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흔의 제안
“시작도 하기 전인데 안 듣겠다고?”
이흔이 놀란 시늉을 하더니 이내 기가 찬 헛웃음을 흩어 냈다.
“단왕이 통증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인데 네놈에겐 거부라는 선택지가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한해서는.”
“……남은 횟수나 마저 채우시죠.”
“드디어 네가 말을 하니 좋구나.”
“지겹습니다.”
이겸이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얼굴을 할 때마다 이흔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 모든 게 지겹군요.”
우희가 하지 말라는 짓을 했다. 나는 당신과 말을 섞고 싶지 않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겠다. 왜냐면 나는 당신과 다른 인간이니까. 이흔의 말에 따르면 정확히 그런 속내가 드러나는 표정이라고 했다.
싫은 놈이 싫은 표정을 지으니 얼마나 속이 비틀리겠는가. 심지어 여유를 부릴 상황도 아니지 않나. 이흔은 당연히 부아가 돋아야 했다.
하지만 이흔은 화를 내지 않았다. 눈썹 한 번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단왕비를 내게 준다면 남은 평생 황도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겠다.”
속이 뒤집어지는 쪽은 이겸이었다.
“저 먼 변경에서 쥐 죽은 듯이 살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어 주지. 진이겸 네가 간절히 원하던 바지 않느냐. 내 존재를 잊는 것.”
이흔의 낮은 목소리가 돌바닥에 깔렸다.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 어떠한가?”
이흔이 재차 말했다.
“네 옆 사람만 나에게 보내 준다면.”
단왕비에서 범왕비로. 정혼은 이겸과 했지만 혼례식은 이흔과 올린다던 전생의 우희. 형수님. 속박. 끊기지 않는 굴레.
이 이상 생각을 말아야 되는데.
“아우님?”
더 이상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하건만.
“당신이 감히 그런 제안을 해선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겸이 단정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실각한 왕야 주제에.”
이제껏 앞만 쳐다보며 침묵하던 형부 관리들이 일제히 이겸을 보았다. 조용한 시선의 이동에 방 안의 온도도 함께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지렁이는 봉황의 고기를 먹을 수 없듯이, 제안은 패배자의 몫이 아니죠. 당신은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할 만한 위치가 아닙니다.”
게다가, 하고 말을 이었다.
“단왕비는 제 명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랫사람이 아니고요. 그녀는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고 결정합니다. 범왕부는 어떤지 모르나 단왕부는 그렇습니다.”
이겸은 냉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마쳤다.
“솔직히 제 생각엔, 형님께선 그 사람을 품을 그릇이 못 되십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뒷말은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이쯤이면 단순히 선을 넘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도발의 정점을 찍고 만 이겸은 이어질 채찍질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흔은 기껏 들고 있던 채찍도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화를 내지도 않고 자꾸만 생각에 잠기는 이흔의 모습이 불안을 부채질했다.
“네 말뜻은 심소천을 얻으려면 네놈에게 말할 게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 물으라는 건가.”
이흔이 초원 저편의 사냥감을 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범왕부의 방식은 아니군.”
의미심장하게 덧붙이는 한 마디.
“그래도 본인 뜻이 그러하다면야 따를 수밖에.”
범왕이 누군가의 말을 따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겸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도발은 먹혀들지 않고, 알고 싶지 않은 범왕의 마음만 알게 되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겸은 초조해졌다.
어서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가 우희의 손을 잡고 익숙한 향기를 맡고 싶었다.
엉망이 되어서 돌아온 꼴을 보면 화를 낼까? 분명 그러겠지. 자신의 참혹한 몰골을 보고 우희가 범왕을 향한 연민을 다소라도 거둔다면 기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채찍질의 가치는 달성한 거다.
“현재 시각과 상황을 기록해라.”
이흔이 동석한 기록관에게 말했다.
“죄인이 혹독한 형벌을 버티지 못하고 연속으로 기절하여 옥사로 보내었다. 남은 형은 내일 마저 잇도록 한다.”
정신 잃을 기미라곤 없는 사람을 빤히 응시하며 지시를 마친 그는 이겸에게 다가와 어깨를 지그시 압박했다. 찢어진 부위가 눌리는 통증에 이겸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좋은 정보를 주었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다.”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단왕부를 지키고 있는 인력을 떠올렸다. 형부로 오기 전에 호위무사 현에게 우희 곁을 떠나지 말라고 일러 두었다. 장군 위세준과 정예병 7백 명도 상주하고 있다.
비절영 소속인 자도 지금 이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 방을 나가는 즉시 황후에게 보고할 테고, 그럼 황후는 단왕부에 부하들을 보낼 터다.
이만하면 우희의 주변은 황궁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이겸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상대는 수년 전 만취한 상태로 단왕부 집무실에 침입했던 인물이기에.
그날 이흔은 단왕부에 시신 하나를 남기고 갔다. 분풀이이자 본보기였다. 내로라하는 무인이었던 현의 사부는 내관처럼 그곳이 잘린 채로 자기 처소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현은 사부의 죽음이 그런 모습인 것을 납득하기가 어려워했다. 잘린 부위는 장례를 치르는 날까지 찾지 못했다. 시신이 온전해야 망자의 저승길이 평안하다는 옛말이, 뒤에 남은 사람들을 두고두고 괴롭혔다.
단왕부 담장을 따라 만 겹의 철갑을 둘러도 이흔의 침입을 막을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이겸이 부재중인 상황이었다.
‘진이흔은 우희를 죽이지 않겠지. 아마 다치게 하지도 않을 거다.’
사실 그거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우희의 안전이니까. 그녀가 위험에 처하지만 않으면 된 거다.
‘그게 맞긴 한데.’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인가. 역시 자신이 연연하는 것은 우희의 변심이 아닌가.
