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점점 더 애틋해져
우희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밖으로 나갈 순 없어도 경치를 구경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아침부터 내린 비에 땅이 젖어서 공기 중에 흙냄새가 떠다녔다.
며칠 전 단왕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이겸이 양해를 구했다. 황명이 탐탁지 않더라도 당장은 서로 행동을 맞추는 게 좋다고 말이다.
우희는 동의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은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을 고민해 봐야 했다.
‘과연 나는 범왕을 교화시킬 수 있을까?’
최대한 정화보검을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아무렇지 않게 인명을 해치는 범왕을 대하자 근심이 깊어졌다.
다행히 금 귀비가 의식을 찾았다고 했다. 복중 태아는 잃었지만 한참 동안 요양하면 다시 아이를 갖는 덴 문제없을 거라고 어의가 말했단다.
‘어쨌든 금 귀비는 원래 계획대로 했어. 연합 상대까지 서슴없이 속인 쪽은 범왕이야.’
이흔은 거짓말을 했다.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후를 버리지 않음을 알면서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척 금 귀비를 속였다. 제대로 된 함정에만 몰아놓으면 황후를 정궁 자리에서 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양, 그렇게 속였다.
황제 진이락이 황후 오은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애당초 오은이 다른 황자와 잠시 혼인 관계가 되는 게 싫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으로 뛰어든 자였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겐 단순히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 듯 눈속임을 했다.
심지어 진이락을 새로운 태자로 삼은 선황조차도 아들의 집착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이겸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진이락에겐 오은과 진이겸이 더없이 중요하나 만약 고통스러운 결정의 순간이 온다면 아마 동생의 손을 놓을 거라고. 그 선택 때문에 또다시 오은의 시퍼런 증오를 받을 테지만, 진이락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희가 옆에서 지켜보니 과연 이겸의 말이 맞았다.
저들은 지독한 관계구나. 한 명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고립시키면서까지 그이를 붙들어 매려 하고, 다른 한 명은 상대에게 실망하고 증오하면서도 그이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지워 없애는구나.
월하노인도 끊어 놓을 수 없는 사이가 진이락과 오은을 이르는 것이겠다.
‘진짜 극독일 수도 있었어.’
우희가 차가운 옥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범왕이 정말로 독을 바꿔치기 했다면 금 귀비는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우희는 이제껏 누군가를 죽여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을 해치는 건 당연히 상상조차 안 해 봤고, 마계의 포악한 괴물을 제압할 때도 영(靈)을 봉인하는 정도만 했다.
그런 자신이 그저 필요에 의해 남의 목숨을 거두는 이흔을 정도로 이끌 수 있을까? 이는 처음부터 오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문 너머에서 이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희가 들어오라고 답하자 이내 자물쇠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쨌거나 황제가 명한 자숙이었다. 상아와 매화를 제외한 시녀들은 왕비궁 밖으로 나갔으며, 접근을 허락받은 두 명도 식사를 가져다줄 때만 우희와 대면할 수 있었다.
우희가 왕비궁 내에서 이동할 때는 반드시 감시병 네 명이 뒤를 따랐다. 또한 우희가 방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때까지 문에 자물쇠를 걸어 두었다.
이겸을 마주하는 것은 황궁에서 돌아온 후로 처음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이겸을 보자 우희의 가슴이 크게 술렁였다.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와중에 욱신대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겸의 뒤로 문이 닫혔다. 전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은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잠잠한 호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 강렬한 기시감이 우희를 덮쳤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았다.
지금과는 다른 복식이나 여전히 고귀한 차림인 이겸이 우희 혼자 있는 처소로 들어서고, 그의 뒤로 미닫이문이 천천히 닫히는 환영이 우희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형님과 함께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본왕의 착오였군요.』
감정을 억누르며 덧붙이는 한 마디.
『형수님.』
밤하늘의 달도 수줍어서 모습을 감출 만큼 아름다운 왕비. 그녀가 들고 있던 붓 끝에서 먹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아무 말도 못한 사이 또다시 검은 물방울이 둥글게 맺힌다.
『난을 진압하고 왔더니 하 낭자께서 본왕의 형수님이 되셨더군요. 어제 만남에서는 미처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먼 여정에 피로했다고 하나 예의에 소홀해서야 되겠습니까.』
얼굴 높이에서 두 손을 모으는 태도가 담백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도사리고 있는 두 눈과 다르게.
『축하드립니다.』
입댈 데 없을 만큼 완벽한 인사에 왕비가 할 말을 고른다. 사실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다.
『붓은 내려놓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 말에 비로소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내린다. 이겸이 가고 나면 보고문을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떨어진 먹물이 종이에 튀어서 영 지저분해진 까닭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겸의 양모에게 보낼 보고문인데 더러운 상태로 보내고 싶지 않다. 그분이야 먹물이 튀건 말건 첩보 내용에만 신경 쓰시겠지만.
『황도를 떠나신 지 1년하고도 반년이 지났잖아요. 도중에 전하께선 실종되셨고—.』
『모두 형님 덕분입니다.』
『제 말뜻은…….』
『먼 곳에서 살펴 주신 덕분에 거동조차 못하던 나날을 딛고 황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겸이 묻는다.
