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춘약에 당하다
“전하?”
우희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이흔을 올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괴로운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탁자를 짚었다는 것은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는 뜻이었다.
우희는 본능적으로 이흔이 쥔 술잔을 쳐다봤다. 이흔의 눈길도 같은 곳을 향했다.
“분명…… 검사를 했는데.”
이흔이 이를 악물더니 돌연 입고 있는 옷의 매듭을 풀었다. 급한 손놀림에 매듭이 잘 풀리지 않자 앞섶을 쥐어뜯듯이 벌렸다.
“으으, 윽……!”
“진이흔!”
우희는 미친 사람처럼 옷을 풀어헤치는 이흔을 말렸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온몸이 떨렸다.
어떡하면 좋을까. 이흔이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만약 이흔이 ‘그 인물’이었다면 모든 대비책이 무용지물이 된다. 당장 내일부터 마군이 재림한 혼세(混世)가 시작될 테니 말이다.
우희가 울 듯한 얼굴로 이흔을 살폈다. 두 번에 걸친 유독검사를 통과하는 독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슨 독을 당했는지 알아야 해독도 가능하다.
‘설마 황후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게 지금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우희는 예전에 이겸이 전해 준 독약을 떠올렸다. 비절영의 수장인 황후가 선물로 보낸 극독. 한 방울이면 끔찍한 고통을, 두 방울이면 누구든 즉사한다고 했다.
우희에게 나눠 줬다는 말은 아직 여분이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어떡해. 죽으면 안 돼. 당신이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우희가 울먹이며 이흔을 부축했다. 주변을 애타게 돌아봐도 도움 청할 이 한 명 없었다. 무정하게 내리는 가을비뿐이다.
우희는 자꾸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는 이흔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웠다.
“이흔, 열이 왜 이렇게 나요?”
뭔가 말을 하려는지 그가 입술을 답삭거렸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뜨거운 숨만 내쉬었다. 우희는 이흔의 이마와 뺨에 손바닥을 대어 보다가 목덜미를 만졌다.
“흐흣……!”
우희의 손길에 그가 몸서리를 쳤다. 듣는 사람 겁먹기 딱 좋을 만큼 앓는 소리를 흘렸다.
“난…… 죽는 게, 아니라.”
호흡을 고르느라 말이 계속 끊겼다.
“약에 당한……. 하아, 으…….”
“네, 누가 봐도 독약에 당한 것처럼 보여요.”
“독, 아니고.”
우희와 가까스로 눈높이를 맞춘 이흔이 뱉듯이 말했다.
“내 몸에서 손 떼.”
우희는 잠시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응?’ 하고 되물었다.
“안 죽으니까, 그림 챙겨서 가라고.”
“……가라고요?”
“가.”
이흔이 우희의 어깨를 밀어내려다가 말았다. 어쩐지 우희와 닿는 것 자체를 피하려는 듯 보였다.
“하아, 하, 윽……. 춘약은, 교접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고……. 읏, 그냥 시간이 지나야 되니까.”
“춘약?”
춘약이 무엇인가. 색욕을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충동질하는 약이었다. 비로소 이흔의 현재 상태가 이해됐다.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아랫도리는 터질 듯이 부풀었을 것이다. 극도로 민감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피부를 살짝만 건드려도 신음하는 게 당연했다. 눈앞에 사람이 없으면 기둥을 끌어안고서라도 욕정을 풀고 싶을 터다.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자 우희의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이성이 돌아오자 현재 상황이 냉정하게 파악되었다.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색정에 헐떡이는 진이흔은 외로움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진이흔보다 찌르기가 훨씬 쉬웠다. 우희의 양심이 느끼기에 그랬다.
우희는 의자를 돌려서 이흔을 앉혔다. 몸이 큰 게 이래서 좋구나. 등판이 워낙 널찍하다 보니까 우희가 이흔의 품에서 뭘 하든지 연못 쪽에선 알 도리가 없었다. 단검으로 찌르는 것은 물론이고 솥에 국수를 삶아먹어도 모를 것이다.
