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당신 정말 싫어요
우희는 말없이 대사형이 보내 준 상자를 꺼냈다. 유려한 필체로 쓰인 설명서도 꺼내서 옆에 나란히 펼쳤다.
붉은 마개 호리병에 든 물약으로 상처를 씻은 다음, 닦아 낼 필요 없이 노란 통에 든 백분을 뿌리라는 설명은 사실 약이 도착하자마자 읽었다.
그저 만전을 기하고 싶은 것이다. 순서가 틀리지 않게끔 눈으로 확인을 거듭했다. 여러 감정이 속에서 들끓지만 일단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우희는 호리병을 들어 마개를 뽑았다. 양이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이겸의 몸이 워낙에 만신창이라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병이었으면 왼팔도 미처 씻지 못하고 바닥날 뻔했다.
“팔 들어요.”
우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겸은 순순히 말에 따랐다. 지금 자신에게 뿌릴 물건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이게 독이면 어쩌려고?’
화가 나니까 비뚠 생각을 다하게 된다. 그렇다고 굳이 입 밖에 낼 것까진 없었다. 돌아올 답이 어떨지 안 들어도 짐작이 갔다.
독이라 한들 받아야지요. 그대가 주는 것인데.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할 테지.’
우희는 이겸의 어깨부터 물약을 붓기 시작했다. 피와 진물이 엉킨 상처에 싸한 냄새가 나는 약을 붓자 이겸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좀 차갑죠. 그래도 아프진 않잖아요.”
약을 받자마자 우희는 제 몸에다 시험해 봤다. 손바닥에 상처를 낸 뒤 물약을 부었더니 얼음물이 스미는 듯 시렸다. 쓰라림과는 달랐다. 동봉된 설명서엔 통증 없이 상처를 소독해 준다고 되어 있었다.
맹물을 부어도 참기 힘든 과정이건만 그냥 차가움만 느끼고 넘어갈 수 있다니 과연 선계의 영약다웠다. 몸에 닿을 땐 물약이지만 침상에 떨어지면 이불을 적시지 않고 사라지는 점 또한 신비로웠다.
이겸은 벌어진 상처 사이로 물약이 스며드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우희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다 됐어요. 다음.”
우희가 빈 호리병을 내려놓고 노란 통을 집었다.
“잠깐. 그 전에 이것부터 먹어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환약 한 알을 이겸의 입에 갖다 댔다. 역시나 이게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받아먹는 모습에 우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씹어서 삼키면 돼요. 진통제니까. 대사형이 어째 고분고분하게 약을 보낸다 싶더니 진통제를 제일 마지막에 설명해 놨더라고요.”
우희가 아파서 약을 청했으면 약상자가 아니라 대사형이 직접 왔을 거면서, 이겸에게 쓸 약을 부탁하니까 이런 얕은 수작을 부렸다.
‘대체 이게 무슨 심보람? 아예 안 줄 것도 아니면서.’
우희가 골이 난 목소리로 툴툴댔다.
“미리 안 읽었으면 치료 마칠 때까지 괜하게 아팠을 거예요.”
상처 위로 백분을 뿌리자 보글거리는 공기방울이 맺히더니 이윽고 피딱지가 나무껍질처럼 변해 툭툭 떨어졌다. 우희는 다음에 바를 약을 꺼냈다.
“어때요? 전 바로 안 아파지던데.”
이겸이 우희를 빤히 응시했다.
“왜 말이 없어요?”
“…….”
“당신 정말 싫어요. 이럴 때만 약속을 지켜.”
“…….”
“알았어요. 이번 생이 끝날 때까지 어디 한번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어 봐요. 내가 허락해 주나 봐라. 감히 인내심으로 신선을 이기려 들어?”
우희가 약통을 열었다. 부드러운 솔로 진액을 펴 바르는 방식의 약이었다.
‘어차피 진통제도 먹었는데 이제 사정 봐주지 말고 발라야지. 내가 조금 떼어 먹었다고 효과가 덜해도 몰라. 이 꼴로 돌아온 벌이야.’
우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진액을 듬뿍 떠서 이겸의 어깨에다 퍽, 하고 끼얹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손길에 이겸이 움찔했다.
