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단왕비에게 채찍을
“폐하께 청컨대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궁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황제는 지금 당장은 듣지 않겠다는 말로 궁녀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금 귀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순간 황후는 물론이고 황제도 계략에 빠졌음을 알았을 터였다.
“짐은 귀비에게 갈 것이다.”
“폐하!”
“네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상관치 않겠다. 짐에게는 당장 귀비의 안위가 더 중요하니, 네게 어떤 벌을 내릴지는 나중에 논해도 늦지 않아.”
황제는 늘 자신의 곁을 지키는 태감에게 눈짓했다. 어서 저자의 입을 틀어막으라는 신호였다. 태감이 바로 말뜻을 알아듣고는 내관들을 호출했다.
무술을 익힌 까닭에 몸이 단단한 내관들이 재빨리 문제의 궁녀에게 달려들었다. 품에 소지하고 다니는 손수건을 뭉쳐서 재갈 대용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궁녀도 만만치 않았다.
“단왕비께서 소인을 사주하여 귀비마마를 독살하려 했사옵니다!”
“방자하다!”
내관이 궁녀의 뺨을 세게 쳤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손수건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양팔을 제압당한 궁녀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했다.
황제는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다가 멈춰 섰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손님들을 향해 오늘 일을 함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억울한 이가 없도록 사건을 찬찬히 파헤칠 예정이니 소문 만들기에 섣불리 일조하지 말라고 명했다.
모두들 황명을 받들겠노라 입을 모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이의 입을 언제까지 닫아 둘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한데 단왕비께서 왜 귀비마마를 해치지?”
“그걸 믿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
“저기 저 궁녀가 찬 팔찌가 옷차림에 맞지 않게 몹시도 호화로운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축하연에서 해치는 건 너무 눈길을 끌지 않나.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날을 고르겠나?”
밖에 나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 장내에서까지 대화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손님들은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추고는 서로 의문을 나누기 시작했다. 조용히 술렁이는 분위기 한가운데에 우희가 있었다.
“궁녀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실로 괴이한 일일세. 단왕비께선 귀비마마와 접점이 없잖나. 두 분이 따로 만난 적도 한손에 꼽을 수 있을걸? 원한을 품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단 말이야.”
“……꼭 직접적인 원한이 있어야 사람을 해치나?”
누군가가 수염을 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와 가까운 이의 이득을 위해 손을 쓸 수도 있고.”
“자네—.”
“아예 이 모든 것이 누명일 수도 있지.”
“나는 그만 나불대야겠네. 어느 쪽이든 내가 낄 자리가 아님을 알겠어.”
황제는 귀비궁으로 떠나려 했다. 황후가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완곡한 거절을 당했다.
우희는 황후가 동행하려는 이유를 알았다. 비절영의 영주는 독에 해박하니, 혹시라도 어의가 짚어 내지 못할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물론 간 김에 귀비궁 내부도 살필 터였다. 다들 환자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오로지 진이락을 위해서.
오늘 사건이 차후 황제의 발목을 잡을까 봐.
공교롭게도 황제가 그녀의 동행을 거절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귀비가 황후의 축하주를 마시고 피를 토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황후를 귀비궁까지 발걸음하게 했다간 이후에 꼬투리가 잡힐 게 틀림없었다.
누가 봐도 후처리를 위해 따라나선 듯이 보일 것이다. 실제로 황후가 귀비궁에서 하려는 일이 후처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테고.
두 사람은 반평생을 함께 보냈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후궁의 경비를 강화하겠습니다. 황후께선 처소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시죠. 짐이 태감을 보내기 전까지는 처소에서 안전히 거하세요.”
황후궁 담을 넘지 말라는 말에 오은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대답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기까지 이어진 잠깐의 침묵은 황명에 따르는 것이 내키지 않음을 뜻했다.
“……살펴 가세요.”
보는 눈이 많은 장소였다. 황후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뜻에 진심으로 따르는 거였다면 대답이 훨씬 빨리 나왔어야 했다.
황제가 떠난 후에 황후도 처소로 이동했다. 그들이 떠난 지 반 시진이 되지 않아 새로운 황명이 내려왔다. 이만 귀가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고 손님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은 제일 안쪽에 앉은 손님부터 장내를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우희와 이겸이 연회장 출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허리춤에 검을 찬 금군 수장이 단왕 부부를 멈춰 세웠다. 그는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황제의 권고를 전했다.
“내일부터 조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단왕비께선 처소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외부인은 물론이고 시녀나 하인과도 말을 섞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처소라면…… 단왕부를 뜻하나요?”
“단왕부의 왕비궁을 뜻합니다.”
금군 수장이 덧붙였다.
“실내 말입니다.”
왕비궁 안이라도 후원으로는 나가지 말라는 소리였다.
“중대한 사건인 만큼 두 분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말해서 권고일 뿐, 실제로는 거부의 여지가 없는 황명이었다.
우희는 허벅지에 동여맨 보검의 존재가 들통 나지 않았음에 한숨을 삼켰다. 궁녀를 통해 몸수색이라도 시켰으면 어쩔 뻔했나. 독살에 실패하면 단검으로 해칠 계획으로 보였을 터.
‘혹시 몰라서 가져온 건데 애꿎은 덤터기를 쓸 뻔했잖아. 앞으론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황궁엔 들고 오지 말아야겠어.’
우희는 취기를 핑계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범왕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우희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 *
황궁 연회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금 귀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사이에 복중 태아가 유산되었다. 어의의 확인에 따르면 복중 태아는 황자였다고 한다.
금 대인은 분노했다. 태자의 외조부가 되는 꿈이 송두리째 날아간 데다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해 온 장녀마저 목숨이 위태로운 상항이었다.