‘미안, 진이흔. 내가 범왕부에 자주 들를게. 싹싹한 하인도 보내서 빈껍데기 수발 잘 들게 할게.’
우희는 드디어 정화보검을 꺼내 들었다. 이흔의 심장을 향해 힘차게 내뻗었다.
“무슨 짓이지?”
약기운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이흔이 우희의 공격을 단번에 막았다. 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정화보검과 우희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미안해요, 이흔. 보통 이럴 땐 다음 생에 갚겠다고 약속하던데 당신에겐 다음 생이 없어요.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미안. 정말 미안.”
이흔의 손아귀에 오른손목이 꽉 잡힌 상황이었다. 우희는 사과를 마친 즉시 손가락을 펼쳐 정화보검을 떨어뜨렸다. 자유로운 왼손이 허공에서 보검을 낚아채 그대로 이흔의 가슴을 찔렀다.
“망할.”
우희가 욕을 뱉었다.
“진이흔, 왜 이렇게 빨라요? 춘약에 당한 거 맞아요?”
우희에게 팔이 두 개가 있듯이 이흔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머지 손으로 우희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힘은 또 왜 이렇게 세?”
“약, 을 탄 게…… 그쪽, 인가?”
이흔이 쥐어짜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이 연속 공격은 어떻게 막았느냔 말이다. 우희는 재빨리 다음 상황을 예측했다. 판단이 섰다.
“흐, 으읏…….”
힘으로 승부하기로 결정했다. 이흔이 힘장사긴 하다. 그러나 우희 또한 그간 양질의 양기로 내공을 쌓은 터라 이흔과 맞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이흔에겐 새로운 약점이 있다. 춘약이다. 몸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상태이므로, 우희와 조금이라도 살이 맞닿는다면 금방 이성을 잃을 것이다.
‘좋아. 이대로 밀고 간다.’
우희는 전신의 힘을 끌어다 이흔을 밀어붙이는 데에 집중했다. 정화보검과 이흔의 가슴 사이 거리가 세 치에서 두 치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 치 반쯤 되었을 때 이흔이 반격해서 다시 두 치 거리로 물러났다.
팽팽한 접전이었다.
“후우, 후우, 후우우!”
“뭐 하는……?”
“후우우욱!”
우희는 풀어헤친 옷 사이로 보이는 이흔의 가슴팍에 대고 입으로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입술이나 혀가 닿으면 직방일 텐데 안타깝게도 아직 그만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만……. 읏, 도대체가…….”
“느껴져요? 좀 약해요? 그럼 귀에다가……. 후우우우!”
우희가 고개를 틀어 이흔의 귀에 대고 바람을 불었다. 보검과 가슴 사이의 거리가 한 치보다 가까워졌다.
‘이제 거의, 조금만 더!’
우희는 뱃심으로 밀어올린 마지막 호흡을 이흔의 귓속에 꽂았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사내를 흥분시키는 중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귀에 벌레가 들어갔나 했을 것이다.
실로 색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도 남음이었다. 하나 우희는 이뤄야 할 대의가 있었다.
‘드디어!’
우희는 정화보검이 서서히 이흔의 옷을 뚫고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한 번 속으로 사과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근데 왜 아직 멀쩡해 보이지.”
꽤 깊숙이 박았는데도 이흔에게 아무 변화가 없었다. 우희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장의 피가 묻고도 남을 깊인데.”
“꼭 심장을, 찔러야 하나? 죽이려면 목을 노려도 되잖아…….”
혼이 소멸되지도 않고 춘약 기운도 가시지 않은 이흔이 우희에게 말했다.
“목이 확실, 한데.”
“아니, 꼭 심장이어야 돼요. 그런 게 있어요.”
이흔의 입가가 떨렸다. 웃으려고 하는데 그조차 잘 안 되는 듯 보였다.