“아파요?”
우희도 움찔했다.
“많이 아파요? 아직 약효가 안 돌았어요? 혹시 내가 환약을 너무 많이 떼 먹었나?”
우희가 얼른 눈으로 상자 안을 살폈다. 여분이 없나 확인하려는 거였다. 물약은 여유 있게 보내 줬는데 하필 진통제를 달랑 하나만 보낼 게 뭔가 싶었다.
“어쩌지. 여분이 없는데…….”
울상이 되어 이겸을 도로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대문 앞에서 가까스로 짓던 미소가 아니었다. 웃을 힘이 돌아온 사람의 표정이다.
“이제 말해도 됩니까?”
“아뇨. 안 돼.”
우희가 단칼에 잘라 내고는 이겸의 몸에 진액을 치덕치덕 발랐다. 피딱지가 떨어져 나간 피부는 불그레한 속살이 드러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 이겸은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빈 약통과 솔을 던지듯이 내려놨다. 붕대로 몸을 감싸면 급한 치료는 끝이다. 하루에도 두세 번 써야 하는 인간계의 약과 달리 태율이 보낸 것은 효능이 사흘간 지속되었다.
그동안은 뼈가 드러나기 직전까지 팬 상처에 새살이 차오를 것이다. 찢긴 근육이 다시 나무줄기처럼 뻗을 터다.
우희는 침묵 속에서 붕대 끝을 꼼꼼하게 동여맸다. 치료를 마치고 보니 이겸은 붕대로 지은 옷을 입은 듯이 보였다.
“가만히.”
우희가 다 사용한 약병들을 끝까지 털어 얼굴에 바를 정도의 소량을 얻어 냈다. 수묵화같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단왕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피가 말라붙은 입술은 결대로 갈라져 부르텄고, 푸르스름한 멍과 자줏빛 멍이 곳곳에 들어 있었다.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불그스름했다.
그중에서도 안타까운 것은 오른뺨을 길게 찢어 놓은 채찍 상처였다.
깨닫지 못한 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인간의 몸이란 게 이토록 약하다는 사실이 우희를 무섭게 만들었다.
‘이번엔 다행히 대사형이 도와주었지만 다음에도 늦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내겐 더 이상 도력이 없고, 선계에 도움을 청할 때까진 시간이 걸리는데.’
만약 서로에게 사정이 있어 동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어떡할 것인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이겸이 그랬듯 형틀에 묶여 있다면 도움조차 청할 수 없다.
‘무력하구나.’
선득한 깨달음이 우희의 뺨을 타고 흘렀다.
‘당장이라도 죽을까 봐 무서워.’
선계의 약이 효과가 뛰어날수록 우희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약을 쓰기 전까지 이겸은 끔찍한 통증 속에 피를 토했다.
의원의 말에 따르면 내상이 심각해서라고 했다. 채찍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타격을 가해서 장기가 다쳤다고 했다. 의원은 불구가 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거듭 탄식했었다.
그랬는데 환약 한 알을 먹으니까 대번에 사람의 얼굴이 폈다.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보였던 사람이 이제는 호흡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너무 달랐다. 모든 것이.
뛰어난 약효에 마냥 기뻐하기에는 막막함이 우희를 압도했다.
“인간계에선 당신이 왕이죠. 비록 저랑 선계에 들기로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의 삶이 가치를 잃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은 단왕을 따르는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이런…… 일도 감행한다고 쳐요.”
우희가 눈물 그득한 눈으로 이겸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 생만이야.”
커다란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좀처럼 울음이 익숙지 않은 우희는 눈두덩까지 뜨거워지는 감각이 너무 어색하기만 했다.
“제가 상제 대리에 봉해지고 나서도 이런 짓을 저지르면 전하께선 당장, 그 즉시 냉궁행이에요. 아시겠어요? 이런 치료 없이 냉궁에 가둬 버릴 거란 말이에요.”
하우희가 치를 벌을 대신 받는 일 따위 다시는 없도록 할 것이다. 만약 경고를 무시하고 또 그러려고 하면 아예 자신이 벌 받는 장면을 지켜보게 기둥에다가 묶어 버릴 터다.