“남은 마흔일곱 대는 느긋하게 갚아 나가자고.”
이 말을 끝으로 이흔이 주먹을 휘둘렀다. 정신을 잃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이겸의 머리 옆쪽을 강타했다. 그 후로는 꿈도 끼어들 틈이 없는 짙고 깊은 어둠뿐이었다.
* * *
왕비를 대신해 벌을 받기로 한 단왕이 형부로 잡혀간 지 사흘째 귀가하지 않았다.
날짜가 자꾸만 미뤄지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형부에는 단왕의 세력이 없으며, 금 대인을 위시한 자들이 백방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는 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게 나흘째로 넘어가는 건 한 번쯤 짚고 넘어갈 문제였다. 황제가 친히 태감을 보냈다. 형벌의 집행이 어디까지 이뤄졌는지, 죄인의 상태는 어떠한지 묻기 위해서였다.
“죄인이 거듭 기절하는 까닭에 집행 속도가 더딥니다. 아직 서른 대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모로 납득이 어려운 보고였다. 다친 몸으로도 숱한 전투를 치러 낸 단왕이 채찍질에 계속 기절한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서른 대가 남아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냔 것이다.
여간해선 황제의 처소로 발걸음하지 않는 황후가 남편을 찾아갔다. 그녀는 범왕이 규정을 핑계 삼아 집행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있으며, 죄인을 옥사로 옮기지도 않고 형틀에 매단 채로 밤을 새우게 한다고 또박또박 일러 주었다.
“폐하께서 초래한 일이니 폐하께서 해결하세요. 오늘 안으로 유효한 황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본궁이 직접 복면을 하고—.”
“황후.”
“단왕을 빼낼 것입니다.”
“…….”
“본궁에게 두 번 말하는 습관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단왕이 형부에 들어간 지 닷새째 되는 날, 선고받은 횟수를 모두 채운 그는 비로소 왕부에서 보낸 마차를 탈 수 있었다.
마중 나온 하인들은 주인의 참혹한 상태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빨리 왕부에 도착하여 의원에게 보일 수 있기만을 바랐다.
* * *
도대체 무얼 해야 사지 멀쩡하던 사람이 닷새 만에 이토록 처참한 상태로 변할까.
우희는 귀가한 이겸의 모습에 경악했다.
처음엔 두 발로 마차에서 내리기에 그래도 걸을 힘은 남아 있구나 싶었다. 하인들의 부축을 물려서 더욱 안심했다. 하나 이겸은 단왕부 문턱을 넘자마자 대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등 뒤로 대문이 닫히고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해진 순간, 이겸의 무릎이 꺾였다. 무너지는 몸을 우희가 가까스로 받쳐 냈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말하지 마요.”
이겸이 입술을 답삭이는 걸 알아챈 우희가 화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는 이럴 것을 예상한 듯이 어두운 색 옷을 입고 갔지만, 색은 빛깔만 가릴 뿐 냄새까지 감춰 주지 못했다.
이겸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미 곪은 상처를 고의로 짓이겨서 덧나게 한 냄새가 피비린내에 덕지덕지 엉겨붙어 있었다.
옷으로 가려 놓아도 이럴진대 벗겨 보면 얼마나 더 끔찍할까.
우희가 눈짓으로 현을 불렀다. 현이 다가와 이겸을 부축했다. 왕비의 권한으로 마중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대문 근처가 텅 비어 있었다.
어차피 왕부 사람들은 죄다 이겸을 따른다. 이들이 다친 주인을 본다고 해서 좋을 게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 마음만 아플 뿐이고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처소에 의원을 불러 뒀어요. 대사형의 약이 도착했지만 한 번은 이곳 의원에게도 보여야 할 것 같아서요.”
우희가 작게 말했다. 형부에서 사람이 돌아왔는데 그 집에 의원이 출입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이지 않아도 이겸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해도 된다고 허락할 때까지 입도 떼지 마세요.”
이겸이 살짝 입술을 움직였다.
“웃지도 말고.”
우희가 이겸을 노려봤다.
“어디서 웃어요, 진짜.”
청개구리였다. 이겸을 보고 있자니 어머니 생전에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다가 냇가에 묻어 달라던 유언만은 지켜서 비 내리는 날마다 우는 청개구리가 떠올랐다.
범왕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당부했는데 끝내 상대의 성미를 건드려선 닷새째에나 풀려났다. 그래 놓고는 이제 집에 돌아오니까 얌전히 우희의 말에 따른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 남자는 하나도 안 착하다. 냉랭하고 이기적인 진이락과 거칠고도 잔인한 진이흔 사이에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이지만, 문자 그대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고집불통. 우희가 눈으로 욕을 했다. 결국엔 자기 좋을 때만 말 듣는 망나니. 굳게 다문 입에도 욕이 묻어났다.
절정은 의원 앞에서 탈의를 했을 때였다. 오랜 의원 생활로 어지간히 흉한 상처에도 반응하지 않는 노(老)의원이 길게 탄식했다.
“기력이 없으실 테지만 최대한 누워 있지 마시지요. 앞뒤로 빼곡하게 상처가 덧난 터라……. 어디에든 눌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형틀에 묶여 있던 손목은 시커먼 피멍이 들었다. 목 아래로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이겸의 몸에는 전장에서 얻은 상흔이 많았는데, 사람 몸이 누더기가 된 꼴을 보니 우희는 말문이 막혔다.
“속히 돌아가 처방약을 인편(人便)에 보내겠습니다.”
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물러갔다. 우희는 현에게 밖을 지키라고 명했다. 내 허락 없이는 황제라도 들이지 말라는 말에 현이 침소를 떠났다.
이제 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