이흔이 진짜로 증거를 확보해 올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윤허한다. 단, 증거를 찾으면 반드시 짐에게 직접 가져오라.”

혐의를 푸는 자리에 황후까지 부르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을 황후 본인이 빤히 듣는 데서 하네. 우희는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느라 애를 썼다.

‘폐하, 전 모르겠네요. 그러고도 아내의 애정을 바라면 그쪽은 참 염치를 팔아먹은 인간이네요.’

황후는 대체 저자의 무엇에 끌린 걸까. 금 귀비처럼 내궁의 주인 자리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황제의 어디가 좋아서 여태 황궁에 머물러 있을까.

우희는 황제의 입술에서 초점을 거두고 그의 전신을 서서히 훑어 내렸다.

역시, 외모인가.

“소신 진이흔,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용안을 보느라 감사 인사가 한발 늦었다. 우희는 이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뒷말을 따라했다.

“물러가라.”

우희는 금 귀비의 배신당한 표정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금 귀비는 이번 판을 꾸미며 이흔의 성질머리에 기대를 걸었다.

금 귀비의 계획에 따르면 둘 다 춘약에 취해 사고를 치는 게 가장 좋고, 한쪽만 취한대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범왕은 춘약에 취한 단왕비를 고이 놔두지 못할 것이며, 단왕비는 춘약 기운에 날뛰는 범왕을 이기지 못할 터라고 생각했다. 둘 다 안 마실 경우도 대비해 놨을 것이다.

한데 금 귀비가 놓친 점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흔이었다. 그녀가 기대를 품은 악감정과 성질머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흔은 모든 것이 오해라고 단칼에 부정하며 황제에게 끝까지 예의를 다했다.

황제에 이어 범왕까지 여자에 정신이 나가면 딴사람이 될 줄 몰랐을 터다.

우희도 딱히 그녀를 위로할 입장이 아닌지라 그저 보덕재를 총총 빠져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후궁의 궁녀가 우희에게 인사를 하였다.

* * *

황궁에선 누구도 마차를 탈 수 없기에 우희는 출입문까지 두 발로 걸어가야 했다. 비가 여전히 내리는 중이었으나 회랑과 처마 아래로만 걸으면 우산을 받치지 않고서도 이동할 수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이흔이 따라왔다. 우희가 출입문에 이르자 어디선가 나타난 내관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우희에게 다가왔다.

내관이 넓은 소매 안쪽으로 물건을 건네줬다. 우희는 보자기로 둘둘 감은 그것이 정화보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우희는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넘겨받은 다음, 단왕부까지 타고 갈 마차를 확인했다.

사람은 둘인데 준비된 마차가 하나뿐이었다.

우희는 이흔을 힐끗 돌아보고는 미련 없는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문이 휙 열리더니 이흔이 뛰어들어 왔다. 우희처럼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준 궁인이 없었는지 비에 젖어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게 내 목숨이 아니라 단검에다 내 심장의 피만 묻히는 겁니까? 그 정도라면 본왕도 할 수 있습니다.”

이흔이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그렇잖아도 넓지 않은 마차 안이 더욱 좁게 느껴졌다.

“진이겸도 그대를 대신해 형벌 받기를 자처했죠. 고통 따윈 일절 두렵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형부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범왕 전하.”

“그놈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이흔이 씹듯이 말했다.

“그게 뭐든, 해내 왔어.”

“미쳤어요?”

우희가 쏘아붙이자 이흔이 웃었다.

“내리세요. 이 마차는 내가 타고 갈 거예요. 게다가 우리가 사통죄 잡혀 들어온 지가 불과 몇 시진 전인데 마차를 같이 타고 가요?”

우희는 마차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려요.”

“그대는 정말 이상하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내가 그림에 정신이 팔렸을 땐 가만히 있다가 춘약에 미쳐 날뛰자 갑자기 무기를 꺼내 들었지. 그러더니 이제는, 내리라고?”

이흔이 두 손을 들어 올려 사방으로 휘휘 저었다.

“황후궁의 내관이 그대에게 검을 돌려줬지 않나. 사람은 둘인데 마차는 하나고, 내가 뛰어들어 왔는데도 출발을 안 해. 오히려 마부가 몸을 슬쩍 옆으로 비키더군. 이게 무슨 뜻인가, 단왕비 마마.”

어둑한 마차 안에서 이흔이 낮게 을러 댔다.

“모두가 그대의 검이 날 찌르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우희는 이흔을 노려보며 몸을 웅크렸다. 보자기로 감싼 정화보검 끝이 우희의 배를 눌렀다.

“그런데 날더러 가라고?”

“…….

“그대는 대체 내게 왜 이러나.”

“전하.”

“어찌 이래……?”

이흔의 말끝이 떨렸다. 우희는 도저히 마차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갑갑해서 창문이라도 열 려했건만 명색이 황궁 재산인 마차에 손바닥만 한 창문 하나 없다. 이제는 이게 관인지 마차인지 구분도 안 갔다. 이흔이 안 내린다면 자신이 내릴 터였다. 우희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 무슨!”

순간 이흔이 우희의 품으로 손을 집어넣어 정화보검을 잡았다. 우희는 즉시 이흔의 손목을 틀어잡고 팔뚝을 세게 내리쳤다.

상당한 충격이었을 텐데도 이흔은 정화보검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다른 손으로 보자기 끝을 잡아당긴 다음, 서슴없이 검 끝을 제 가슴에 갖다 댔다.

“이게 뭔 줄 알고 찌르려고 해요? 이게, 보통 단검인 줄 알아?”

“이보다 더한 것으로도 몸이 들쑤셔진 적 많습니다.”

“놔요, 진이흔. 놔! 힘 빼!”

팔이 벌벌 떨렸다. 그를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우희는 마차가 이렇게나 요란히 덜컹거리는데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는 현실에 화가 치밀었다.

모두가 묵인하고 있었다. 인간이고 신선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놓으라고!”

일순간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힘에 우희는 정화보검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베이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이흔이 급히 힘을 풀었다.

정화보검이 마차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단검엔 우희의 피가 묻어 있었다. 먹보다 어두운 단검은 두 사람의 보는 앞에서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우희는 이로써 세 번의 기회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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