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함정
우희는 초대장에 적혀 있던 식순을 떠올렸다. 그에 따르면 검무가 끝난 후 초대받은 황족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부부가 일어나 축사를 전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술은 은은한 꽃향기가 감도는 청주로, 특별히 농도를 낮게 만들었기 때문에 임신부도 한두 잔쯤은 마셔도 무방했다.
만들기야 다른 술과 마찬가지로 어다선방(御茶膳房)에서 만들었지만 연회에서는 황후가 준비한 술로 소개될 예정이었다. 황제의 정궁이자 후궁을 다스리는 수장으로서 현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봉무국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있었던 풍습이라고 했다. 참으로 개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면 이때가 적기긴 하지.’
귀비와의 오랜 신경전. 그 와중에 또다시 회임한 귀비. 이번에야말로 위태로워진 지위. 황후에겐 동기가 충분한 데다, 의심받지 않고 살해 도구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축하연을 독살의 무대로 삼는 것은 너무 요란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원한이 깊었다고 몰아가면 그만이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혐의를 벗기 어려워짐은 당연하다.
‘이겸에게 알려야 할 텐데.’
우희는 너른 연회장의 제일 안쪽에 있는 이겸을 보았다. 하필 그는 단왕에게 인사하러 온 손님을 맞느라 몸을 돌린 상태였다.
소리쳐 부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연회장에 지필묵이 있을 리 만무하니 우희는 지나가던 궁녀를 붙잡아 자신의 팔찌를 빼 주었다.
“단왕 전하께 이것을 전하며 내가 술을 확인하러 갔다고 알리렴. 나는 단왕비니라.”
“알겠사옵니다, 마마.”
궁인들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금 귀비와 범왕이 자신들의 수족을 깔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우희는 애매하게 운을 떼는 정도로만 이겸에게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전해지기만 한다면 그는 분명 술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들을 터였다. 이흔을 쫓아 나갔던 우희가 아무 이유 없이 술을 확인한다고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귀비한테 직접 귓속말로 알려 주면 어떨까? 범왕이 당신 뒤통수를 치려 한다고. 술을 진짜 극독으로 바꿔 놨다고.’
이것은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해 본 생각이었다. 우희는 저 멀리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금 귀비를 쳐다보았다. 금 귀비는 검무를 마친 무희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안 믿을 거야.’
금 귀비는 누구보다도 이 축하연에 많은 판돈을 걸었다. 하나하나 치밀하게 준비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정적인 단왕비가 불쑥 다가와 범왕과의 연합을 흩트려 놓으려 한다면 그게 과연 진실되게 보일까?
금 귀비가 범왕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도 지략으로는 범왕에게 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금 귀비에겐 며칠 앓는 약이라고 속이고는 실은 극독으로 바꿔 놓았다? 범왕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금 귀비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 문제는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이 단왕비라는 점이었다.
귀비는 일단 우희가 이간질 중인지를 의심할 터다. 그러다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까 고민하겠지. 마지막엔 독이 든 술잔을 영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도 있었다. 본인이 마시기엔 위험하고, 공들인 축하연을 허사로 돌리기엔 아까우니까.
‘애초부터 술을 바꿔 놓는 게 제일 안전해.’
우희는 무희들 사이에 섞여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마침 무희가 물러나는 시점과 딱 맞추어 들어가려고 대기하던 궁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각자 작은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엔 새로이 제공될 술 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었다.
‘저거야.’
누가 어느 탁자를 담당하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서 있는 순서대로였다. 연륜이 있는 태감이 앞장서 들어갈 것이고, 태감 바로 뒤에 있는 내관이 황제 부부에게 술을 올릴 것이다. 그다음 내관은 단왕 부부를 맡는다. 황제의 동복형제인 단왕은 친왕 작위로서 귀비보다 높기 때문이다.
줄 서 있는 사람 중에 네 번째, 저 궁녀가 귀비의 술을 들고 있다. 우희는 자연스럽게 몸을 숨기고 쟁반을 엎을 기회를 노렸다.
“자, 이제 들어가니 다들 걸음에 주의해라.”
태감이 마지막 당부를 한 다음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궁인들은 등을 곧게 세운 한편 고개는 숙인 채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우희는 옷에 진 얼룩에 정신이 팔린 척하며 세 번째 내관과 부딪쳤다. 당황한 나머지 팔을 크게 휘두른 척했고, 그 덕분에 쟁반이 멀리 날아갔다. 사람들은 술 상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술 주전자 자체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세상에, 다친 덴 없느냐? 내가 앞을 제대로 봤어야 하는 건데…….”
“아니옵니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소인의 부주의입니다.”
연회장에 막 발을 들였던 태감이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얼른 달려왔다. 난처해하는 왕비와 엎지른 쟁반. 단번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미안하네. 내가 옷자락만 신경 쓰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했어.”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앞에서 화살이 날아와도 쟁반을 지켰어야 하는 건 이놈이지요.”
태감은 차분한 어조로 왕비를 응대하는 한편, 중요한 연회에서 실수를 저지른 젊은 내관을 쏘아보았다. 이번 의식이 끝나자마자 끌고 가서 곤장이라도 칠 기세였다.
“황후마마께서 준비하신 축하주입니다. 지금 당장 연회장에 들여가야 하는데 이놈이—.”
“급한 대로 이렇게 함은 어떤가?”
우희는 뒤에 서 있는 궁녀의 쟁반을 부드럽게 빼앗은 다음 내관에게 넘겨주었다.
“어차피 주전자는 똑같지 않은가. 술도 주방에 여분이 남아 있겠지. 연회장은 넓으니까 이 대열이 들어가는 데만도 시간이 걸려. 마지막 사람이 주방으로 뛰어가서 새 쟁반을 내오면 아주 늦지만은 않을 거야.”
