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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86화 (86/100)

86화. 마음 붙일 곳

이만 돌아가라고 하는 집주인의 말에 우희는 정원을 터덜터덜 빠져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흔과 고작 몇 번 만났다고 회유를 단념하는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의 기분은 1만 년 산 신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축 가라앉는 와중에 계속 의심이 들었다. 끊임없이.

실은 해결책이 있는데 내가 못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이흔을 바꿀 수 있을까. 천만다행히 이흔의 혼을 소멸시키지 않고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한다고 쳐도 그동안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어쩌지.

근심이 깊어지다 보니 걸음이 멈췄다. 우희는 관리인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여러 해 방치된 연못을 쳐다보았다.

규모로 따지면 단왕부의 연못에 뒤지지 않았지만 뱃놀이할 마음이 절로 드는 단왕부 연못과 달리 이곳은 왠지 음산해 보였다.

사람이 돌보지 않는 동안 연(蓮)이 연못을 집어삼켰다. 꽃 피는 시기가 지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올해는 아예 꽃을 못 피웠는지 몰라도 진녹색 연잎만 빽빽했다. 거의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희는 대낮인데도 연잎을 헤치고 무언가가 스르르 기어 나올 것 같은 거대한 연못을 말없이 보았다.

‘왕의 신분인 이겸도 채찍형 같은 일을 당했잖아. 그나마 이겸은 나를 통해 선계의 약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희의 표정이 흐려졌다.

‘전쟁만은 막아야 돼.’

예전에는 전쟁이 지금처럼 심각하게 와닿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무고하게 스러지는 목숨들이 안타까워도 때마침 연이 닿은 개개인을 구해 줬을 뿐이다. 인간사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규칙 때문이기도 하지만, 선계의 전혀 다른 시간관념 탓도 있었다.

뭐 좀 하다 보면 백 년이 훌쩍 지나는 곳이 선계였다. 다른 신선들을 만나거나 수련을 하고 오면 3, 4백 년은 쉽게 지나갔다.

제아무리 대를 이어 가며 벌어지는 전쟁도 그쯤이면 종식되고도 남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선에게 인간계는 쉼 없이 나라 이름이 바뀌는 곳 정도로 인식되었다.

「인간들은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안 그래도 짧은 생을 왜 저리 번거로운 일에 매달리며 산데?」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한 신선도 있었다. 당시에 우희는 어떻게 반응했던가. 상대와 교류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이는 다른 신선에게서도 종종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쓴웃음을 지으며 ‘휘말린 사람들만 괴로운 거죠.’라고 했다.

딱 그 정도였다.

“전혀 짧지 않아…….”

우희가 탄식했다.

“살아 보니 1년이 이토록 긴데 전쟁이 나면 수년을 불안에 떨며 지내야 하는 거잖아. 게다가 최소 몇 년이야.”

그 와중에도 회임하는 여인이 있을 것이다. 병사들이 쳐들어올 걸 아는데도 피난 못 가는 사람도 많을 터다. 사람 먹을 식량마저 부족한 상황에 집집마다 귀여워하던 개나 고양이는 어찌 부양할 것이며, 그나마 이웃의 도움에 기대어 지내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될까.

범왕부로 오는 동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그야말로 쾌청한 가을날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가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사람을 느긋하게 만들었다. 걷다가 서로 부딪쳐도 ‘어이쿠, 미안하오.’ 사과를 나누고 다시 갈 길을 갈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에게나 추한 면은 있지만 다들 적당히 선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전쟁이 나쁜 이유는 당장 여러 개를 꼽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삶의 터전을 뒤흔드는 점이 가장 나빴다.

아주 오래전, 사부 옥진이 막내 제자에게 말했다. 터전이 뒤흔들리면 인간은 각박해진다고. 안 그랬던 사람도 눈을 부릅뜨며 대문을 걸어 잠그기 마련이라고. 문밖에서 애절하게 도와 달라는 목소리에도 외면을 하게 된다고.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마음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중요하겠지. 중요한데.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하나…….」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죽는 이는 약자들이다. 가장 먼저 죽고 많이 죽는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순식간에 짐 덩어리가 된다.

짐이 덜어지길 은연중에 바라는 눈빛과 내려가지 않아도 될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사람들.

“절대 안 돼.”

우희는 연못에서 눈길을 거뒀다. 걸음을 재촉했다. 버려진 정원과 연못과 이흔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전쟁까지 가서는 안 되는데 이흔을 개심시킬 수 없다면 방법은 정화보검뿐이다.

‘이런 건 배운 적이 없어.’

우희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이 죽어야 하는 건 뭔가 꺼림칙하지. 하지만 한 명의 희생으로 가문 전체를 구할 수 있으면 그건 가치 있다고 해. 가문만 구해도 그 정도인데 나라를 통째로 지킬 수 있다면…….’

우희는 이제 거의 달리듯이 걸었다.

‘그럼 그 한 명은 꼭 죽어야 하나?’

밧줄을 늘어뜨려 둔 담장으로 돌아왔다. 끝에 달린 갈고리를 담장 기와에 걸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우희는 들어올 때와 달리 도망치듯 범왕부를 빠져나갔다.

도구를 챙긴 후에 긴 담장을 따라 걸었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이번 생은 악독한 인물이어도 다음 생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 볼 수 있는 게 인간인데. 그게 인간에게 약속된 기회인데.”

비틀리고 비틀려서 고립을 자처하는 이흔. 그를 보검으로 찌르면 세상은 조금 더 안전해질지 모르나 이흔에게 다음 생은 없어진다.