『본왕에게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에 나도 당신 뒤를 따르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흔이 말했어요. 당신은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그러니 죽지 말라고. 천하가 당신의 죽음을 확신하는데 오직 이흔만이 내게 희망을 속삭였어요.
할 말이 어찌 없을까. 날이 밝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겸의 양모인 순빈과 한 약속이 떠오른다.
이겸이 살아 돌아온들 한낱 향리의 딸인 너와 혼인시킬 수 없으니 정말로 그의 앞날에 도움이 되고 싶으면 진이흔의 사람이 되어라. 차후 이겸에겐 여지를 주지 말고 선을 지켜.
혼례식으로부터 백 일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돌아온 당신. 내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돌아오셔서 기뻐요.』
정말, 진심으로.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뿐이네요.』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어.
우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실제 상황 같던 환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환영은 사라졌으나 이유 모를 가슴 떨림은 그대로였다.
“이겸.”
일렁이는 감정이 목소리에까지 묻어났다. 끝이 불안정하게 떨리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의 환영은 말 그대로 환영일 뿐이잖아. 1만 년 전의 삶을 비춘 거라고 해도 환상이긴 마찬가지야. 예정되었지만 결국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난 상제의 뜻에 따라 속세를 탈출했어.
현실에서 우희는 이겸과 단지 며칠간만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어디 멀리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고 단왕부 담장 안에서다.
천 년 동안 이별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애틋함이 치밀 수가 있지?
우희는 그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십—.”
이겸의 말이 뚝 끊겼다. 우희가 강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온기 서린 단단한 몸을 끌어안자 안도에 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아 있는 몸. 따스한 체온. 일정하게 뛰는 맥. 그리고 익숙한 살 냄새.
여기엔 형체 없는 환영이나 불안감 따위가 스밀 틈이 없었다.
“어째 괜찮지 않은 듯하군요.”
“전혀요. 아주 좋아요.”
“그대는 이렇게 몸을 떨 분이 아니신데.”
이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오한이 난 듯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관없다. 우희는 이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혹여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럼 본왕이 이마라도 짚어 보게 해 주세요.”
이겸이 부탁했다. 자기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우희를 억지로 떼어 놓긴 싫은 모양이었다. 우희는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이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냐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손바닥이 우희의 이마에 닿았다. 또렷이 느껴지는 온기에 술렁이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차네요.”
“이겸은 따뜻해요.”
우희가 이겸에게 기댄 머리를 고양이처럼 비볐다.
“겨울에 붙어 있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대답 대신 자기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우희의 열을 쟀다.
“저 열 없다니까요.”
“열이 없는 게 아니라 체온이 너무 낮습니다.”
이겸이 손바닥으로 우희의 뺨을 감쌌다. 뺨이라고 이마와 다를 리 없었다. 그가 열린 창문을 힐끗 보며 말했다.
“창을 너무 오래 열어 두신 건 아닌가요.”
말끝을 올리지 않은 이유는 그게 탓할 의도가 아니어서였다. 우희는 신선은 원래 인간보다 몸이 서늘한 편이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대는 지금 인간의 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홍진을 뱉어 내서 이런가 보죠.”
“예전에도 이러셨나요? 아닌 듯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겸이 우희를 부드럽게 떼어 냈다.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는 순간에 다다랐나 보다. 그는 우선 창을 닫고는, 문밖의 경비병에게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그대로 놔뒀다간 화로까지 들여올 기세여서 우희가 손을 내저었다.
“몸을 데우려다가 더위 먹겠어요.”
살금살금 이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사실 전 이쪽이 더 좋거든요.”
“……저라고 다르겠습니까마는 걱정이 돼서요.”
“하여튼 전하께선 걱정이 넘치신다니까.”
별생각 없이 부른 호칭에 가슴이 또 따끔거렸다. 1만 년 전에도 자신은 그를 전하라고 불렀다. 이겸은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후로는 우희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그가 부른 형수님이라는 호칭에는 짙은 원망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나 우희의 마음이 예전과 같음을 알고 나서는 그녀를 이흔으로부터 지키고자 일부러 예를 더 갖추었다.
결국엔 이흔에게 첩보가 발각되어 나는 목이 졸렸지만.
‘잠깐.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지?’
맹아가 알려 주지 않은 후일담이 우희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자리하고 있었다. 기억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이다음 이야기도 술술 떠올랐다.
‘황궁엔 피바람이 불고 절세가인은 고래싸움에 끼여 등이 터지네. 이토록 지독한 치정극이 다시없구나.’
알면 알수록 상제님이 구제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것과는 별개로 맹아와 만날 수만 있다면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전생의 환영을 보여 주면서까지 감정을 부추기지 않아도 되는데, 어째서 아까 전 같은 순간을 슬쩍 집어넣는 거냐고.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지 않느냐고.
“이겸,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을까요?”
우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있으면 좋을 텐데.”
“폐하께서 금 귀비 사건에 대한 처벌을 정하셨습니다.”
왠지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란 느낌이 왔다.
“국법이 정한 대로 채찍형 오십 대.”
“오십 대…….”
“거기다 황후마마에게 첫 혐의가 가도록 교묘하게 시기를 고른 점을 들어 가중처벌 열 대. 그리하여 형부감옥에서 총 육십 대를 맞아야 합니다.”
감이 잡히지 않아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이겸이 말했다.
“제가 대신 받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