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90화 (90/100)

90화. 두려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

‘현장 덮칠 거면 차라리 더 빨리 하든가. 이게 뭐야.’

우희는 건너편 감방에 쓰러져 있는 이흔을 힐끔 쳐다봤다. 병사들에게 잡혀서 끌려온 곳은 종인원(宗人院)이었다. 형부가 일반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면 종인원의 수감 대상은 황족이었다.

‘형부에 끈 있는 자랑 한 쌍으로 엮이니까 죄를 저질러도 형부로 가질 않네.’

이 부분은 금 귀비가 신경을 썼다. 종인원엔 지금 자리가 부족하다느니 준비가 덜 됐다느니 따위의 핑계를 대서 형부로 보내 버릴 수도 있었다. 곱게 자란 황족의 정신력을 단기간에 부수는 아주 고유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번 목표물은 이흔이다. 그를 고생시키려고 형부로 보내는 건 범을 호랑이굴로 돌려보내 주는 것과 같았다.

덕분이라고 말하면 이상한가. 우희는 그렇게 이흔과 종인원에 들어왔다. 죄수복 대신 사복을 입는 게 가능하고, 식사도 훨씬 잘 나오며, 모든 죄수가 독방을 사용한다고 한다.

죄수마다 딸린 하인도 있었다. 물론 그 하인은 제 집에서처럼 맘대로 부려먹어선 안 되는 관원이었다. 종인원 바깥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정갈한 식사에 독을 타기도 하는 자이므로 하인이 아니라 감시인이라고 여기면 된다고 배웠다.

여기까지가 우희가 종인원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우희는 복도 끝에 난 창문을 보며 시각을 가늠했다.

“밥 나올 때가 됐는데…….”

“으…….”

복도 너머 감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나오라는 밥은 안 나오고 이흔의 정신만 돌아왔다.

병사들이 보건 말건 우희를 탐하던 그는 뒷목을 가격당하고서야 혼절했다. 그를 혼절시키기까지 병사 서른 명이 나가떨어진 후였다.

“정신이 좀 들어요? 목소리 낼 수 있으면 나한테 종인원의 실세는 누군지 알려 줄래요?”

“여긴…….”

“종인원이요. 우리 둘이 사통죄로 잡혀 왔어요. 그것까지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죠?”

이흔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시라고 떠 둔 물이긴 하지만 이젠 의심조차 안 하고 마시는구나 싶었다. 아니면 확인하기도 귀찮아진 걸까. 그는 운락지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유독 검사를 했지만 결국 춘약에 당했다.

“종인원이라.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군.”

이흔이 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춘약 기운은 다 빠졌나 보다. 상태는 썩 안 좋아 보여도 눈빛이 돌아왔다.

“아무튼 우리 단왕비께서 물으셨으니 답을 해 드려야지. 종인원의 실세는 폐하십니다.”

“그래요? 듣던 중에 다행—.”

“종인원장은 금 귀비의 외숙이고.”

“…….”

“종인원부장은 단왕의 이종육촌이죠.”

누가 봐도 서로 견제하라고 앉혀 놓은 것 같다. 우희는 일단 세 명 중에 둘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 그런데 종인원부장은 지난달부턴가 집에 있을 겁니다. 아내가 조산기가 있다며 출산할 때까지 옆에 있겠다 하더군요.”

저기요. 실각한 왕이자 변경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치고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요.

우희는 새삼 인간계 황족 생활이 참으로 만만치가 않다는 감회에 젖었다.

하여튼 됐다. 머릿속에 이미 계획이 섰다. 지금쯤이면 현이 제 주인에게 우희의 행방을 알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단왕부를 나서기 전, 우희는 현에게 단단히 일렀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절대 나서지 말라고. 자신이 의식을 잃거나 누군가에게 끌려가거나 하는 정도로는 움직이지 말 것이며, 만약 그럴 경우 왕부로 돌아가 이겸에게 행방 보고만 하라고 말했다.

그럼 이겸은 입궁을 할 터다. 황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종인원에 갇힌 제수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며, 종인원장이 손을 쓰기 전에 단왕비를 빼 갈 것이다. 이것은 집안일이니 단왕비에게 직접 묻겠다는 구실을 대서 말이다.

“안 그래도 상흔이 넘쳐나는 몸에 단왕비께서 두 개를 더하셨습니다.”

이흔은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앞섶을 여몄다. 그가 쓰러져 있는 동안 의원이 다녀갔다. 우희는 자신이 낸 상처를 의원이 꼼꼼하게 봉합하는 광경을 창살 너머로 지켜봤다. 묘한 기분이었다.

“춘약은 그대의 예상 밖이었지만 단검은 미리 갖고 나온 것이었지…….”

이흔이 벽에 등을 대고 앉으며 말했다.

“검을 갖고 나온 것까지는 좋습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에요. 내 심장을 찔러야 한다면서 내가 죽으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난 당신이랑 할 말 없어요.”

“저런. 난 있는데.”

이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에 내가 독에 당한 줄로 착각했을 때, 나더러 죽으면 안 된다고 외쳤죠. 왼쪽 가슴에서 단검을 뽑고 나서도 그래요. 손바닥으로 눌러 지혈을 하려고 했잖아.”

우희는 시선을 아예 복도 끝으로 고정시켰다. 식사를 가지고 올 하인만 기다리기로 했다.

“단왕 때문입니까?”

“…….”

“내가 없어져야 그가 안전할 것 같더랍니까? 적어도 불구로라도 만들어야 할 듯싶었습니까?”

“…….”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갑니다. 나 역시 그때 형부에서 놈을 채찍으로 때려죽일걸, 두고두고 후회 중이니까.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한데 내가 궁금한 건.”