이 말을 하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 울지 않고 말을 하고 싶었다. 정말 진지한 경고인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니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게 들렸다.
싫었다.
눈물이 이렇게나 사람을 약하게 느끼게 하는 줄 몰랐다.
이상하지. 맹아는 우희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서 좋다고 했었다. 우희도 자신의 그런 면모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데 약자에게 무르게 대하는 건 괜찮으면서, 왜 스스로의 약한 모습은 견디지 못할까. 어째서 이렇게나 짜증이 나고 싫을까.
우희가 소매로 거칠게 얼굴을 닦았다. 축축한 느낌을 빨리 지우고 싶은 나머지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갔다.
옷이 물결처럼 매끄러운 촉감이라도 몇 번이고 세게 문지르면 자극이 되는 법이다. 얼굴피부가 빨개지기 전에 이겸이 우희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미어질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붕대 너머의 몸만큼이나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냥 우세요.”
울어도 된다는 말을 듣자 눈물과 반발심이 함께 터졌다. 우희는 이겸에게 잡힌 손을 홱 빼고는 그대로 한참을 울었다.
우는 동안 온갖 감정이 우희를 뒤흔들고 지나갔다. 지금도 이렇게나 속이 상하는데 이겸을 더 좋아하게 되면 얼마나 속이 문드러질지 아득했다. 매번 잘못했다고 사과하면서 왜 새롭게 사과할 일을 만드는지 화가 났고, 그러다가 대문이 닫히기 전까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또 왈칵 눈물이 터졌다.
결국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울다 보니 머리가 멍했다. 처음에 무엇 때문에 울기 시작했는지 기억조차 흐릿할 정도였다.
“언젠가부터 저를 종종 ‘당신’이라 부르고, 왕비께선 스스로를 일컬을 때 ‘나’와 ‘저’를 자유로이 쓰는 점을 자각하고 계십니까?”
이겸이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만가만 닦아 주며 물었다. 저 손수건은 내 건데 언제 품에서 잡아 뺐데? 이번에는 이겸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우희가 삐죽하게 되물었다.
“그게 뭐 어떻다고요.”
“좋아서요.”
이겸이 미소 지었다.
“전하도 좋지만 당신이 더 좋고, 당신도 좋지만 이겸이 더 좋습니다.”
“진이겸.”
“그건…… 어감이 약간 다르네요.”
이겸의 미소가 애매해졌다가 원래의 따스한 느낌으로 돌아왔다. 그가 속삭였다.
“냉궁에 유폐되지 않도록 조심하지요.”
하여간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재주는 타고났다.
“한데 정궁 자리는 제게 주실 겁니까?”
“벌써부터 굳히기를 시도해요?”
“중요한 사안이니까요. 미리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죠.”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만 년 뒤의 일을 걱정할 처지가 아닐 텐데. 우희가 기막혀 하느라 즉답을 주지 못하자 이겸이 손수건을 그러쥐었다.
“우희?”
“하는 거 봐서요.”
우희는 새침하게 대꾸하며 일어났다. 이겸이 쥐고 있는 손수건을 도로 가져와 코를 팽 풀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딜 가십니까?”
“미음 내오라고 할 거예요. 형부에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셨을 거 아니에요.”
“번거로이 하지 마시고 하인을 부르세요.”
우희가 코를 한 번 더 풀었다.
“제가 먹고 싶은 요리는 따로 있어서요. 직접 알려 주는 편이 나아요. 오래 잘 못 먹었더니 배고파.”
“어쩌다 식사를 잘 못 하셨습니까?”
우희의 눈이 세모꼴이 됐다.
“그럼 남편이 잡혀갔는데 잘 먹고 잘 잔 줄 알아요?”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는 데에 뭐가 있다. 필요할 때 말을 예쁘게 하는 재주도 있지만, 사람의 화를 돋우는 재주도 타고났다. 우희가 구시렁거리면서 침소를 나갔다.
한편 혼자 남은 이겸은 남편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식을 좋아하는 이가 며칠을 제대로 못 먹었다니 마음이 안 좋은 것과는 별개의 기쁨이었다.
“현아.”
그는 아직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바깥에 있는 호위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