그는 장녀가 본인 몸을 해치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썼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딸의 영리함과 대담함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황후와 단왕의 유대가 굳건하긴 해도 어쨌든 황후는 의지할 세력 하나 없는 빈껍데기였다. 황제의 서재에서 먹 갈다가 승은을 입은 궁녀도 잘만 아이를 낳는 판에 황후는 그 오랜 혼인 생활 동안 회임을 한 적조차 없었다.
눈에 거슬리긴 하나 조만간 치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딸이 황자를 낳기만 한다면!
금씨 일족은 전력을 다해서 금설약을 지원할 것이다. 이에 자신의 외손자는 태자가 될 테고, 그쯤 되면 황제와 단왕도 마냥 황후를 정궁으로 세워 둘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장녀는 회임한 몸을 해쳐 가면서까지 정적을 무너뜨릴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몸을 사렸다가 황자를 생산하는 쪽이 이득이었다.
‘이번엔 단왕부가 우리를 친 게야. 단왕은 조심스럽고 치밀한 자니까 이번처럼 요란하게 일을 벌이진 않았겠지. 역시…… 끌려간 그 궁녀 말대로 단왕비의 짓임이 분명하느니.’
사건 당일엔 귀비궁으로 뛰어가느라 정신없었던 금 대인이었다. 이제 복중 태아도 잃은 마당에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게다가 황명을 받아 사건 조사를 맡은 자도 썩 탐탁지 않았다. 단왕 쪽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아군도 아니었다. 금 대인의 눈엔 조사가 왠지 지지부진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궁녀와 만날 수 없다니? 규정을 핑계 삼아 우리 측을 진상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함이 아닌가.’
천만다행히 의식을 잃은 지 닷새째 되던 날, 금 귀비가 눈을 떴다. 복중 태아가 떠났다는 말에 금 귀비는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아비로서 딸이 안된 마음과 좌절된 꿈에서 비롯한 복수심이 금 대인의 안에서 뒤엉켜 타올랐다.
“심소천.”
한배를 탄 세력끼리 금씨 저택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손님이 모두 돌아가고 난 조용한 서재. 금 대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이를 갈았다.
“단왕의 마음을 얻더니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느냐? 봉무국에서 금씨 일족의 힘이면 평북 지역 전체를 불사를 수도 있거늘.”
하나 아쉽게도 심소천은 친정과 그리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평북 심가를 쳐 봤자 심소천을 고통에 빠뜨릴 수 없을 터였다. 손을 쓰는 건 어렵지 않으나, 효과가 없다면 수고비만 버리는 꼴이 된다.
그래서 금 대인은 단왕비 심소천을 직접 겨냥하기로 했다.
다음 날 조회 시간, 나이 지긋한 대신을 필두로 단왕비를 엄벌에 처하라는 간언이 줄을 이었다. 이와 관련된 상소문이 황제의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규모로 따지면 봉무국에서 가장 큰 서원의 유생들이 성명서를 냈다. 한편 금 귀비가 공양미를 시주했던 사찰에는 죽은 황자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폐하! 문제의 축하주가 제공되기 전에 단왕비께서 한참 동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거기다 부자연스럽게 궁인 무리와 부딪쳤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당일 연회장 입구는 상당히 넓어서 만취한 손님끼리도 부딪칠 일이 없었습니다.”
“폐하! 궁녀가 임무 완수 후 자백을 했사온데 그날 내관들에게 압송된 후로 행적이 묘연하다는 말이 들립니다. 마땅히 형부로 보내어 조사를 받게 해야 합니다.”
“폐하! 감히 용종을 해하고 귀비마마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든 단왕비를 엄벌하여 주십시오!”
사방에서 압박이 가해졌다. 압박을 하는 세력도, 받는 세력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왕비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화살은 황후에게까지 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황후 오은은 괘씸함에 이를 갈며 남편에게 말했다. 자신은 폐후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이따위 저급한 수작에 물러서는 꼴을 보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앞이 가로막히면 베어 없애는 강호 출신의 그녀와 달리 황제 진이락은 일국의 황제답게 행동해야 했다.
결단이 불가피한 문제를 어떻게든 덮고 지나가면, 당장은 위기를 넘긴 듯 보여도 추후에 반드시 더 큰 문제가 터지기 십상이었다.
이번 사건은 자신들의 패배가 확실했다. 대세는 금씨 일족에게로 기울었다. 미래의 태자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었다.
다만 황제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국법에 명시된 형벌의 수준이었다.
“법대로라면 채찍 오십 대를 때린 뒤에 보름간 가택연금을 해야 하는데…….”
형부의 채찍형은 단순히 매 맞는 벌이 아니었다. 소를 때려잡을 만큼 건장한 장정도 열 대를 버티지 못하고 실신하는 엄벌이었다.
스무 대를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서른 대를 맞으면 벌하는 부위를 바꿔야 했다. 마흔 대를 맞으면 계절이 바뀌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며, 쉰 번의 채찍질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규중에서 자란 왕비가 그런 벌을 버틸 리 없었다. 심소천은 죽을 것이다. 숨이 붙은 채로 형부를 나간다고 해도 단왕부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게 분명했다.
사실 이와 같은 경우에 대부분은 형을 집행하는 관리를 매수하곤 했다. 뒤로 쥐여 주는 전낭의 무게에 따라 당일 사용하는 채찍이 슬쩍 바뀐다든가 후려치는 힘을 절반으로 줄인다든가가 가능했다.
문제는 형부가 이전에 범왕의 소관이었다는 점이다.
우두머리가 실권을 잃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형부 곳곳에는 여전히 범왕을 따르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