“당신은 똑같은 조건이었어도 이겸을 짓밟을 거라고 했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에게 다른 길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담장이 끝났다. 우희는 꾸벅꾸벅 조는 문지기가 있는 대문을 지나 아름드리나무로 걸어갔다. 나무 뒤로 돌아가자 현이 똑바로 선 채 우희를 맞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우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현과 하늘을 황망히 번갈아 보았다.

“벌써 일어날 수가 없는데?”

현이 우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앞서 가시라는 손짓을 했다. 우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어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배는 어찌했느냐?”

“맛있었습니다.”

“…….”

우희가 도무지 걸음을 뗄 기색을 안 보이자 현이 발치에 떨어진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우희는 흙바닥을 내려다봤다. 심지만 남은 배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참 알뜰하게도 먹었다.

“날 속였구나.”

우희가 기막힌 시선으로 현을 훑었다.

“베어 무는 소리가 전혀 안 들렸건만.”

“소리가 안 나게 먹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나 아삭거리는 배를 어떻게 소리를 안 내고 먹느냐?”

자연스럽게 다그치는 모양새가 됐다.

“그리고 왜 배를 조용히 먹을 줄 아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쓸데없는 기술이란 말인가.

“아무튼 배를 먹었다면 내 뒤를 밟았겠구나.”

아무리 봐도 왕비가 자기를 떼어 놓고 갈 기세니까 통하지 않을 입장을 고수하느니 계책에 넘어간 척한 것이다. 이쯤이면 상당히 유연하지 않은가. 장군 위세준보다 나았다.

감정을 억제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머리까지 굳는 건 아닌 모양이다. 우희는 새삼 현을 다시 봤다.

“범왕은 네 기척을 알아챘을 텐데.”

“범왕과 정식으로 대결하면 아마 후반부엔 제가 밀릴 겁니다. 그렇지만 잠복은 다릅니다.”

현이 차분하게 잘라 말했다.

“범왕은 제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이건 확신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듯한 어조다. 우희는 파란 가을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단왕부 방향이었다.

“이겸은 또 속상하겠네…….”

뒤에 따라오던 현이 우희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너는 그저 보고 들은 대로 보고하겠지만 이겸은 행간을 읽겠지. 어떻게든 범왕에게서 가능성을 찾고 싶어 하는 내 모습에 불안하고 화가 나겠지.”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희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현이 땅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 아이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이 좀 읽힌다.

“행간이 아니었습니다.”

“응?”

“행간은 없었습니다. 마마께선 대놓고 전하를 욕하셨잖습니까.”

우희가 입술을 오므렸다. 보고 내용을 가지고 이건 빼 달라, 저건 순화해 달라 요구할 수 없을 터다. 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다.

“오늘따라 우리 곽 호위가 달변이구나.”

그저 비스듬히 흘겨보는 수밖에.

“입 다물고 보낸 시간이 아까워. 아주 청산유수야. 그리고 욕이 아니라 사실이니라. 본인도 알걸?”

지금 한 말까지 모두 보고에 넣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희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방향을 바꿔 볼을 꼬집었다. 현은 본능적으로 손을 피했지만 이번에는 우희가 더 빨랐다.

“의외로 피부가…… 부드럽구나.”

우희는 현의 볼을 잡고 있는 두 손가락을 비볐다.

“감촉이 좋은데? 서늘하고 보송보송해.”

우희는 뜻밖의 발견에 쉽사리 손을 떼지 못했다. 한편 현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겠어서 그냥 볼을 내주고 있었다.

일단 곽현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정하게 쳐 내기엔 위험한 행동도 아닌 데다 우희가 너무 좋아하는 게 또렷이 보였다.

왕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게 그렇게나 좋은가?

“마음이 좀 풀렸다.”

우희가 손을 떼며 말했다.

“내 눈에 두려움이 비치지 않는다고 하였지? 하지만 나 역시 네 사부가 말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단다. 도리어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야.”

현이 사부 이야기를 하니 우희도 자신의 사부가 생각났다. 옥진은 제자가 지략을 쓰든 도술을 쓰든 마지막 한 명까지 포기하지 않게끔 훈련시켰다. 평생 그렇게 배워 왔는데 이제는 상제가 우희에게 정화보검을 내밀며 속삭인다.

정녕 방법을 못 찾겠으면 검으로 상대를 찌르라고.

무엇보다 세상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 세상 속에 이흔의 자리는 없어.’

모두가 이흔을 두려워하고 피한다. 이흔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희가 보이는 남들과는 다른 반응에 언뜻 동요했다.

하우희가 낙천적인 성격이긴 하나 그게 순진함과 같은 뜻은 아니다. 우희는 애정과 관심을 꾸준히 쏟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을 맹신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흔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자란 성인이었다. 훨씬 힘들 터다.

‘기다렸다는 말에 그렇게 와르르 무너지는 표정을 짓다니.’

우희에겐 돌아갈 집이 있다. 이젠 단왕부가 우희의 집이다. 울보 상아와 야무진 매화가 우희의 곁에서 항상 재잘대는 곳. 더 이상 장경루 아래 연못을 보며 극락정을 그리워하지 않게 됐다.

우희에게 집이란 마음 붙일 곳이었다. 만리타향에서 고생 중이라도 내겐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은 마음의 심지를 단단히 붙들어 준다.

그런 점에서 이흔에겐 거대한 저택이 있지만 집은 없다. 아무도 자신의 안녕을 빌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이겸을 해치는 데에만 집중하며 황량해지고 있었다.

“현아.”

우희가 호위무사를 나직이 불렀다.

“너는 단왕부가 네 집이라고 생각하느냐?”

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고민이 없었다는 자체가 때로는 또 하나의 답이 된다.

“가자꾸나.”

우희는 현을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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