“그렇다면 실망스럽겠군, 단왕비. 난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오른쪽에 있거든.”
우희가 눈을 치켜떴다. 이흔과 눈이 마주쳤다. 입은 웃지 못해도 눈이 웃고 있었다. 진짜 어딘가 단단히 망가진 인간이었다. 검에 찔렸는데도 웃고 있다니.
“그런 중요한 사실은 미리 알려 줘야지…….”
우희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된 게 당신은 심장도 반대로 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됐다. 그중에서도 우희를 분노케 만든 것은 역시 온 힘을 다한 방금 공격이 헛수고였다는 점이었다. 방향조차 맞지 않았으니 아예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기회가 세 번밖에 없는데 벌써 한 번을 썼잖아!’
우희는 분연히 정화보검을 뽑았다. 피가 튀었다. 이 와중에 과다출혈로 죽일 순 없어서 제 손바닥으로 지혈을 해야 했다. 두 배로 열 받는 상황이었다.
“난 가라고 했어.”
이흔이 우희의 손목을 젖혔다.
“당신은 그런 날 죽이려고 했고.”
이흔의 눈에서 점점 초점이 풀렸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던 의지가 장대비에 쓸려 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검은 눈에 차오르는 색정이 뚜렷해졌다.
“상대가 날…… 봐주지 않는데 내가 상대를, 봐줄 이유는 없지. 안 그래?”
이흔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우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기 옷을 풀어헤칠 때보다 거친 손길로 우희의 옷을 끌어내렸다. 설백색 선녀 옷이 끌러진 자리에 고운 어깨가 드러났다. 이흔은 주저 않고 입술을 내렸다.
“이 미친 인간이.”
이제 우희도 입단속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욕은 벌써 아까 전에 했구나.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자신을 안으려 드는 이흔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무엇보다 이대로는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진짜!”
“하, 아아…….”
“움직이지 말고!”
“좋아…….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어떻게……. 읏……!”
“괜찮아요. 안 아플 거예요. 한 번만 좀……. 아, 한 번만 찌르자고!”
우희는 속으로 욕을 수천 번 되뇌었다. 앉아 있을 때 해치웠어야 했다. 이흔이 우희의 키에 맞추려고 자꾸 몸을 숙이니까, 우희도 덩달아 몸을 낮추게 됐다.
이게 다 반드시 심장의 피를 묻혀야 하는 규율 때문이다.
‘어차피 혼을 소멸시키는 목적이잖아. 왜 심장이어야만 하는 거지? 이흔만 봐도 그래. 본인이 말 안 했으면 이 남자 심장이 오른쪽에 있는 줄도 모르고 영원히 갸우뚱할 뻔했잖아!’
계속해서 몸을 숙이다 보니 어느새 둘 다 바닥에 무릎을 꿇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다.
“아우, 요걸 확!”
이번엔 오른쪽 가슴을 겨누고 찔렀으나, 발정 난 인간 때문에 보검의 끝이 쇄골 아래에 박혔다.
총 세 번의 기회 중에 이제 단 한 번만이 남았다. 이번마저 실패하면 끝이다. 이흔은 가슴팍이 온통 피로 물들건 말건 우희를 탐하느라 바빴다. 우희의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할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해진 우희의 귀에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듣기에도 서넛이 아니라 수십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발맞춰 빠르게 뛰는 소리. 이와 비슷한 소리를 우희는 단왕부 훈련장에서 들었다.
“범왕 진이흔과 단왕비 심소천를 사통죄로 체포한다!”
갑자기 맥이 풀렸다. 너희 눈엔 우리가 사통하는 것처럼 보이냐고 되묻기엔 때마침 이흔이 우희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병사 수십이 둥글게 둘러싸고 지켜보는 가운데 이흔이 우희에게 입을 맞췄다. 우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헐떡이는 숨결이 뺨에 닿았다.
“전하, 사람 왔어요. 그만해요.”
우희가 이흔을 툭툭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