둘뿐인 옥사에 이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죽이면 죽였지 왜 여지를 두냐는 겁니다.”

표정을 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이미 혼란이 묻어났다.

“그대는 왜 나를 두려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지? 이제껏 나를 대하는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였는데 어째서. 내게서 대체, 무슨 가능성을 보고…….”

쏟아지듯 퍼붓던 이흔의 말이 잠시 끊겼다.

“나한테도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나?”

“여기 밥 언제 주는지 알아요?”

쾅!

엄청난 소리에 맞은편 감방을 홱 쳐다봤다. 저 멀리 침대에 앉아 있던 이흔이 단숨에 창살까지 달려와 우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살 너머 보이는 두 눈이 형형했다. 예사롭지 않은 안광 때문인지 순간 그가 갇힌 곳이 감방이 아니라 짐승 우리처럼 보였다.

“내 대답이 달라지면…….”

이흔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창살을 우그러뜨릴 듯이 세게 붙잡았다.

“저번에 정원에서 했던 질문 말인데. 만일, 만약에 내가…….”

“범왕 진이흔과 단왕비 심소천은 보덕재로 들라는 황명이오!”

공교롭게도 복도 끝에서 관원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우희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흔이 조금만 더 물었으면 신선의 양심이 찢어져 죽었을 것이다. 역시 결단을 내리기엔 춘약 때문에 인사불성이 된 쪽이 좋았다.

“폐하께서 부르셨대요. 이만 일어나죠.”

이흔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 * *

보덕재는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황제가 대전이 아니라 보덕재로 두 사람을 부른 것은 좋은 신호였다. 그것은 이 사안을 좀 더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황제와 황후, 금 귀비, 종인원장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금 귀비도 ‘사통’ 장소 제공자이니 귀비의 친부가 같이 있어도 썩 이상하진 않았을 터다. 하나 금 대인은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 황제의 지시 때문인지 그의 마음이 점점 황자 잃은 장녀에게서 떠나고 있기 때문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우희는 황제 부부에게 예를 올렸다.

“단왕비.”

황제가 먼저 우희를 불렀다.

“단왕의 상태는 좀 어떠한가?”

황제의 안부인사가 떨어지자마자 단왕비의 백옥 같은 뺨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심히 가련했다.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응당 제가 받아야 하는 벌을 남편이 대신 받았습니다. 가슴에 답답함이 가득하여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답답함을 풀고자 범왕의 품을 찾은 것인가.”

황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연기 중임을 아는데도 우희는 순간 아니꼬움을 참지 못할 뻔했다.

너는 죽고 못 사는 황후가 있으면서도 육궁 가득 비빈을 뒀는데 왜 나는 그러면 아니 되느냐? 이 하우희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 범왕과만 통정할까. 하룻밤에 스무 명의 양기를 뽑아 먹은 적도 있으니, 너도 네 부인들 앞에서 깔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확 받아치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애썼다. 우희는 이 모든 게 천궁으로 가는 거대한 여정임을 되뇌었다.

“폐하.”

잘 들으렴, 썩을 놈아.

“범왕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렵니까. 저 심소천은 범왕이 제게 뜻이 있음을 이용하여 그를 죽이러 나간 것이지, 진정으로 그와 사통하러 간 게 아닙니다.”

우희는 여기까지 말한 뒤에 금 귀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 부분은 귀비께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물론 금 귀비는 반응하지 않았다.

“자애로운 귀비께서 저를 염려하시어 경치 좋은 곳으로 불러 주셨지요. 하지만 저는 이것을 기회 삼아 남편의 복수를 하려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남편의 복수라니. 범왕이 단왕에게 무슨 짓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우희는 눈물 젖은 뺨을 옷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저 대신 채찍을 맞으러 간 형부에서 범왕 때문에 더 큰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이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마음 쓰지 말라고 절 위로했지만…… 매일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이겸은 어젯밤에도 침상에서 ‘몸부림’을 쳤다. 우희를 끌어안고 크게 신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범왕은 저를 희롱함으로써 우애와 신의를 지키려는 남편을 두 번 모욕하니, 심소천은 도저히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나이다.”

“폐하, 신첩이 한 마디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슬슬 빈정대며 분위기를 깨야 할 이흔이 침묵을 지키자, 보다 못한 금 귀비가 직접 나섰다. 황제는 우희를 향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시선을 총비(寵妃)에게 보냈다. 너그러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제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그 너그러움 뒤에 두터운 기만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건만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왕비의 말대로라면, 단왕비는 짧은 기간 동안 세 명의 황실 일원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신첩과 범왕은 살아남았으나 신첩의 황자는 유명을 달리하였지요.”

금 귀비의 가녀린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우희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눈물이 너무 섣불렀음을 깨달았다. 저렇게 감정을 차츰 고조했어야 했다. 역시 현장에서 다년간 구른 전문가는 달랐다. 많이 배우고 간다.

“신첩은 범왕의 형부 개입이나 두 사람의 사통에 관해서는 모르나, 단왕비가 대단히 위험한 사람임은 분명히 알겠사옵니다.”

금 귀비는 불안함을 가까스로 견디는 표정을 지었다.

“하오니 이번에야말로 단왕비가 죗값을 치르게 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원통하게 세상을 뜬 저희 황자를 봐서라도요……. 종인원장의 말에 따르면 황가의 사통죄는 장형 스무 대에 지위 박탈까지 가는 무거운 죄라고 합니다.”

종인원장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금 귀비의 말을 이어받기 위함이었다. 황후가 지위를 앞세워 먼저 입을 열려고 하는 가운데, 이제까지 인사 이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이흔이 목소리를 냈다.

“단왕비는 무고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소신도 잘못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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