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85화 (85/100)

85화. 이름을 부르면

“안 무서워요.”

대답하는 말투가 산뜻했다.

“그래서 이겸이 절 걱정하는 거고요. 독사에게 물릴 위기에 처하고서야 두려워하면 늦다고. 독사는 그 자체로 경계해야 한다고요.”

“독사라…….”

이흔이 픽 웃었다.

“단왕이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평소에 날 쳐다보는 눈빛은 독사라기보다 지긋지긋한 거머리를 보는 듯하여.”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사 정도면 괜찮지.”

선선히 수긍하고는 뒷말을 붙였다.

“그러는 자기는 용의 아들이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게 단왕의 재수 없는 점이죠.”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요.”

우희는 저도 모르게 동의했다. 이흔의 잔인무도한 성품과는 별개로 맞는 말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게 우희의 성격이었다.

“본인이 잘난 건 알겠는데 잘난 게 항상 옳은 건 아니잖아요. 근데 이겸은 둘을 자주 헷갈려 하는 듯해요. 만날 자기만 옳은 줄 알아.”

말을 하다 보니 슬슬 열이 오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하우희가 어딜 가서 진이겸 욕을 하겠는가. 선계는 정화보검 한 자루 달랑 넘겨주고는 쏠쏠하게 쓰던 여덟째 제자마저 거둬 갔다. 인간계에서 진이겸은 완전무결한 존재로 추앙받기 때문에 욕하는 사람이 되레 이상하게 보였다.

황후? 아, 그분이 있네. 근데 황후도 기본적으로는 이겸 형제를 사랑하는지라 지나치게 신랄한 욕을 늘어놓아선 안 될 느낌이다.

누가 아나. 우희가 홧김에 뱉은 ‘호수에 확 밀어 버리려고요.’ 따위를 진짜 위협으로 받아들여서 왕비궁으로 비절영을 보낼지?

그러니까 남는 사람이 진이흔밖에 없다는 거다. 우희가 하는 욕을 진심으로, 뼛속까지 이해하고 동조해 줄 사람이 눈앞의 남자뿐이란 사실이 좀 우스웠다.

“나랑 이야기가 다 된 줄 알았는데 혼자 일을 진행시키고 오는 거 최악이에요. 이야기를 하기 전이면 더더욱 그래. 맞아요, 이번 형부 압송 건도!”

우희가 이흔을 똑바로 쳐다보며 삿대질했다.

“조정이 어떠하니 세력이 어떠하니. 아주 자기만 중요한 일하는 줄 알지, 어? 그러면서 아내의 벌을 대신 받는 갸륵한 모습까지 챙겼잖아요.”

우희는 이흔을 찌르던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무언가를 으스러뜨리듯이 힘을 불끈 넣으며 심호흡을 했다.

“얄미워요. 속이 터지고요. 가끔은 먼지 나게 패 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사과는 잘한다. 납작 엎드려야 할 때 엎드릴 줄도 안다. 저질러 놓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 놈들보다야 낫긴 하다.

한데 이겸의 문제는 그거다. 우희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뉘우치지는 않는 거. 왜냐면 자신의 결정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발 물러나, 옳지는 않아도 상황상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걸 고칠 수 있을까? 우희는 회의적이었다. 한편으로 옥황상제가 왜 최측근의 후임을 뽑는 과정에서 인내심을 중시했는지 깨달았다.

어쨌든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다고 믿는 자와 온 힘을 다해 정도(正道)를 벗어나려고 발악하는 자를 한꺼번에 다뤄야 한다.

이건 정말, 정말, 정말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때리긴 내가 많이 때렸는데…….”

“네, 봤어요. 기회다 싶었는지 채찍으로 사람을 넝마처럼 찢어 놨더군요.”

우희가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내가 방금 이겸을 때리고 싶다고는 말했지만 전하처럼 그를 죽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요.”

이흔은 두려운 기색 없이 신나게 말하는 우희를 한참 쳐다보았다. 잡초 무성한 바닥에 도끼를 내리꽂은 그는 아직 쪼개지 않은 통나무를 깔고 앉았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갑시다. 난 단왕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요. 단왕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길 바라는 거지.”

진짜 꼬여도 저렇게 꼬일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단왕을 이름으로 부르는군요.”

봉무국에서는 보통 대단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부부지간이어도 부인, 상공, 전하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타인 앞에서는 더 예의를 차렸다.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 자기 남편을 이름으로 부른다면 그건 암묵적 합의가 이뤄진 후였다. 부부가 서로 죽고는 못 사는 애틋한 사이고, 상대도 이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했다.

“네, 좋은 이름이잖아요.”

우희가 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 줬을 때 반응이 좋더라고요.”

“당연하죠.”

이흔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복동생에 비해 단단함이 느껴지는 턱 선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건 꽤 은밀한 행동이니까.”

“희한하지……. 부르라고 지은 게 이름인데 그걸 아껴 뭐 해. 은밀할 건 또 뭐가 있어.”

우희가 혼잣말을 하자 이흔이 낮게 웃었다.

“단왕비가 그리 생각한다면 어디 내 이름도 한번 불러 보겠습니까?”

그가 우희를 빤히 응시했다. 입가엔 여전히 웃음을 띤 채로.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린 지가 너무 까마득해서 그래요.”

우희는 이흔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 냈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 말이 뭐라고 듣는 사람을 이리도 쓸쓸한 기분으로 만드나. 그냥 숙적의 아내를 흔들려고 던진 말일 수도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의도인데.

이 말만은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흔의 목소리에서 순간 짙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형부에 추종 세력이 많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그들이 범왕부까지 찾아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황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니 그러는 것도 이해는 갔다.