“……좋은 생각이십니다.”
태감이 즉시 명령을 내렸다. 각자 들고 있던 쟁반이 앞사람에게 넘어갔고, 맨 끝의 내관은 부리나케 주방을 향해 뛰었다.
이로써 원래라면 금 귀비에게 제공되었을 술이 단왕 부부의 탁자로 가게 되었다. 우희는 태감에게 젊은 내관을 벌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고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이겸이 나직이 물었다.
“연회장을 나가신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어떤 분께서 워낙 요리조리 생쥐처럼 피해 다니셨어야 말이죠.”
우희는 벗어 놓고 간 피백을 다시 팔에 둘렀다. 흐트러진 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장내를 둘러봤다. 최고 연장자 부부가 이미 축사를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제 팔찌는 받으셨나요?”
“팔찌요?”
이겸이 우희의 손목을 쳐다봤다. 양 손목에 착용하고 온 포도색 칠보팔찌가 지금은 하나뿐이었다. 이겸이 되물었다.
“팔찌를 본왕에게 보내셨습니까?”
축사 순서가 부인 쪽으로 넘어갔다. 그때 태감을 선두로 한 대열이 등장했다. 보통 부인의 축사는 남편보다 짧기 마련이므로 궁인들은 한층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네, 궁녀에게 부탁했어요. 전하께 팔찌를 보이며 말을 전달해 달라고요. 제가 술을 확인하러 갔다고…….”
허둥지둥 주방으로 뛰어갔던 마지막 내관까지 장내로 들어섰다. 우희가 이겸을 보았다.
“못 받으셨군요.”
이겸이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희는 탁자 아래로 이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술 주(酒)’ 자와 ‘독 독(毒)’ 자를 빠르게 쓰자, 누구라고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건너편의 금 귀비를 쳐다봤다.
“하지만 제가 내관과 부딪쳐서 그 술은 우리가 받게 됐어요. 쟁반 순서를 앞으로 당겼거든요.”
때마침 단왕 부부 뒤로 아까의 젊은 내관이 나타났다. 내관은 더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쟁반을 내려놓은 후 술을 따랐다.
“증거를 날리는 것보다 우리 수중에 받아 두는 게 낫죠.”
“조금 석연치 않네요.”
이겸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눈과 귀를 깔아 놓을 순 있습니다. 그 정도야 저희도 예상한 바죠. 지금 이곳엔 저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황후마마의 수족도 있으니까요.”
그가 말끝을 흐렸다.
“다만…….”
“팔찌를 같이 보내지 말았어야 할까요?”
부인 쪽의 축사가 끝났다.
“궁녀만 보내면 당신이 내 말인 줄 안 믿을까 봐 그랬어요. 상황이 급하기도 했고.”
“팔찌는 사실 어떻게든 둘러댈 수 있습니다. 취기에 흘렸다든지요. 오히려 왕비의 귀중품을 습득하고서도 바로 전달하지 않은 죄목으로 몰아가는 게 가능합니다.”
이겸은 교묘한 시점에 제자리로 돌아온 이흔을 응시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흔은 황제가 잔을 들기도 전에 먼저 제 몫을 들어 올려 향을 음미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연회장 내 누구도 이흔을 저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적당히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냥 본왕의 귀에 속삭이세요. 말을 거르지 마시고요. 그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희가 두 손으로 잔을 드는 동시에 이겸에게 몸을 기울였다.
“금 귀비를 속였댔어요. 며칠 심하게 앓는 약을 축하주에 타서 마시는 걸로 황후에게 누명을 씌우자고 해 놓고는 사실 극독을 탔다고 했어요.”
“그래서 왕비께서 내관과 부딪치신 거군요.”
진갈색 눈동자가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겸의 얼굴이 굳었다.
“함정에 빠진 건 귀비가 아니라 저희입니다.”
“네?”
“이 술엔 독이 없습니다.”
이겸이 맞은편의 이흔을 고요히 노려보았다. 이흔은 이복동생의 시선을 받아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툭 불거진 이흔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향기로운 술이 목구멍을 적셨다.
“연회에 깔린 어떤 술에도 독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죠?”
“생각해 보세요. 술에 독을 탔다면 주전자를 바꾸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한데 왕비께선 곧장 귀비의 몫을 엎는 대신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변수죠. 이토록 중요한 일에 변수가 존재해선 안 됩니다.”
금 귀비는 가볍게 술잔을 비운 다음 앉은 자리에서 황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술은 문제가 없어요. 독은…… 처음부터 귀비의 입안에 있었을 겁니다.”
이윽고 금 귀비가 입을 틀어막더니 가냘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기침하듯이 울컥 토해 내는 피가 시꺼멨다. 연꽃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귀비의 몸이 옆에 앉은 부친에게로 쓰러졌다.
“아악!”
“마마! 귀비마마!”
“어, 어, 어의는 어디 있는가!”
이겸이 낭패의 표정을 지었다. 우희는 금 귀비 쪽으로 달려가려다 말았다. 근처에 있던 어의가 귀비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의식을 잃은 귀비는 들것에 실려 처소로 이동됐다.
“저희가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미 판이 짜여 있었어요.”
이겸이 우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왕비의 실수라고 여기지 마세요.”
“제가 따라 나가지 않았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추적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본왕 또한 동의한걸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엉망이 된 연회장에서 분연히 황제의 앞으로 나서는 자가 있었다. 궁녀의 얼굴은 낯설었으나 그이가 손목에 찬 팔찌는 우희가 아는 것이었다.
궁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슨 내용일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과연 궁녀는 황제폐하를 소리쳐 부른 뒤에 이마가 깨지도록 세게 머리를 조아렸다.