버려진 저택. 잡초가 아무렇게나 우거진 정원. 이것들은 모두 이흔을 닮았다. 비틀린 사람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안 타는 건 아니니까.

“이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흔은 본인이 시켜 놓고는 영 이상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 더.”

“이흔.”

“……다시.”

우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 불러 주는 걸로 개심시킬 수 있다면 만 번이라도 부를 것이다. 마군 재림을 막는 일이 그리 쉽게 흘러갈 리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우희가 바로 응하지 않자 이흔이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요. ‘왔어요?’를 붙여서.”

어조는 누그러졌는데 추가 요구가 있어? 이다음엔 연극 한 대목을 같이 하자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하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고작 이름 불러 달라는 청을 거절할 것까진 없겠다 싶었다. 하우희는 그렇게 야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희는 이흔이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이흔,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덧붙였는데 이흔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는 게 심상찮았다.

‘내가 뭘…… 잘못 건드렸나?’

우희는 그사이 인간계의 상식이 바뀌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반갑게 맞이하는 인사는 다들 거기서 거기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 짧은 문장에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 보였다.

“혹시…… 이 말도 너무 오랜만인 거예요?”

다음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이흔이 우희의 눈을 피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범왕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크게 잘못했나 봐.’

우희는 즉각 반성했다.

‘설마 난생처음 듣는 말은 아니겠지? 그래서 아기 새가 눈을 뜨자마자 본 상대를 어미로 각인하듯이, 막 그렇게 인식된 건 아니겠지?’

이걸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우희는 다소 난감해졌다. 이흔이 자신에게 진지하게 끌리게 되면 어쨌든 우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할 터다. 지금보다야 우희의 말에 귀 기울일 것이다.

‘말을 잘 듣게 되는 건 좋아. 하지만 이 남자도 어째 독점욕과 집착이 어마어마할 듯하단 말이지.’

의욕이 앞선 나머지 섣부르게 유혹했다가 까딱하면 전생처럼 피바람이 불어닥칠 수도 있었다.

“범왕을 기다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치레로라도 날 기다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흔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내 앞에선 말을 아껴요.”

“본인이 이미 이유를 알고 있네요.”

“……가끔 가다가 궁금하더군요. 누군가 날 기다리고 반겨 주는 기분이란 어떤 것인지.”

이흔은 계속 시선을 비낀 채 무언가를 곱씹는 듯 보였다.

“이제 좀 알겠어요?”

우희의 질문에 그가 딴소리를 했다.

“분명히 처음 들은 말인데 왜 이전에도 들은 것 같지……?”

어, 위험한데.

우희는 본능적으로 등을 폈다. 이겸이 우희와 헤어지는 꿈을 꾸고, 우희 자신이 방으로 들어오는 이겸의 모습에서 전생의 그를 본 게 떠올랐다. 이흔도 방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게 아닐까.

하늘을 향해 고함치고 싶었다. 전 충분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자꾸 이상한 순간이 끼어들게 하지 마세요, 협조는 못할망정 초를 치냐고요, 하고 말이다.

“기분 탓이겠죠. 원래 낯설고 어색하면 간혹 그런 착각이 들기도 한대요.”

과하게 얼버무리려는 티가 났다. 그러나 이흔은 자기만의 의혹에 사로잡혀 우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입 밖에 낸 순간 취소하고 싶었으니까.

“에이, 그만 생각해요.”

이흔의 주의를 현실로 돌려놔야 했다. 우희는 팔을 일부러 과장되게 휘저었다. 어쩌다 보니 이겸에겐 선계를 알려 주게 됐다. 한데 그건 상대가 이겸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과연 이흔도 제 이복동생처럼 1만 년이나 뒤엉킨 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일까?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알게 되면 이를 나쁘게 이용하지는 않을까?

우희는 이흔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이흔을 다룰 자신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저기,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겸과 대적할 거예요? 삶의 목적이 진이겸을 괴롭히는 것뿐이라면 그건 좀 아깝잖아요.”

“아깝다니요?”

이흔은 여전히 절반쯤 꿈속을 헤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전하의 실력과 세월이요.”

이흔의 시선이 더듬더듬 우희에게 돌아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도 없이 해괴한 것을 보는 눈길이었다.

“혹시 내 말이 너무 어렵나요?”

“어렵다기보다…….”

우희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해가 잘—.”

“그게 어려운 거지. 뭐가 안 어렵대?”

기대한 답이 아니라 왈칵 성질이 났다. 사람 열불 터지게 만드는 게 진씨 형제의 특징인가 싶었다. 얼굴에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우희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면사를 끌렀다.

“그럼 바꿔 물을게요. 만약 정당하게 이겸을 이길 기회가 있다면 어쩔 건가요?”

그는 늘 이겸을 싫어해 왔다. 모든 것을 가진 이겸에 비해 혹독하고, 때로는 치욕스러운 대가를 치러야만 비로소 비슷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스스로의 처지에 분노했다.

우희가 궁금한 것은 이 점이었다. 만일 두 사람의 출발선이 완전히 같았다고 해도 지금처럼 이겸을 증오할 건지.

“단왕비는 도무지 진의를 알 수 없는 질문만 하는군요.”

이흔의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고 여긴 순간,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한 자는 우희를 선 밖으로 밀어냈다. 단왕비 당신이 뭔데 내 실력을 아까워하느냐고 물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답은 있었다.

하지만 이흔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드러낸 점을 후회 중이었다.

“사실 출발선 따위는 상관없을지도 모릅니다. 본왕은 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끔찍하게 싫었고, 알면 알수록 증오심이 깊어졌거든요.”

만약 완벽하게 같은 조건이었다면 놈을 더 확실히 짓밟았을 거란 대답에 우희는 한숨을 삼켰다. 해묵다 못해 썩은 악연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남은 길은, 단념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